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하여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1. 머리글
이 글은 일제 말기(1938∼40년) 평양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주기철 목사의 전기 중 일부분으로 소개된 바 있어 그 내용은 어느 정도 파악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사실 확증이 부족한 상태였고 이 운동을 개교회 차원의 운동이라기보다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맥락에서 규명할 가치가 있어 그 내용과 성격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산정현교회의 약사를 살펴 본 후, 주기철 목사 부임 이후 전개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내용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으로 내용을 삼는다. 자료는 기존의 주기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삼되〈동아일보〉,〈조선일보〉,〈매일신보〉등 일반 언론에 실린 관계 기사 및 선교사 자료, 특히 산정현교회 협동(동사) 목사로 있던 번헤슬(C. F. Bernheisel, 편하설)의 서한 및 보고 자료를 참조할 것이다.
2. 평양 산정현교회 약사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와 함께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다. 평양의 장로교회는 1893년 마펫 선교사가 대동문 안 '널다리골'(판동)에 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03년 남문 밖교회, 1905년 창동교회가 설립되었고 1906년 1월 7일 평양의 네 번째 장로교회로 산정현교회가 설립되었다. 산정현교회 설립에 대한《平壤老會地境 各敎會史記》(1925년 발행)의 기록이다.
"一九O六年 一月 七日에 本敎會가 章臺峴敎會에서 分立하니 區域은 東으로 大同江에 限며 南은 陸路里로 自야 南山峴에 登며 西는 西門街로 由야 將別廳路에 達며 北은 崇靈殿으로 糖洞을 穿야 大同門에 至니 凡 八九百戶에 信徒 未滿 百人이라. 禮拜堂은 大同門內 板橋洞 舊禮拜堂을 仍用니 卽 美國 宣敎師 馬布三悅氏의 舊第라. 當時 職員은 宣敎師 片夏卨 領袖 桂澤宣 李德煥 執事 崔鼎瑞 金龍興 鄭利道 傳道婦人 勸師 李信行이러라. 冬에 韓承坤으로 助事를 選定다."
교회가 창립될 당시 교인은 장대현교회와 남문밖교회에 다니며 예배하던 137명이었으며 석 달 만에 주일 예배 참석자가 200명을 넘게 되었다. 처음 예배 장소는 장대현교회와 남문밖교회의 첫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대동문 안 옛 마펫 선교사 사택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이 평양의 변두리였기에 교회를 시내 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1907년 마펫 선교사의 도움으로 마련한 "城內隆興面三里鷄洞之西山亭峴之上" 기지에 예배당을 건축함으로 이 때부터 '산정현교회'로 불리었다.
목회자로는 번헤슬 목사가 설립 초기부터 맡아 10년 동안 봉직했고 한국인 목회자로는 1913년 한승곤 목사, 1916년 안봉주 목사에 이어 1917년부터 강규찬 목사가 부임하여 15년간 봉직하였다. 교세도 꾸준히 증가하여 1917년 당시 교인 총수가 6백여 명에 달했고 주일 평균 출석은 4백 명 선이었으며 1929년에 이르러 장년 8백 명, 유년 4백 명, 도합 1천 2백 명 교세를 기록하였다. 장로로는 1908년 계택선과 한승곤이 최초 장로로 장립 받았고 뒤를 이어 김동원(1910년), 김찬두(1912년), 박정익(1913년), 변흥삼(1915년), 양성춘(1918년), 오윤선(1922년), 조만식(1922년), 최정서(1923년), 김봉순(1923년) 등이 초창기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특히 산정현교회는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해서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는데, 1911년 105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김동원 장로가 체포되어 2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당회장인 강규찬 목사를 비롯하여 집사 김예진(후에 목사가 됨)과 조만식 등이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들어서도 김동원, 조만식, 오윤선 장로 등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 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산정현교회와 이들 장로들은 일제 경찰 당국의 주목을 받아왔다.
1933년 봄 강규찬 목사가 은퇴한 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송창근 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보다 앞서 같은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으로 먼저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던 박형룡 목사가 동사(同事) 목사로 봉직하고 있었고, 역시 송창근의 뒤를 따라 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재준도 평양 숭인상업학교 성경 교사로 봉직하면서 산정현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이로써 산정현교회는 김린서의 표현대로 "四福音硏究者 宋昌根 博士 主席이 되고 舊約學者 金在俊氏와 神學校 敎授 朴亨龍 博士 - 左右에 補助하고 잇스니 山亭峴 講壇은 朝鮮 最高 講壇"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띄고 있던 '30대' 청년 송창근 목사의 목회는 보수적 신앙의 '50대' 장로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결국 송창근 목사는 새 예배당 건축 문제를 둘러싼 당회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임 4년만인 1936년 4월, "西將臺에 自己 敎人 무덤을 一一이 審訪하고," 산정현교회를 떠났다. 산정현교회 당회는 마산 문창교회에 있던 주기철 목사를 후임 목회자로 지목하였다. 주기철 목사의 오산학교 스승인 조만식 장로의 권면도 있었지만 산정현교회 협동 목사 박형룡 박사의 추천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936년 7월 평양으로 이사하였다.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는 교인 갈등의 원인이었던 새 예배당 건축 문제에 관하여 교인들의 합의를 끌어내 "二萬圓 豫算으로 새 禮拜堂을 建築하고저 하야 임우 故人된 某未亡人의 捐補한 土地 六千餘圓 의치를 放賣하고 其餘는 사러 있는 敎人이 捐補"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건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교인들은 4만원 예산으로 '동양 제일의' 예배당 건물을 짓기로 하고 1937년 3월 7일 주일에 '건축 헌금'을 실시하여 "寄土賣價 一萬 千圓과 四人 各 五千圓의 捐補를 비롯하야 五萬 五千圓 豫算의 捐補가 볼서 略 四萬圓에 達"하는 결과를 얻었으니 이를 두고 김린서는 "禮拜堂을 爲한 四萬圓 捐補는 朝鮮에서 처음일 거시오 朝鮮 第一의 禮拜堂은 아마 山亭峴에 서게 될거시다"라고 격찬하였다.
