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김남준 목사의 설교에 대한 어느 무명인의 비판
주변에서 열린교회에 대한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다녀보면서 느낀점 몇가지 만 적고자 합니다. 정말 정말 저의 글이 문제가 된다 생각 되시면 관리자께서 직접 글을 지우셔도 상관은 않겠습니다.첫 번째는 설교에 대한 부분입니다.직설적으로 말씀 드려서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를 너무 어렵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그렇다고 해서 설교에 아주 심오한 깊이 있는 내용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어려운 단어 갖다가 철학적으로 빙빙 돌려서 추상적으로 설교를 하시는것 같습니다.
다른 분이라면 5 ~ 6섯 마디면 충분할 말을 20 ~ 30 마디 정도는 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설교시간에 성도들 조는 것 같으면 종을 땡땡 치시면서 어디 설교시간에 잠을 자냐고 호통 치시는 데.... 일견 맞는 말씀이지만 솔직히 설교 넘 지루하게 하십니다. 머리 나쁜 우민은 저게 무슨 말인지... 영 짜증납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목사님 특히 개혁주의를 추구하시거나 청교도를 추구하시거나 아님 그냥 정통 보수 꽉 막힌 목사님들의 설교도 들어봤지만 김남준 목사님은 그중에서도 Top입니다.
물론 설교의 재미 부분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마음도 잘 알 것 같습니다.하지만 문제는 전달방식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철학적이고 빙빙 돌려 추상적으로 뭔가 심오한 것을 발견하고 이야기 하는 재미에 빠지신 건 아닌지 여쭙고 싶습니다.
다른 개혁주의나 청교도관련 의식 있고 깨어있으신 분들의 설교문이나 설교를 들어봐도 듣는 성도 입장을 고려해서 정말 쉽게 말씀을 풀어서 설교를 하십니다.
하지만 김남준 목사님은 전혀 듣는 성도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듯 합니다. 마치 자기만의 재미에 빠져계시고 깨닫는 것을 설교시간을 통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미련하고 무식한 성도들에게 한수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설교와 설교자" 란 책에 추천평을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한번 쯤 다시 그 책을 보시고 아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다른 책들을 보시면서 불붙는 논리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처럼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후세에 크게 존경받으시는 설교자가 되시 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공부 교재입니다. 모든 교재는 목사님의 책을 가지고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번 교재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직설적으로 말씀드려서 위의 책 5섯 페이지 읽고 덮었습니다. 무슨 내용을 그렇게 빙빙 돌려서 쓴 책은 처음 이었습니다.
1페이지면 설명할 것을 장장 5 ~ 6 페이지로 불려서 설명을 하니 내용은 깊지 않은데... 좀 짜증이 나드군요. 살다 살다 "기독교 강요" 보다 읽기 싫은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교리를 가르치고 싶으시면 차라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나 소요리 문답이다 대요리 문답을 가르치시던가 하이델 베르크를 가르치시던가.. 아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교리강좌 책을 가지고 하시던가 뭔가 심오한 것을 배우는 것처럼 하고는 있으나 실상 그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세 번 째는 목사님의 강단에서의 감정표현입니다. 이것도 직설적으로 말씀드려서 강단에서 말씀 전하시다가 울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물론 목사님의 그런 모습이 진실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성도들 중에 혹 하나라도 그런 목사님의 모습에 은혜를 받고 정작 말씀에 은혜를 못 받는 경우가 생긴다면 문제가 있다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강단에서 은혜롭게 눈물 흘리시는 목사님의 모습에감동받고 은혜받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런지요.
네 번 째는 어정쩡한 열린교회 모습입니다. 뭔가 균형이 안 맞고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평상시 주일에 성가대가 없는 것을 보고 역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가대를 안 세우시는 군아 했는데 부활절 때는 또 세우시더군요.?
전도는 또 이상하게 4영리 가지고 하시더군요. 김남준 목사님께서 4영리의 폐해를 모르시지는 않으실 텐데요. 뭔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여러 학교들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 거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학교는 정말 유익하고 부러운데.. 또 어떤 학교를 운영하는걸 보면 왜 열린교회에서 저런 학교를 운영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이상 열린교회 조~~~금 다녀본 사람의 지나가는 헛소리 였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이 너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다른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안하고 은혜 잘 받고 신앙생활 하고 있다 하시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저의 잘못인 것이고 제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열린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들 중에서 저의 글이 언짢으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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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비판에 대한 김남준 목사의 답변
사랑하는 형제에게
그대가 열린교회에 올린 사연을 며칠 전 읽었습니다. 즉각 답변하지 못한 이유는 임박한 논문 발표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하였으나 반감을 품은 그대의 글을 소화하면서 기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하튼 이 답변을 통해 그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글을 읽으며 실족하였을지도 모르는 여러 지체들과 그리고 그대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I. 그대의 지적을 요약함
그대가 홈페이지에 남긴 열린교회와 설교자로서 나에 대한 지적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1. 설교가 너무 어려워서 짜증이 난다.2. 성경공부 교재 내용이 깊이는 없는데 어려워서 짜증이 난다.3. 설교자가 말씀으로 은혜를 끼쳐야지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4. 열린교회는 어쩡쩡하다.1) 부활절에 특별 순서를 위해 임시로 찬양대가 서는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에 어긋난다.2) 열린교회가 전도할 때 C.C.C.의 사영리를 사용하는데 그 폐해를 모르고 있다.3) 열린교회에서 교인 교육을 위해 운영되는 어떤 학교들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4) 온가족교회 오는 날 예배시간에 신앙고백 순서를 빼버렸는데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전도를 위해 보여준 복음 동영상은 단지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5. 담임목사는 초심으로 돌아가라.
