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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병과 재난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경고의 언어

 

김영한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2015.7.7.)

 

머리말

 

우리 사회가 지난 2003년에는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증후군)는 방역 대책을 신속히 함으로 잘 막아 내었으나, 올해 2015년에는 그보다 약한 바이러스인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에 대해 초동 대책을 잘못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이 한 달 이상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중국 등 해외 관광객들의 무더기 예약 취소를 빚고 사회 각계의 성장지표가 하락하는 등, 작년 세월호 참사에 이어서 우리 사회가 잇따른 재난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가뭄 사태가 영향을 주어, 올 여름 소양강댐의 저장 수치가 가장 낮은 양을 기록했다. 장마가 와 남부와 일부 지역에 해갈을 했으나, 아직도 특정 지역은 심한 가뭄으로 재난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나 일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까지 이 모든 재난은 우연히 온 것이고 모두 인재(人災)”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대세다. 필자는 이는 세속적인 세계관이요,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손길에 대하여 영적으로 무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인간이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를 통하여도 자신의 섭리를 나타내시는, 세밀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I. 사회적·자연적 재난에 대하여 현대판 이신론적·이분법적 해석 내지 협착한 세대주의 해석

 

우리 사회에 다가와 두려움을 일으키고 확산되는 허약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전염병의 창궐유례없는 극심한 가뭄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첫째, 이신론(理神論)적 해석이다. 이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뒤에는 자연법칙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하셨고, 자연과 역사에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17세기에 일어난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아 18세기 영국에서 널리 유포되고 현대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해석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자연법칙의 과정에 맡겨 두셨다는 것이다. 이신론은 창조주를 인정하나, 이 세상을 섭리하고 주관하시는 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신론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인격적 신이 아니다. 이에 반해서 모세가 증거한 열조의 하나님은 스데반이 증거한 열조의 하나님으로서, 열조들이 나그네로서 가든 어떤 곳에서든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을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은, 우리 삶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위로하시고 희망을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둘째, 이분법적 해석이다. 이는 메르스와 가뭄을 단지 인재(人災)로만 간주한다. 그러므로 메르스 파동에 구태여 신앙적 해석을 가미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다. 메르스는 중동을 여행하다가 감염되어 돌아온 최초 환자(1)를 격리 조치하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확산(35, 141)되었기 때문에 구태여 신앙적·신학적 해석을 메르스 파동에까지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다. 신앙과 과학을 이분적으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에 구태여 신앙을 개입시켜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미신적으로 만들 우려가 있다고 본다. 메르스 확산을 초동 방역의 실패라는 인간의 실패로 설명하고, 메르스는 중동에서 발생한 전염병인데 우리 방역 당국의 초동 방역 실패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소양강댐 최저 저축량을 기록하게 한 중북부 가뭄도, 저수 사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그리고 4대강 사업이 구석구석까지 제대로 되지 못하고, 고지대의 농촌에 물을 대는 것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가뭄이 왔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저수 사업을 제대로 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인재(人災)는 하나님의 간섭이나 섭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구태여 이런 인재에 대하여까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신앙과 과학을 분리시키려는 사고가 강하게 들어 있다.

 