예배당 건축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 해 9월 5일 주일에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로써 평양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산정현교회 부임 즉시 난제로 여겨졌던 예배당 건축을 무난히 해결하였고 이를 계기로 당회와 교인 사이에 강력한 지도력(charisma)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주기철 목사가 부산 초량교회 시절 장로로 세웠던 방계성 장로가 만주에서 신학을 한 후 전도사가 되어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것도 큰 힘이 되었다.
산정재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새 예배당은 산정현교회 교인 뿐 아니라 평양 교인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새로 지은 3백 평 규모의 2층 벽돌 예배당은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계속된 경제 불황에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더욱 악화된 민간 재정 상황에서 5만원 규모의 공사를 6개월 만에 끝낸 산정현교회와 주기철 목사의 능력에 많은 이들이 감탄했다. 그러나 반(反) 교회 세력들은 달랐다. 특히 1930년대 들어 '황민화' 정책을 표방하며 교회에 대한 통제와 탄압을 본격화하려는 일제 당국으로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즐비한 산정현교회의 '성공'이 부담스러웠다.
3.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3.1 주기철 목사의 1차 검속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체포된 기독교인은 평양노회 관내인 평남 중화에서 나왔다. 즉 1937년 11월 17일 평남 경찰부 고등계와 중화경찰서는 합동 작전으로 신사참배 거부 입장을 취하고 있던 김진식(金鎭植), 윤옥경(尹玉璟) 목사 등 중화군내 교회 목사와 장로, 전도사 23명을 체포하였다. 중화 목회자와 장로들이 평양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1938년 2월, 평양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평양신학교 기념식수 절단사건'으로 대거 검거되었다. 사건은 평북노회 소속 신학생 장홍련(張弘璉) 전도사가 2월 8일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노회장 김일선 목사)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기숙사 앞마당에 있던 김일선 목사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린 것에서 출발하였다. 평양경찰서는 2월 13일부터 사건 당사자인 장홍련을 비롯하여 김양선, 장윤성, 안광국, 조윤승, 지형순, 장윤홍 등 사상 불온 혐의가 있는 학생들과 이들의 배후 혐의로 평양신학교 박형룡 교수와 서무 한창선, 평양여자신학교 김인준 교수 등이 체포되었다.
주기철 목사도 1938년 3월경 평양 경찰서에 검속되었다. 정확하게 그의 검속 시기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주기철 목사는 일제가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 강요를 본격화하기 시작한 1938년 '봄'에 평양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나왔다. 이는 회유와 협박,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일제로서는 평양노회 부회장으로, 총회 총대로, 평양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 영향력이 점증하고 있는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평양신학교 학생 부흥회나 1937년 금강산 목사수양회 강사로 활약하면서 설교를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목사'로 부각된 그를 일제 당국이 연행한 것은 그를 회유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격리와 탄압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판단키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3.2 도미타 간담회
'도미타 간담회'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일제 측의 회유와 설득을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일제는 황민화 정책, 특히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는 한국 교회를 설득, 회유하기 위해 일본 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동원했다. 1938년 5월 1일, 평양 '내선교역자간친회'(內鮮敎役者懇親會)가 그 출발 신호였다. 평양노회 소속 목회자들과 평양에 있던 일본인교회 목회자들이 "互相懇談하여 交誼를 두터이" 하기 위해 결성된 이 모임에서 두 나라 교회 지도자들의 교환 방문이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내지 각 방면에 일본정신과 기독교의 실체를 견학하기 위하야"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고 평양노회 노회장과 총회 서기를 역임한 바 있는 장운경(張雲景) 목사와 평양노회장과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길(李承吉) 목사, 장로교 기관지〈基督敎報〉편집국장인 오문환(吳文煥) 등 이미 3월 25일 평양노회에서 '교섭위원'으로 선출된 인사들과 인근 황해노회 노회장을 역임한 김응순(金應珣) 목사 등으로 대표단을 구성하여 일본을 방문하여 "내지 주요 도시에 있는 각 교파 교회의 포교 상황을 시찰하면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내지 관민(官民)들의 열성어린 환대를 받고 감격하여 돌아왔다."
이에 대한 '답방'(答訪) 형태로 도미타의 방한이 이루어졌다. 도미타(富田滿)는 일본기독교회(일본장로교회) 대회의장과 일본기독교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일본의 대표적 정통 보수주의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외에 일본기독교회 상무위원이자 복음주의 계열 신문인〈복음신보〉(福音新報) 주필로 있던 히다카(日高善一) 목사와 일본신학교 교수 고오시[鄕司 爾] 목사 등이 동행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보수적 장로교회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본의 군국주의 종교 정책을 적극 지지, 후원했던 '우익적' 인사들이었다. 도미타 일행은 부산과 대구, 서울을 거쳐 6월 29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날 저녁 평양 기독교계 인사들이 마련한 환영식과 숭실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연합예배에 참석하였으며 이튿날 평안남도 도청과 장대현교회를 방문한 후 평양 교외 대동강가 읍취각( 翠閣)에서 평양, 평서, 황해, 안주 4노회가 연합으로 주최한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만찬을 마친 도미타 일행은 산정현교회로 옮겨 평양 지역 4개 노회를 대표하는 '논객'들이 참석하는 간담회에 참석했다. 간담회의 의제는 신사참배 문제였다. 1차 검속에서 풀려난 지 얼마 안 된 주기철 목사도 참석했다. 이승길 목사가 사회를 보고 오문환의 통역으로 진행된 간담회는 도미타의 연설로 시작되었는데 도미타는 "이미 정부가 신사에 대하여 국가 의례일 뿐 종교가 아니라고 규정한 이상 이를 종교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법령을 인용하며 길게 설명하였다. 연설 후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한국인 참석자들은 (도미타의 주장과 달리) 신사와 종교를 일치시켜 해석한 일본 저서를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기했다. 그 중에도 "주[기철] 목사 같은 자는 통역을 내세워 끈질기게 논구(論究)해 왔다."
