천년왕국은 존재하는가?
황대우 (고신대학교 교수)
<개혁정론> (2015. 10. 5.)
세례 요한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어지는 천국 도래,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한 희망은 흔히 종말론이라 불린다. 이 종말론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기독교의 가장 독특한 교리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 종말론에서도 요한계시록 20장을 근거로 천년왕국에 대한 교리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달라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계시록 20장에는 사탄이 잡혀 결박되는 기간 “천 년”(millennium = mille(천) + annus(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4절) 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년왕국의 근거다.
천년왕국에 대한 설명은 역사적으로 크게, “천 년”이라는 숫자를 문자적으로 수용하는 “천년주의”(Chiliasm; Millennarianism; Millennialism)와 그것을 상징적으로 수용하는 반-천년주의”(anti-Chiliasm; anti-Millenniarism)로 구분할 수 있다. 문자적, 혹은 문자주의적 천년주의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Premillennarianism)과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Postmillennarianism)로 세분되고, 상징적, 혹은 상징주의적 반-천년주의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 Amillennarianism)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계시록의 천년왕국을 상반되게 이해하는 천년주의와 반-천년주의는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상존하는 대표적인 기독교 종말론이지만,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세기 이후로 볼 수 있다. 오늘날 계시록에 대한 수많은 해설서와 주석들은 저자가 이 세 가지 관점 가운데 어떤 것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또한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이단들은 대동소이하게 자신들만의 독특한 계시록 해석을 기반으로 포교활동을 하는데, 대부분 문자주의와 상징주의를 자기들 입맛대로 활용한다.
전천년설은 ‘천년전재림설’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는데,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구분된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재림의 시기가 가까울수록 세상의 교회와 성도들이 박해를 받는 대환란을 겪게 되는데, 재림을 통해 대환란이 종식되고 동시에 지상의 천년왕국이 시작되어 천 년 동안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 후에 마지막 심판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역사적 전천년설과 달리, 세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1차 공중 재림과 2차 지상 재림으로 구분한다. 세대주의자들에 따르면 지상에서 고난을 당하던 성도들과 교회는 예수님의 1차 공중 재림을 통해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이후 대환란, 즉 지상 심판이 시작되는데, 이 대환란은 예수님의 2차 지상 재림을 통해 종식되면서 천년왕국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후천년설은 ‘천년후재림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즉 천년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최후 심판이 이루어지고, 이후 영원한 왕국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후천년설의 가장 큰 특징은 비관적 역사관을 가진 전천년주의자들과 달리 낙관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재림과 종말이 다가올수록 세상은 성도들과 지상교회에게 이전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낙원인 천년왕국이 역사 속에서 언제 시작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천년왕국이 끝날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최후 심판이 이루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천년설은 계시록의 “천 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천년주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반-천년주의”로 정의된다. 그 “천 년”을 계시록의 수많은 상징적인 숫자들 가운데 하나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체 기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주의자들과 달리 천년왕국을 지상낙원으로 보지 않는데, 이것이 무천년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무천년설은 재림과 종말이 가까울수록 세상이 혼란스럽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한다고 가르치는 점에서는 전천년설과 상통하고, 재림과 최후 심판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점에서는 후천년설과 상통한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 세 가지 종말론은 계시록과 다른 종말론 본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세 가지 천년왕국론은 이 중 하나를 지지하는 각각의 학자들에 의해 그 내용이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게 설명되고 있다. 가령 칼빈의 종말론은 칼빈 자신의 정의에 의하면 “반-천년주의”이지만, 성경 본문에 대한 칼빈의 해석으로 판단할 경우 때론 후천년설을 지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천년설을 지지하기도 한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자들의 종말론을 이 세 가지 천년완국설로 분류하는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계시록에서 “천 년”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천년왕국은 과연 역사의 종말에 존재하는 지상낙원일까? 이러한 천년왕국은 과연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아니면 무천년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지상낙원과 같은 천년왕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미 세 가지 천년왕국설이 존재하는 한 이 질문에 대한 통일된 답변을 듣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셋 가운데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각자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세상과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은 종말론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신자의 진정한 신앙적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대한 인식과 대망 없이는 불가능하다. 종말에 대한 인식과 대망이 부족할 경우 그리스도인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 쉬운 반면에, 그 대망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현실을 도피하게 되고 이단적 종말론에 경도되기 쉽다. 이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저작권자 ⓒ 개혁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