셋째, 세대주의 해석이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로지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적용시키는 협착한 사고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스라엘과 교회에만 제한시키는 협착한 해석학적 사고가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있다. 전염병이나 가뭄이라는 자연 재해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데서 비롯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재해는 하나님의 선민인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오늘날 이방 사회인 한국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논리다. 세대주의 해석은 구약과 신약을 분리시키고 구속사를 이스라엘과 연관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데 그 협착성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역사와 자연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경적 하나님을 어느 특정한 세속적 이데올로기(이신론·인본주의) 내지 신앙과 의학기술을 지나치게 분리시키는 이분법적 사고, 아주 협착한 신앙적 사고(신구약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구약 이스라엘에 집중하는 세대주의)에 제한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해석에 대하여 필자는 반대하면서 전염병과 자연 재해를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서 이들 자연과 사회 재해(災害)현상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경고의 언어로 조심스레이 해석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염병과 가뭄의 재난이 발생하는 사건의 총체 과정을, 인간의 사소한 준비 소홀과 실수까지 포함하여 이러한 재난을 자연과 사회적 복합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와 관련하여 깊이 성찰해 보는 것이 바른 성경적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세속사라는 보편사와 구속사라는 특별한 구원의 역사를 동시에 주장하시는, 넓고 오묘하신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에서 계시해주시는 분이시나, 성경 속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만사를 주권적 섭리에 따라서 간섭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그가 강조한, 보편사를 주장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판넨베르그는 신정통주의자 바르트가 하나님의 계시를 너무 협착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만을 강조한 것에 대하여, 자연과 역사에서 자신을 근원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를 강조하였다.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알타우스는 교회와 그리스도 계시 외에, 인간과 역사의 근원적 현실에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원계시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II. 자연과 역사의 근원적 현실에 주어지는 원계시로서의 하나님의 언어

 

1. 알타우스의 원계시 개념

 

20세기 독일 엘랑엔대의 루터교 신학자였던 알트하우스(Paul Althaus)는 바르트가 제시한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변증법적 계시 개념의 일방성과 편협성에 대하여, 자연과 역사의 근원적 현실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넓은 계시 이해인 일반적 계시”(allgemeine Offenbarung) 개념을 제시한다. 알트하우스는 이러한 계시 개념에 의해 하나님을 역사나 자연 과정과 동일시하는 역사적 범신론이 파악하듯이 계시를 단지 인간적 이성적 활동이라는 문화적 차원으로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에 나타나는 초월적 하나님의 자기 증시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다. 알트하우스가 제시하는 일반적 계시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현실에 근원적으로 항상 현재적인 하나님의 자기 증언을 말한다. 이러한 근원적으로 항상 현재하는 하나님의 자기 증언을, 알트하우스는 그의 독특한 용어인 원계시”(Uroffenbarung)라고 개념화시킨다(Paul Althaus, Die Christliche Wahrheit, Gutersloher Verlaghaus, 1972, 61-76).

 

알트하우스에 의하면 전 인간의 역사적 현실(언어, 종교, 질서, , , , 의 규범, 자연, 역사)은 곧 신 형상적”(theomorph)인 신적 현실을 증거한다. 이러한 신의 자기 증언으로서의 원계시는 소극적으로는 복음에 대한 인간의 불신앙을 죄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는 복음에 대한 신앙을 성취로서 규정한다. 그러나 원계시는 자연적 인간들에게 결코 중립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순간 자연적 인간 안에서 우상숭배적인 것으로 변모 내지 부패해 버린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근원적 계시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 나라에서 샤머니즘과 미신이나 그릇된 제사 등으로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자연적 인간에게 은폐된 것”(Verborgenheit)으로 변모되어 버리는 결과가 초래된다(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 59.).

 

알타우스에 의하면 하나님 계시가 우상숭배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현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죄를 변명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은 항상 원계시 앞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원계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지각하게 하나,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이 원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구원의 계시”(Heilsoffenbarung) 속에서만 성취된다. 원계시는 하나님의 근원적 자기 증거이긴 하나 불투명하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학자는 이를 해석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원계시는 비로소 계시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는 이 원계시와 구원 계시 사이에 적극적 관계를 수립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의해서 원계시는 인간에게 바른 양식으로 인식된다. 알트하우스는 이것을 ()인식”(Wiedererkennen)이라고 부른다.

 

2. 브룬너의 창조계시

 

알타우스가 제시한 원계시란 개념은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이 제창한 일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면서, 이를 자연 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 하였다. 스위스의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이러한 착상을 이어받아 창조 계시’(Schopfungsoffenbarung)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계시 외에, 인간의 양심과 자연과 역사에서 근원적으로 자신을 증시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사도 바울에게로 소급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당시의 문화인 로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자연 계시를 말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자기들에게 있기 때문에 핑계하지 못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8-19).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이방인인 로마인들에게 보인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므로 핑계하지 못한다고까지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 때 세상의 불신자와 미전도종족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어와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음을, 이 구절은 준엄하게 말해주고 있다.