주기철은 도미타 일행과의 논쟁을 통해 일본에서 발행된 신사 관련 도서와 경찰에 검속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1) 신사 참배는 국가 의식이 아닌 종교 의식이며, 2) 이를 강요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3)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이에 저항할 것을 표명하였다. 비록 간담회에서 주기철의 반대 입장이 관철되지는 못했고 오히려 이미 '친일' 쪽으로 기운 노회 지도자들의 참배 입장이 대세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 모임을 통해 한국 교회의 '양심적' 지도자들의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 입장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신사참배 문제로 유치장 생활을 하고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처지에서 일본 측 저술을 예로 들어가며 일본 측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순교'를 거론하며 신사참배 거부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주기철 목사로 인하여 일본이 의도한 것처럼 한국 교회의 '황민화' 과정이 수월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임이 드러났다.
3.3 노회와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과 선교사 대응
도미타 일행의 평양 방문을 평양 교회의 '친일화' 작업은 일제 경찰 당국의 적극적인 협력과 후원을 받으며 이루어졌다. 1938년 9월 장로교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의 최종 입장을 도출해내려는 일제 당국으로선 총회 개최 예정지인 평양의 입장 정리가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 징조는 종전의 내선교역자간친회를 평양기독교친목회로 확대 개편한 1938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평양기독교친목회 관련 인사들의 주도로 8월 초순, 평양노회 관내 강동과 순천 지역 목회자와 장로들이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같은 시기 "평양부내 교회 수뇌부 장로 제직" 70여 명이 평양경찰서 3층에 모여 간담회를 갖고 신사참배 수용방침을 정했다. 그리고 8월 24일에는 평양경찰서의 지시에 따라 평양 시내 목사, 장로 59명이 평양경찰서 응접실에 모여 시국 간담회를 가진 후 '평양예수교장로회 교직자 일동' 명의로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선언문 발표하였고, 8월 25일에는 평양 교회 대표 21명이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다.
이로써 평양노회는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신앙적으로, 정치적으로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평양노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함으로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수용은 대세를 타게 되었다. 평양노회는 인근 안주노회, 평서노회와 함께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시키는 '악역'(?)을 담당하기로 결의하였다. 결국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장로교회 제27회 총회가 개최되었고 총회 둘째 날인 9월 10일 오전 11시, '각본에 짜여진 대로' 총회는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응률 씨의 신사참배 결의급 성명서 발포의 제안건은 채용하기로 가결"하였다. 이어서 총회는 "부회장과(임원대표) 각 노회장으로(회원대표) 본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고, 이에 따라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 인솔 하에 27개 노회장들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회와 총회의 '친일 어용화' 작업에 대한 반대와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저항은 선교사들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이미 1936년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정부와 타협하기보다는 '사업 인퇴'를 결정했던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1938년 9월, 한국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총회 후 선교사들 사이에 "학교 사업 인퇴 뿐 아니라 한국 교회와 관계를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극단적인 선교사들은 신사 참배를 수용한 교회와 일절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는 총회가 열렸던 평양 지역의 선교사들, 즉 번헤슬, 블레어, 말스베리, 해밀튼, 힐, 킨슬러 등 '보수적' 선교사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총회 직후 '개인적 결단'으로 소속 교회 및 노회에서 맡았던 '공적' 직위를 사임하는 것으로 신사참배를 수용한 한국 교회에 항의를 표하였다.
경찰 당국은 신사참배 문제에 부정적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수용한 '기성' 교회와는 거리를 두면서 반대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교사와 한국인의 접촉을 차단하고자 노력했다. 1939년 2월 번헤슬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경찰은 선교사와 한국인 목사들과 다른 교인들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경찰은 한국인들에게 우리 집을 방문하지도 말고 우리와 접촉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선교사들과 현지 목회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협력과 친교를 다지는 평양 교역자회의도 지난번 모임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목사들에게 이 모임을 멀리하라고 주의를 주었답니다."
평양 주재 선교사들은 비록 공개적인 선교 지원이나 협력은 할 수 없었지만 일부 선교사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한국 교회 교인들과 연락을 취하며 일제의 종교 정책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 협동 목사로 있던 번헤슬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번헤슬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지지, 후원하였고 그로 인한 한국 교회 수난 현장의 목격자가 되었다. 특히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투쟁과 수난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그 실상을 기록으로 남겨 박해시대의 증언자(Witness)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3.4 주기철 목사의 2차 검속
1938년 9월 7일, 번헤슬이 '마지막'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평양으로 귀환했을 때, 한국 교회는 이미 수난 상황에 돌입해 있었다. 번헤슬은 산정현교회 당회의 요청을 받고 신사참배 문제로 목회자가 감옥에 들어가 비어 있는 강단을 지키는 것으로 산정현교회의 산사참배 반대운동 대열에 합류했다.