II. 그대의 질문에 답함
1. 설교가 어려워서 짜증이 난다는 지적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말씀드려서 담임목사께서 설교를 너무 어렵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에 아주 심오한 깊이 있는 내용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 마치 (설교자 자신이) 자기만의 재미에 빠져 계시고 깨닫는 것을 설교 시간을 통해 아무 것도 모르는 미련하고 무식한 성도들에게 한 수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1) 그대의 글을 읽고 자신의 설교를 돌아봄
그대의 글을 읽고 회중의 한 사람으로서 알아듣기 힘들도록 설교한 자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진리의 내용을 쉽게 전달하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는 것은 일평생 설교자로서 나의 숙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설교를 해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킨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개척 초기의 나의 설교 경험은 이러한 문제가 더욱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대가 얼마나 많이 나의 설교를 청취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993년 12월 교회 개척 이후로부터 설교된 약 3-4년 동안의 설교를 들어 본다면 지금 설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설교가 쉽습니다. 설교가 어렵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순수하게 지식적으로 어렵다는 것과 둘째로는 그 설교가 다루고 있는 신앙과 은혜의 세계가 듣는 사람의 그것과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느껴지는 어려움입니다. 두 번째 어려움이 여전히 있었을지 모르지만 첫 번째 어려움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개척 초기 당시에는 예배 시간마다 정말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며 은혜 때문에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뭉치지를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은혜는 받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체계화시키고 견고하게 서 가지를 못했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설교에 은혜를 받으면서 교인들은 몇 달이 못 되어 또 다시 미끄러지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것들을 단순히 타락한 인간의 성품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저의 신학 공부가 진척을 이루면서 나의 설교 사역에 피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를 통해 전달하는 지식의 체계였습니다. 그리고 교리를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죠.
2) 논리의 틀이 필요함
그대가 신학교를 다닌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교리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은 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교리는 체계적인 지식을 지향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는 그래서 고전 철학의 논리적 틀을 도구로 삼아 진술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종교를 초월해서 지식을 체계있게 전달하는 공통적인 방편이었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를 서구 사회에서 학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독창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모든 시대의 사람과 소통할 수 있도록 지식의 틀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뿐 아니라 인문학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철학자에 대해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이러한 체계적인 기독교 신앙의 진술은 언어의 압축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압축된 언어만이 형태를 변경하지 않고 그 개념을 가고 오는 세대에 손상 없이 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 그대가 ‘구원’이라는 기독교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개념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번마다 그대는 꽤 긴 이야기를 하여야 할 것이고 또 그 내용은 그때마다 분위기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듣는 사람들은 오늘 들은 그 내용이 어제 들은 그 내용과 일치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에 있어 기독교적 용어 혹은 신학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만 정확히 가르쳐 주면 교인들은 그것을 모두 외우지 못해도 개념을 가지고 평생 동안 설교를 들으면서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3) 그대의 짜증은 어디서 오는가?
그대는 설교가 어려워 짜증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솔직히 설교 넘 지루하게 하십니다. 머리 나쁜 우민은 저게 무슨 말인지 ... 영 짜증납니다.” 이것이 그대의 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영혼!그 영혼의 가장 고유한 기능인 지성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대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이런 구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 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기에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카르디아’(kardia)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움직이는 중심부로서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우선적인 기능은 지성(知性)의 행사입니다. 그 지성의 행사로 말미암아 인간의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가 발동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뜻’이라는 단어가 눈여겨 볼 만 합니다. 이 단어는 희랍어로 ‘디아노이아’(dianoia)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고, 생각, 지성 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뜻’이라는 표현은 뒤의 단어가 앞의 단어를 詳述(specification)하는 관계입니다. 즉 ‘마음 곧 지성을’ 다 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이 내용이 목숨보다 먼저 나오는 것은 흥미롭지 않습니까?