 

원계시가 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구원의 계시도 바르트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구원의 계시는 인간의 전 현실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원계시를 전제한다. 구원의 계시가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인간의 전 현실 속에서 성취되는 것은, 이미 역사와 세계 속에 항상 근원적으로 현재하는 하나님의 원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 계시는 복음 안에서의 원계시의 활성화이다.

 

알타우스는 1930년대 독일 히틀러 통치 시절에 나치의 등장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고, 히틀러의 등장을 신학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원계시 신학은 어용신학이 되어 버렸다. 이는 당시 철학계에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라는 세기적인 저서를 1928년에 출판함으로써 철학계에 존재의 사고라는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독일 프라이부르그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히틀러의 등장을 지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치 등장을 지지한 알타우스의 역사적 오류는, 하이데거의 오류와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 원계시 개념은 1930년대 독일 나치 어용 신학자들이 아리안 민족의 신화를 독일민족의 혈통적 우월성 이데올로기로 격상시키면서 유대인을 차별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원계시 개념의 적용을 정치적으로 한 것이지, 원계시 개념 자체가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은 아니다.

 

원계시 개념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긍정적으로 시사하는 점은, 자연과 역사를 통한 인간의 근원적 현실에서 한 인간과 사회가 부딪치는 근원적인 숙명(8.15 해방, 6.25 전쟁, 4.19 혁명 등)에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회의 집단행동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간이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증시를 하신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원계시 개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일어난 메르스와 가뭄 사태를 신앙적으로 이해하는 데 하나의 해석의 측면을 제시해 주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번에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메르스 사태와 유례없는 가뭄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라고 신앙과 관련 없는 것으로 일축(一蹴)하기보다는, 오늘도 우리 사회의 근원적 현실 가운데 보이지 않게 그의 주권적 방식으로 활동하시고 우리 개인과 사회의 갈 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 가운데 주어진 것으로 조심스레 신앙적 교훈을 찾아보는 것은, 신학자와 목회자와 신자의 신앙적 성찰의 겸허한 자세라고 사료된다. <계속>

 

III. 염병과 사회적 재해는 하나님이 사회에 주시는 경고 언어

 

하나님은 교회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만 제한되어 일하시는 좁은 분이 아니라, 불신자들과 이 세상사의 세미한 부분까지도 섭리하시는, 이 세상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고대 이방 제국 이집트의 바로왕 시대에 찾아온 7년 대풍년과 7년 대가뭄은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집트에 죽음의 천사를 보내어서 한밤중에 온 이집트인들의 첫 아들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은, 그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고 있다. 바벨로니아 제국 시대에도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 , , 쇠와 진흙) 환상은 보편사(바벨론, 메디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등)를 나타내고 있다. 구약성경은 구속사를 증언하나, 보편사 속에서 그의 섭리를 드러내시는 역사의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도 산상 설교에서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시는 보편적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5:45b). 그리고 불신 세상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세상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섭리와 통치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영역이다.

 

사도 바울은 헬라의 수도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분은 자신을 증거 없이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이는 그분이 선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비와 풍요한 계절을 주시며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셨음이니라”(14:17). 인류 역사를 보면 중세 유럽에 페스트나 천연두가 대량 발생하여 많은 자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당시에는 의학적 지식이 부족하여 그 원인을 죽음의 천사라고 생각하여 신앙적으로 경건을 되찾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전염병들이 바이러스에 의한 것임을 의학 기술이 밝혀낸 이래로, 인류는 새로운 전염병(에이즈·에볼라·사스·메르스 등) 창궐에 대하여 더 이상 종교적 해석을 하지 않고 의료적 처방만을 생각한다. 그만큼 인류는 개화되기는 했으나, 문명의 발전만큼 인류의 신앙은 과학에 대한 신앙으로 바뀌고 있다. 세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아무리 인류의 의학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인류가 의뢰해야 할 하나님의 영역은 그대로 존재한다. 앞으로도 인류 의학이 제어할 수 없는 미지의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미지의 바이러스를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로마인들에게 나타남은 이들이 하나님이 양심에 주신 선하고 바른 길을 버리고 악하고 죄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2).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창조와 섭리의 길, 진리의 길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보편사의 하나님이시다.