주기철 목사의 2차 검속은 경북 의성에서 일어난 '농우회사건'과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농우회 사건은 일제말기 민족주의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경찰 당국이 기획, 조작한 대표적인 '사상사건'의 하나였다. 경찰 당국은 이 사건을 "기독교도의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명명하였다. 즉 사건의 중심인물인 유재기(劉載奇) 목사에게 "평양신학교 및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사상학생 10여 명을 규합하여 기독교사회주의를 실현시킴으로 의하여 조선 독립을 달성할 수 있도록 농촌연구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전선(全鮮) 각지에 협동조합, 소비조합 등의 단체를 결성하고 이를 통하여 농민 각 계층에 투쟁의식을 주입한 자"라는 혐의를 두고 유재기 목사의 평양 유학 시절과 의성읍교회 목회 시절, 농촌부원 활동 시절, 그와 관계를 맺었던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평양의 주기철 목사가 사건 연루 혐의로 의성에 압송된 것이다. 즉 1938년 8월 말, 산정현교회에서는 당회장인 주기철 목사와 송영길 부목사, 한준원 집사 등이 체포되었고 이웃 신현교회의 이유택 목사도 함께 연행되었다.
경찰 당국은 처음부터 이 사건을 '독립운동사건'으로 단정하고 수사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부풀려진', 경찰 당국에 의해 '꾸며진' 것이었기에 물증이 없었다. 유일한 근거는 혐의자들의 자백뿐이었다. 그리고 자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고문과 악형뿐이었다. 고문 때문에 권중하 전도사는 목숨을 잃었고 박학전 목사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처음부터 부정확한 정보와 추정에 근거하여 의성 경찰서가 과욕을 부려 전개된 사건이었던 관계로 고등계 형사들은 피의자들에게서 정식 재판에 회부할만한 '독립운동' 혹은 '사상사건'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12월, 피의자들은 검찰에 이첩되면서 대구 구치소로 옮겨졌고 그 중 유재기 목사만 재판에 회부되었고 나머지 인사들은 석방되었다. 주기철 목사도 대구에서 석방되어 1939년 1월 28일 평양으로 돌아왔다.
1차 검속도 그러했지만 2차 검속에서도 주기철 목사는 뚜렷한 혐의 없이 경찰서에 장기 구속되었다가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상태에서 석방되었다. 이는 주기철 목사에게서 기소를 할만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앞두고 '격리' 차원에서 그의 검속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4.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4.1 주기철 목사의 사임 압력 거부
신사참배에 관한 한 주기철 목사를 회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경찰 당국은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를 분리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산정현교회 당회가 그 첫 대상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2차 검속 기간 중에 이미 당회원 중 일부가 일본 경찰로부터 회유를 받기 시작했다. 회유 내용은 솔선해서 신사 참배를 하라는 것과 주기철 목사를 사임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회와 교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주기철 목사를 지지하였다. 번헤슬은 신사참배 문제에 관하여 목사와 교인들이 하나 된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교회는 신사 문제에 관한한 그[주기철 목사]를 적극 지지하며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작년[1938년] 이 문제로 주 목사가 체포되었을 때 이 교회 장로 세 명도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신사에 참배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약속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고 다시는 신사참배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당회 설득이 여의치 않자 경찰 당국은 주기철 목사에게 직접 교회 사면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경찰서에서는 평양으로 돌아온 주기철 목사에게 "3개월 내에 교회를 사면하라."고 강요하면서 매 주일 예배 때 경관들을 파견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회유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주기철 목사 주변에 교인들이 몰려 들 것은 당연했다.
"그는 반석처럼 버티고 서서 이교도와 어떠한 타협도 거절하고 힘 있게 목회해 나갔습니다. 신사참배를 수용한 다른 교회 교인들까지 그를 우러러 보았습니다."
경찰 당국은 위협과 협박에도 목사 사면을 거부하며 변함없는 목회, 변함없는 설교를 하는 주기철 목사를 사면이 안 되면 파면이라도 시켜서 교회로부터 '격리'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일을 목사직 임면권이 있는 평양노회에 맡겼다. 즉 1939년 10월에 개최된 평양노회에 "총회나 노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회자를 강단에 세우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런 노회 지침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주기철 목사가 10월 중순에 다시 연행되었다. 이것이 주기철 목사의 3차 검속이다.
이 때부터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당회는 번헤슬 선교사에게 주기철 목사 대신 강단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경찰서에서 방해하고 나섰다. 경찰은 이미 노회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 뿐 아니라 선교사도 설교할 수 없도록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번헤슬 선교사도, 산정현교회 당회도 그러한 노회의 결정을 무시했다.
번헤슬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자 경찰은 '교회 폐쇄'까지 염두에 둔 강경책을 모색했다. 결국 경찰은 1939년 10월 21일, 주기철 목사가 연행된 바로 다음 주일(10월 22일) 전 날, 기습적으로 신사참배와 설교자 문제를 들어 산정현교회에 '선전포고'를 하였다.〈동아일보〉는 그 사실을 "신사참배에 불응하면 산정현 예배당 폐쇄"란 제목으로 자세히 보도하였다.
"평양부내 산정현 예배당에서는 작년 봄 동교회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평양경찰서에 피검되어 지금까지 오는 중인데 그동안 주목사 대신 편하설(片夏卨)이란 서양 선교사가 교회 일을 맡어보아 오는 동시에 동교회에서는 몇 사람을 빼노코는 신사참배를 불이행하여왔다. 그런데 二十一일 아츰 돌연 평양경찰서에서 동교회 장로, 집사 등 十八명을 호출하고 一, 교회 위원은 전부 매주일 한번식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二, 설교 또는 기타 교회사무는 위원들만이 집행하고 서양인과 기타인은 교회 일에 관여하지 말 것. 三, 금일 오후 三시까지 회답할 일. 세 가지 항목을 지시하고 만일 불응하는 대에는 내일부터 교회를 폐쇄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보였다. 동교회에서는 타개책을 강구중이며 경찰서에서 지시한 기간내로는 회답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경찰 지시사항의 핵심은 교회 임원들의 신사참배와 선교사의 설교 금지였다. 주기철 목사를 면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갔다가 예상 밖의 지시 사항을 통보받은 교회 임원들은 당황했다.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10월 22일 방계성 전도사 인도로 주일 예배를 드린 후 제직회를 소집하여 1) 제직자 이외의 사람은 설교, 기타의 교회 일 보지 않기로 하고, 2)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히 협의할 문제인 만큼 제직회에서 처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결론을 유보한 것은 거부한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에 대해 경찰은 "첫째, 모두 신사 참배를 할 것, 둘째,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자를 강단에 세우지 말 것, 셋째, 즉시 신사 참배한 목사를 청빙할 것" 등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하나라도 불응하면 교회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하였으나 교회 제직들은 여전히 "교회가 폐쇄되더라도 신사 참배는 할 수 없다"고 더욱 강하게 반발했다.
4.2 당회와 제직회의 경찰 압력 거부
산정현교회 문제는 경찰 당국의 중요 현안이 되었다. 평남 도 경찰부와 학무과 간부들은 산정현교회 문제에 대해 협의한 후, 산정현교회가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할 경우 경찰부에서는 집회를 금지시키고, 학무과에서는 '포교규정'에 근거하여 노회 소유로 등록되어 있는 건물(예배당과 사택) 사용을 금지시키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방안은 평남도 경찰부 고등과장(谷重)과 평양 경찰서장이 마련하도록 하였다.
경찰은 우선 주기철 목사 대신 산정현교회 강단을 지키고 있는 방계성 전도사나 번헤슬 선교사의 설교를 중단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방계성 전도사가 10월 22일 주일 아침과 밤 예배를 인도한 것을 두고 "제직회원이 아닌 자에게 설교를 시켰다"고 트집을 잡아 10월 25일 수요일 예배 직전 그를 검속했다.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신사참배를 수용하거나 이 문제에 타협적 태도를 보인 인사들의 예배 인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설교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설교자가 있더라도 체포를 각오하지 않고는 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원로 채정민 목사가 11월 1일 산정현교회의 수요일 예배를 인도했다가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번헤슬 선교사는 "의도적으로 경찰에게 내가 '설득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전혀 그들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또한 방 전도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체포될 것이 무서워 예배 인도를 꺼려하지나 않는 우를 범하지 많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주일 오전 예배와 저녁 예배를 계속 인도했다.
경찰에서도 당회와 제직회에 방계성 전도사나 번헤슬 선교사를 강단에 세우지 말 것과 당회장 주기철 목사를 경질할 것을 계속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당회의 통제를 벗어난 교인 대중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켰다. 번헤슬의 증언이다.
"그 다음 한 주간 동안 경찰은 교회 임원들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 다음 주일(11월 5일) 오전 예배는 장로 중 한 사람이 인도했고 그 날 오후 전체 임원이 모여 어떠한 경우에도 신사 참배한 사람은 제단에 세우지 않겠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작년에 단 한 번 신사 참배를 했던 장로 세 사람마저 설교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강단에 오르면 경찰은 신문에다 산정현교회가 마침내 굴복하고 신사 참배자를 강단에 세웠다고 선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사자인 세 장로들도 교회가 곤경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런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자에게는 강단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결정은 이후 산정현교회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이 결의를 계기로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교인들은 이미 주기철 목사가 연행된 직후부터 매일 '특별새벽기도회'를 개최하여 신앙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당회장인 주기철 목사를 가두고, 번헤슬 선교사와 방계성 전도사의 설교를 중단시켰음에도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 의지는 꺾이지 않고 오히려 "신사참배자는 강단에 세울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갈 기미를 보이자 경찰 당국은 당황하였다. 엄포로 생각했던 '교회 폐쇄'를 현실화시킬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4.3 평양 노회의 주기철 목사 파면
경찰 당국은 산정현교회 문제를 조속히 마무리 짓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주기철 목사 파면과 교회 폐쇄라는 처음 방안을 추진하기 위해 경찰은 노회를 움직였다. 각 지역 경찰들은 미리 노회원들을 방문해 "주 목사를 사면시키고 교인들이 신사참배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당분간 교회를 폐쇄한다."는 경찰의 계획을 일러주며 "이런 동의안에 찬성할 것"을 지시하면서 "최소한 반대표는 던지지 말 것과 명령을 거역하면 어떤 일을 당할지 경고"하는 등 사전 작업을 거친 후, 1939년 12월 19일 평양 남문밖교회에서 평양노회 임시노회가 개최되었다. 노회 상황을 취재한〈매일신보〉의 보도다.
"로회장 최지화(崔志化) 목사로부터 신사불참배의 전후 경과를 보고하고 현재 평양서에 계류중인 주기철(朱基徹) 목사와 면회하고 조선장로교 총회로부터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과 최근 또 신사에 참배토록 발송하여온 통첩에 대하야 의론하엿스나 주목사도 끗끗내 이에 응치 안엇다는 것을 보고하자 서양인의 편목사가 즉시에 이러나서 장로교 헌법 조문을 드러 량심을 구속 운운의 불온한 말을 하다가 림석한 경관에게 발언을 중지당하고 퇴장을 당한 다음 다시 의사를 속행하야 문제 중의 주 목사를 사면식히고 압흐로는 신사에 참배할 교역자를 산정현교회에 임명하기를 결의하엿다. 그리하야 파란만튼 산정현교회 문제는 이로써 해결되엿다."