 

1) 재앙(염병과 가뭄)은 하나님의 징계의 방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열방 사람들도 그가 정하신 의로운 길에서 벗어날 때에 일반적인 양심의 법으로 징계하신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온 염병과 자연 재해에 대하여 구약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유추(類推)하여 조심스레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26:24-25).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28:20-22).

 

자연 재앙은 하나님이 보내신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28:24). 구약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시대에 임한 가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다: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14:3-7). 예레미야는 가뭄의 원인이 하나님의 뜻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14:22).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떠나 죄를 짓고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채찍과 징계의 방편으로 염병과 재해를 보내셨다는, 예언자의 해석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일지라도 그의 창조물이요 양심을 통한 그의 법도를 지키도록 지음을 받은 이방 민족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하나님의 세상 통치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이웃을 향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숨어 계시는 일을 증거할 전도의 사명을 다해야 할 책임을 지닌다.

 

2) 염병과 가뭄의 원인은 사회적 공의 저하와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시민들의 불의

 

염병과 가뭄의 원인은 해당 사회가 지닌 구조적 불의와 범죄다. 한국사회가 올해 국민소득 3만 불에 도달한다고 하나 그 과정에는 관피아·정피아·군피아 등에 의한 구조적 비리,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 착취, 비정규직 노동자 수탈, 성장 혜택과는 전혀 무관한 셀 수 없는 사회적 약자 등 병리적 구조가 놓여 있다. 에스겔은 그 사회의 범죄 때문에 임하는 가뭄과 전염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가뭄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14:13). “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14:19). 하나님은 한 사회와 나라와 백성들이 저지르는 불법과 범죄에 대하여 재앙(전쟁, 소요, 염병, 가뭄 등)을 내리신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행한 불의와 불법 때문에 하나님이 칼과 가뭄과 전염병을 보내신다고 대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가뭄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14:10-12). 당시 불의한 유대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그가 보편사의 하나님이시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고 유추 해석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신자는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신자들은 이 말씀의 원리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이웃 동료들에게 해석해 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 그럴 때 이러한 시기는 전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3) 재앙 해결의 길은 사회 공의 회복을 위한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시민들의 정의로운 삶

 

백성이 정의로운 삶을 살면 하나님이 그 땅에 비를 주시고 땅의 소산물을 주실 것이라고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11:13-15).

 

예레미야 선지자는 의인은 염병이나 가뭄 때에도 두려움이 없이 견딜 수 있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17:7-8).

 

구약의 요나서는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니느웨(오늘날 이라크의 모술 근처)라는 이방 나라 수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때, 왕부터 시작하여 남녀노소 모든 백성들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4-10). 요나서의 메시지는 니느웨라는 이방 도시가 요나 선지를 통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섬으로써 그 사회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모면하였다는 것이다. 이 요나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불행과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길로, 오늘날 한국사회 대통령부터 각계각층 사회 지도자들, 모든 국민들이 겸허하게 받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IV.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나 진노가 아니라 사랑과 구원

 

예수님은 세상의 구세주로서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하나님은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 있다. 웨슬리는 과격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s)들이 주장한 제한속죄론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모든 세상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간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29:11).

 

요나서 4장에 이스라엘의 대적국 이방의 도시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이 이 도시에 대하여 진노와 심판을 거두시는 것을, 요나가 보고 실망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여 달라고 기도한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다정하게 대답하시면서 타이르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0-11). 구약의 이 장면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피를 받고 진노를 달래는 몰록신 등 변덕이 심하고 진노를 특징으로 하는 중동의 지역신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회개하고 정의롭고 선한 삶을 사는 자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무속종교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환이나 재난 시 재물을 받고 진노를 거두시는 기복의 신이 아니라, 우리의 회개와 바른 행실(정의와 선한 행실)을 요구하시는 공의와 인자의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신약에서 결정적으로 이 세상의 구속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사랑의 하나님을 증거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8b-9).