노회는 경찰의 각본대로 1) 주기철 목사 파면과 2) 신사참배 목사를 산정현교회 목사로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번헤슬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경찰에 끌려 퇴장 당했다.
"노회장은 노회의 현안 문제를 설명한 후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든 처리할 때는 교회법과 규례에 준해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습니다. 금줄 찬 경관이 나를 보고 앉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교회는 교인들의 양심을 구속하는 어떤 재판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교회 정치 제 1장 7절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총회는 많은 총대들의 양심을 억누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여기까지 말하였을 때 경관 세 명이 내게 달려들더니 나를 건물 밖으로 끌고 나가 경찰서로 연행했습니다. 나는 할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이로써 전에는 하지 못했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번헤슬이 퇴장당한 후 노회장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하였다는 이유로 장로교회 권징조례 19조에 근거, 주기철 목사의 파면을 선포하고 이인식(李仁植)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다수 노회원들은 '묵묵부답'으로 노회장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밝힌 '단 한 명'은 벽지도교회의 우성옥(禹成玉) 목사였다. 그도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파면 결정이 내린 직후 산정현교회 박정익(朴楨翊) 장로가 일어나 "이 문제를 총회에 고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역시 경찰에 연행되었다. 경찰의 적극적인 진압으로 양심 있는 노회원들의 반발은 미동(微動)에 그치고 말았다.
이로써 주기철 목사의 파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노회장에게 항의하다가 노회장 밖으로 끌려 나온 번헤슬은 경찰서로 연행된 후 노회에서 한 발언을 영어로 적어 제출한 후 석방되었다. 그는 풀려난 기쁨보다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가 당할 고난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컸다.
"우리는 교회 폐쇄 명령이 내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깁니다. 교인들에게 신사참배한 목사를 받아들이라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경찰이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주 목사는 분명 순교자가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노회의 비겁한 행동은 영원한 수치가 될 것입니다. 노회원들은 경찰로부터 화를 입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직접 당해본 사람도 있고 남에게 들어 그 형벌이 어떤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는 교인들이 예배당 문을 닫을지언정 이처럼 치명적이고 중대한 문제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벤헤슬의 우려와 예상은 적중했다. 경찰은 노회를 앞세워 산정현교회에 '신사참배 목사'를 집어넣으려 하였고 이를 거부한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예배당 폐쇄'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4.4 산정현교회 폐쇄와 그 이후
12월 19일 임시 노회 이후 산정현교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당회장 주기철 목사는 3차 검속 기간 중이었고 '농우회 사건'으로 주기철 목사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돌아온 송영길 부목사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방계성 전도사 역시 주기철 목사보다 2주 늦게 경찰서에 연행되어 세 달 가까이 '목회자 부재'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나마 경찰이나 노회 결정을 무시하고 주일 예배를 인도하는 번헤슬 선교사가 있어 교인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이런 번헤슬이 경찰에게는 눈엣 가시 같았다. 그 점은 번헤슬도 잘 알고 있었다.
"경찰은 나에게 당분간 산정현교회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압력을 넣어서라도 교인들이 신사참배 목사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손을 떼라는 뜻입니다. 나는 어제(1939년 12월 28일) 밤 교회 임원들을 내 집으로 초대하여 그들이 처한 상황을 다시 한 번 점검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나와 함께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주일 아침 예배만 인도했고 다른 예배는 당회원들이 인도했습니다. 내가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만 전혀 일을 하지 못하게 제한받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교회, 특히 목사와 전도사 모두 감옥에 가 있는 상태에서 교인들을 버려 둘 수 없습니다. 저들은 어떻게든 나와 교회 관계를 떼어놓으려 하고 있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교회는 경찰의 의지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평양경찰서는 수시로 번헤슬을 소환하여 노골적으로 자신들이 "교회를 경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번헤슬에게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번헤슬도 타협을 거부했다. 경찰 측에서 방법을 바꾸어 언론을 동원하여 선교사를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하였고 총독부 차원에서 선교사 추방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산정현교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 방안은 '예배당 폐쇄' 밖에 없었다. 경찰 당국은 이를 위해 다시 한 번 노회를 이용하였다. 1940년 3월 19일부터 22일까지 노회장 최지화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개최된 38회 정기노회에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 문제가 이번 노회의 핵심 안건이었다. 노회는 지난 임시노회에서 내려진 주기철 목사 파면을 재확인한 후 당회장으로 선임되었던 이인식 목사의 보고를 들었다. 번헤슬의 증언이다.
"그는 몇 차례 당회를 소집하려 애썼습니다만 장로들은 응하지 않았으며 그가 필요하게 되면 그 때 가서 부르겠노라 하였습니다. 그는 노회에 당회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음을 보고하였고, 문제는 전권위원회에 넘겨졌습니다. 산정현교회의 당회 기능을 잠시 중단시키고 특별위원회에 교회와 관련하여 전권을 부여하기로 하였답니다. 전권위원회를 구성한 7명은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찬성하고 경찰에 아부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전권위원들의 목적은 산정현교회가 정부 정책에 순응하여 신사에 참배하고 신사참배 목사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지금까지 산정현교회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용감하게 버텨왔습니다."
노회는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찬성하고 경찰에 아부하는 대표적인 인물" 7명을 전권위원으로 선정하여 산정현교회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노회는 번헤슬 선교사 문제에 대해서도 "노회의 명령을 순종치 않는다"는 이유로 "설교 금지를 통고"하기로 결의하였다.
경찰의 지휘를 받은 노회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노회가 끝난 다음 날(3월 23일) 번헤슬 선교사에게 "산정현교회와 관계를 끊으라."는 공문을 보냈고, 그 이튿날(3월 24일) 산정현교회를 '접수'하기 위한 행동을 취했다. 노회장 최지화 목사와 노회에서 당회장으로 임명된 이인식 목사와 함께 노회 전권위원들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산정현교회로 갔다. 그 날은 공교롭게도 부활주일이었다. 교인들은 노회에서 '설교 금지' 통고를 받은 번헤슬 선교사에게 주일 예배를 부탁했다. 노회 전권위원들과 산정현교회 교인들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충돌이 일어났다. 그날 현장을〈동아일보〉가 자세히 보도하였다.
"평양 산정현교회는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왔는데 작 二十四일 오전 十一시 예배시간에 또다시 문제가 일어났다. 동교회를 임시담임하고 있던 편하설(片夏卨) 선교사가 정각 전에 예배당으로 갈 때 정문 앞에서 들어가기를 거절당하고 노회에서 九명의 장노를 새로 정하야 예배를 보도록 하여 九명의 장노가 정각이 되어 예배를 보려고 최지화, 장운경, 이인식, 세 장로가 등단하였으나 이보다 五분전에 등단하야 찬미를 인도하던 양재연(梁在演)은 二百四장 찬미를 끄칠줄 모르고 계속함에 교인들은 모다 이를 따라 찬송만 하자 황형사부장(黃刑事部長)이 이를 끌어내고 예배 보기에 순응안코 찬미만 하는 신도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남녀 十三명을 평양서로 데리고 가서 취조중이라 한다."
번헤슬도 그 날 사건에 대해 자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11시가 되자 노회에서 나온 7인 위원들은 흥분된 상태에서 예배당 안으로 입장하여 잠간 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양 집사가 강단으로 올라가 찬송을 부르자고 했습니다. 8백 명이 넘는 회중은 양 집사가 인도하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진이 빠지도록 불렀습니다. 회중이 찬송 마지막 절을 끝내면 양 집사는 다시 1절부터 시작하였고, 그런 식으로 계속 불렀습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 불렀습니다."
20분 넘게 찬송이 계속되자 형사부장이 올라 와 경찰을 시켜 양재연 집사를 예배당 밖으로 끌어냈다. 그래도 교인들의 찬송은 그치지 않았다.
"그런 후 노회장이 일어나 조용히 하라며 손을 저었으나 그가 손을 흔들수록 찬송 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목사가 일어나 손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다른 전권위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교인들은 여전히 "내 주는 강한 성이요"만 불렀습니다. 그러자 다른 목사가 일어나 손을 흔들어 조용히 하라고 한 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와 전권위원들은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교인들은 계속 찬송만 불렀습니다. 그런 후 다른 목사가 나와 조용히 하라며 손을 거칠게 흔들면서 성경을 읽으려 하였습니다. 가까이 있던 사람이 들으니 그 목사는 '이런 식으로 하면 천당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부활절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려는 것 같았지만 가까이 있던 사람조차 교인들이 목청껏 부르는 '내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 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과 예배를 인도하려는 전권위원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10명도 안 되는 노회 인사들이 8백 명 교인들의 함성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경찰이 회중 속으로 난입해 들어가 "찬송을 부르지 못하도록 찬송가를 빼앗아 던지고 닥치는 대로 구타"하였고 "극렬하게 대들거나 찬송하는 교인들의 이름과 주소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였다."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 난장판으로 끝난 예배 장면을 마지막 순간까지 목격한 번헤슬 부인은 주일 오후에 있을 장년 주일학교 인도까지 할 생각이었으나 경관들에게 구타를 당한 후 예배당 밖으로 끌려 나왔는데 그 과정에서 손목과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그날 오후 극렬하게 저항했던 교인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준비 찬송을 인도했던 양재연 집사를 비롯하여 잠시 석방되어 있던 방계성 전도사, 12월 임시 노회에서 항의했던 박정익 장로,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 집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배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노회 전권위원들은 경찰의 도움으로 교인들을 예배당 밖으로 몰아낸 후 문을 봉쇄하고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써 붙였다.
"금번 형편에 의하야 당분간 산정현교회 집회를 정지함"
경찰은 노회를 앞세워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주기철 목사를 파면하고, 번헤슬 선교사와 방계성 전도사를 설교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예배당 건물을 폐쇄하는 모든 과정이 노회 이름으로 되었기 때문에 외견으로는 '교회 내부' 문제로 비쳐질 수도 있었지만 노회는 이미 경찰의 조정을 받은 '어용' 기구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산정현교회에 가해진 모든 조치는 '합법'을 가장한 정치 폭력이었다.
경찰 당국은 신사참배 반대운동 거점으로 여겨졌던 산정현교회 목사와 전도사, 장로들을 구금하고 예배당까지 폐쇄함으로 반대운동의 의지를 꺾고 그 세력 확산 시도가 수그러들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목사가 없는 상태에서도 굴하지 않고 노회 지도자들과 맞서 대항하였고, 예배당을 사용하지 못할지언정 신사참배자를 강단에 세울 수 없다는 '수진제단'(守眞祭壇)의 의지를 대내외에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저항과 투쟁은 이후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였다. 그런 면에서 예배당 폐쇄로 실패한 쪽은 오히려 노회와 경찰이었다는 번헤슬의 주장은 타당하다.