 

V. 한국교회는 이 시대를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재난을 전도로 활용하는 사명을 다해야 함

 

구약에서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강포하여 동성애 등으로 불법이 성행하자,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이 도시를 감찰하신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18:20-21). 하나님은 그 도시를 살피시고 진노의 심판을 내리기로 결정하신다. 그 직전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 도시를 멸하지 마시라고 중보기도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의인(義人) 십 명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18:32b). 하나님은 어느 도시 어느 나라에서나 의인을 찾으신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속하시고 영광을 얻으시도록 중보기도해야 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62:6-7).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49:6)이 되어 구원을 땅 끝에 이르게 하시기 원하시는 것 같이, 오늘날 한반도가 한국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하신다.

 

한국사회는 올해 2월 간통이 헌법재판소에 의하여 합법화되고, 6월에는 동성애 축제인 퀴어축제가 공공장소인 서울광장에서 서울시의 허가를 받아 개최되었다.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졌으나, 대기업만 부요해지고 중소기업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가난한 계층들이 더 많아졌으며,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문란해지고 있다. 동성애 차별금지법 등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세월호나 군 비리 등에서 빙산일각(氷山一角) 같이 드러났듯이, 우리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부정부패가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그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인·법조인·기업인·군 지도자들 등은 깊은 자기 반성을 하면서,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도사리고 있는 구조적(構造的) 비리(非理)와 부정부패(不正腐敗)를 척결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는 우리 사회를 위하여 중도기도를 해야 할 사명을 받고 있다.

 

맺음말

 

사도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이제는 모든 민족들이 자연과 역사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것을 전파하였다. “지나간 때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이 자기들의 길로 가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그분은 자신을 증거 없이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이는 그분이 선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비와 풍요한 계절을 주시며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셨음이니라”(14:16). 한국교회와 신자는 메르스와 가뭄를 하나님의 경고 언어로서 받아들이면서, 우리들이 먼저 회개하고 겸손한 태도로서 모범과 절제의 삶을 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조심스레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첫째, 염병과 가뭄은 대통령, 위정자들, 사회 지도층, 모든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 언어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초동(初動) 방역 실패로 인한 전국적 감염, 유례 없는 가뭄 등에서 대통령과 정치인들과 지도층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공의로운 일(포퓰리즘이나 당리당략이 아닌 진정한 국익)을 제대로 한 것인지, 시민들은 사회적 선을 추구하고 이웃의 사회적 약자를 돌보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간통의 합법화, 서울광장에서 동성애 집회 허용, 세월호 재난, 군의 비리 등에서 빙산일각(氷山一角)으로 드러난 사회의 구조적 부정부패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다. 교회와 신자들은 정부와 관리들이 정의롭게 통치하도록 기도하고 필요 시 예언자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그 뜻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둘째, 희생된 자들은 결단코 우리들보다 더 죄가 많은 자들이 아니다. 실로암 근처 예루살렘 성벽에 세워진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4-5). 메르스나 가뭄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하여 교만하거나 우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메르스에 걸러 별세한 자들이 우리들보다 더 죄가 많은 것이 아니다. 가뭄을 당한 농부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많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우리들도 당할 수 있는 감염이나 재난을 대신 당한 것뿐이다. 이는 우리들을 대신한 값진 희생이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교만과 허물을 돌아보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가야 한다.

 

셋째, 메르스는 하나님이 특히 그를 아는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주시는 경고 언어다. 하나님은 의인(義人) 10인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우리 사회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얼마나 되는가? 깊이 자성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에 본이 되기보다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메르스가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 연합체나 교단 내에서는 여전히 권력 다툼과 세력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메르스와 가뭄이 주는 하나님의 경고 언어를 빨리 깨닫고 회개하자!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더 큰 위기가 찾아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겸손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모든 명예욕·권력욕·소유욕을 내려 놓고, 경고하시는 하나님 앞에 빈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가자.

 

호세아의 다음 말씀을 깊이 성찰하면,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책망과 위로와 용기를 주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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