"경찰과 그 앞잡이들인 7인 위원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교인들은 강제로 추진하려는 이교도화 작업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치 오류도 없이 공개적인 방법으로 진리의 증인으로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하느니 새로 지어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을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영광이 있기를."
교회 폐쇄로 예배당 출입을 할 수 없게 된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채정민 목사, 방계성 전도사, 이인재 전도사 등의 집을 돌며 주일 예배를 드렸고 교인 가정을 구역으로 나누어 백인숙 전도사와 오정모 집사가 심방하면서 신앙을 지도하였다. 이는 제도권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차원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전례가 되었다. '지하교회' 형태의 저항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5. 맺음 글 : 산정현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의미
지금까지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서 다음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목회자와 당회, 제직회, 교인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제의 정책과 강요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경찰 당국이 채택한 방법의 하나가 '각개격파'(divide and rule)였다.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순응 세력과 저항 세력을 구분하고 이에 따라 회유와 탄압이라는 2원적 대응책을 섰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고 이들 사이에 불신과 갈등이 빚어졌다. 또한 경찰은 신사참배 문제를 다루면서 목사와 평신도, 당회와 제직회, 선교사와 한국 교회를 분리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싼 교회 내부 갈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경찰 당국은 산정현교회에 대해서도 당회나 제직회에 주기철 목사를 사임시키고 신사참배를 하는 목회자를 초빙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상대적으로 강고한 제직회보다는 당회를 포섭하여 목적을 이루려 하였다. 그러나 (초반에는 당회가 조금 흔들린 면이 있지만)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끝까지 주기철 목사를 지지하였고 그가 검속되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도 당회와 제직회, 일반 교인들이 단결하여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제 당국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다.
둘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제말기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내용과 방향을 앞서 보여주었다.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3단계로 이루어졌다. 개인적으로든 단체로든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1단계, 신사참배를 수용한 목회자나 장로들의 예배 인도를 거부하는 2단계, 예배당 폐쇄 이후 '지하 교회' 형태로 반대운동을 지속하며 동지들을 결속하는 3단계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차원에서 벗어나 반대자들의 연대를 통한 조직적 저항운동으로 발전하기까지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투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산정현교회는 이 같은 단계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1938년 이후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지방 교회 교인들이 평양으로 몰려들어 산정현교회 교인들과 연대함으로 평양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은 다른 지역에 전파되어 이후 전개된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내용과 방향 설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위기의 시대 교회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타협'과 '훼절'의 역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1938년 이후 평양기독교친목회와 그 영향 하에 있던 평양노회가 주도하던 '친일화' 과정에 산정현교회는 정면에서 저항하였다. 경찰들의 감시 하에 산정현교회에서 개최된 도미타 간담회에서 반대 입장을 밝혔던 주기철 목사는 투옥 중에도 회유당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주었고 교인들 역시 신사참배를 수용한 목회자나 장로들의 예배 인도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나 총회의 지시를 거부하고 끝까지 주기철 목사를 지지하였다. 이러한 제도권, 기성 교회 정치 조직에 대한 저항운동은 예배당 폐쇄 후 다른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세력들과의 연대를 통한 '지하교회' 저항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넷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제 군국주의 폭력 통치에 저항하는 정치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기철 목사나 산정현교회의 저항 대상은 신사(神社)와 신도(神道)라는 '종교적 영역'의 것이었지만 이것이 종교로 위장한 전체주의 정치권력의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저항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는 면이 있다. 일제는 경찰 조직을 동원하여 노회와 총회를 장악하였고, 이들 '어용' 교회 조직을 통해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 문제를 처리해 나갔다. 외견상 종교상 문제인 것처럼 위장하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지시였다. 일제말기와 같은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없던 '신정일치'(神政一致) 시대에 종교적 저항은 곧 정치적 저항으로 연결되었다.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동기에서 저항하고 투쟁한 것이 그 시대적 상황에서는 정치적 반체제 운동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제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을 검거하고 재판에 회부하면서 '치안유지법'이나 '보안법', '불경죄' '육군형법' 같은 정치와 체제 관련법을 적용한 것도 그 점을 반증한다.
다섯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국 민족운동사 맥락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주기철 목사나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항일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운동이 종교적이면서도 정치적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녔음은 분명하고, 민족운동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선 산정현교회가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산정현교회는 설립될 당시부터 '민족주의' 성향의 평신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였다. 1911년 105인 사건과 1919년 3·1운동 당시에 교회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조만식·김동원·오윤선 등 산정현교회 장로들은 1920-30년대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기성운동, 기독교청년회와 면려회, 신간회와 수양동우회 등을 통해 개량주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 같은 개량적 민족운동이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중단되고 민족 저항운동이 단절되었던 일제말기 상황에서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통해 민족 저항운동의 맥을 이었다. 즉 '민족 말살'을 지향하는 일제의 종교 정책과 지시를 거부하고 그로 인해 수난 당했다는 점에서 민족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는 말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일제말기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은 한말 이후 전개된 한국교회의 민족운동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가 민족 말살을 목적으로 한 종교 통제 정책을 수립한 후 '어용' 교회 조직을 내세워 교회를 통제하고자 했을 때 산정현교회는 목회자와 신도들이 일체가 되어 이에 저항했고 그로인해 박해받았다.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성경 진리와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와 영향력에서 정치적이고 민족적 저항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의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본훼퍼와 고백교회의 투쟁과 수난에 비할 수 있다. 그리고 독일 교회의 경우가 '민족 내부' 문제였다면 산정현교회의 경우는 '민족간'의 문제였다는 점에서 그 저항과 수난의 강도가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