즉 자신의 지성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은 사람이 성품을 바칠 수 없고 성품을 드리지 않은 사람이 목숨을 바칠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대는 자신을 “머리 나쁜 우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대를 창조하실 때 다른 사람과는 상이한 특징을 주신 것은 감사하게 여기시고, 그대가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단련하지 않아서 ‘우민’으로 남은 것에 대하여는 그대가 깊이 반성하여야 합니다. 마치 먹기만 하고 운동하지 않아서 배가 나온 사람이 자신이 배불러서 발 끝에 덜어진 연필을 서서 줍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자랑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그러한 상태를 고백하는 것은 정직한 것이지만 스스로 머리 나쁜 우민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잠언에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 한다”(잠 1:2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잠 14:18)는 말도 있습니다.
그대는『참된 목자』(Reformed Pastor)라는 책을 쓰신 17세기 청교도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목사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분의 일화가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우리나라에 실천적인 설교만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매우 깊이 있는 기독교 사상가였습니다. 비록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였고 토마소 캄파넬라 (Thomaso Campanella)라는 이탈리아 사상가의 철학을 바탕에 둔 형이상학으로 신학을 풀어나가던 분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깊이나 학문의 깊이에 있어서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깊은 학문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성경을 설교하는 일에 능한 청교도였습니다. 하루는 그의 설교를 듣고 어느 농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같이 무식한 농부도 그 교리를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자 박스터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기 싫다면 천국은 당신이 가기에는 너무 높은 곳입니다.”
4) 구원에 버금가는 은사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은사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고귀한 은사는 지식입니다. 인간은 일평생 세계와 인간과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배우며 살아갈 의무가 있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보람이며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전달되는 모든 지식의 통로의 핵심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밖으로는 그 모든 지식이 자신 안으로 수렴하는 책이고 또 성경은 자신 안에서 그 모든 지식을 밖으로 확산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교회에 대해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앎의 원천입니다. 이것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그대의 의무입니다. 그대가 지식이 부족하다면(모든 사람이 어느 방면에서든 다른 사람보다 못한 부분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이라도 성실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설교자의 본분을 잊었는가?
그대는 나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본무를 소홀히 하고 빙빙 돌려 교인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는 재미에 빠진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다른 개혁주의나 청교도 관련 의식이 있고 깨어 있으신 분들의 설교문이나 설교를 들어 봐도 성도 입장을 고려해서 정말 쉽게 말씀을 풀어서 설교를 하십니다. 하지만 김남준 목사님은 전혀 듣는 성도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듯 합니다.”
나는 그대에게 묻습니다. 그대에게 심원한 개혁 사상을 전해 준 어느 개혁 신학자의 글을 그토록 정말 쉽고 재밌게 읽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칼빈(J. Calvin)입니까? 존 오웬(J. Owen)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내가 모르는 청교도들입니까? 그대는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기독교강요를 “살다 살다 기독교강요보다 읽기 싫은 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우리 교회에서 은혜 받은 고등학생들도 즐겨있는 기독교강요를 “읽기 싫은 책”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나는 그대가 칼빈에게도 <기독교강요>를 어렵게 썼다는 이유 때문에 그대가 반감을 갖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대에게 어떤 개혁신학자와 저명한 청교도의 글이 그렇게 쉬웠는지 재미있었는지 한번 말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쉽고 재미있는 서적들을 읽고 그대가 얼마나 개혁신앙과 청교도 사상을 습득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만약 그대가 그렇게 개혁사상과 청교도 신앙을 습득하였다면 이렇게 교회와 설교자를 비난하는 글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품격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 성경공부 교재 내용이 깊이는 없는데 어려워서 짜증이 난다.
1)『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의 배경
그대는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이번 교재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직설적으로 말씀드려서 위의 책 다섯 페이지 읽고 덮었습니다. 무슨 내용을 그렇게 빙빙 돌려서 쓴 책은 처음이었습니다. ... 내용은 깊지 않은데 ... 좀 짜증이 나더군요 살다 살다 기독교강요 보다 읽기 싫은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대는 요즘 공과공부 하고 있는 공과책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책이 이제껏 배운 공과 중 좀 어려운 책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나와 교역자들은 공과공부 교재를 선정할 때 이론을 많이 다루는 공과책과 실천을 많이 다루는 공과책을 교대로 채택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론을 다룬다고 해서 실천이 없거나 실천을 다룬다고 해서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이 공과가 끝난 다음에 교재를 최근 출판된『싫증』이나『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사용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원래『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공과책은 2006년도 신년 사경회 때 설교한 주제입니다. 그 때 제가 기도원에 일주일 머물면서 이 원고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성만 하였지 이 원고를 보고 설교하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는 훨씬 대중적이고 쉽게 그 내용을 풀어서 전달하였고 그것이 바로 공과책 뒤에 붙어 있는 설교 CD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도는 먼저 이 주제를 쉽게 다루고 있는 설교 CD를 차례대로 듣고 그 내용을 상세하게 저술한 책을 읽으며 이해를 하면서 공과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대가 바로 우리교회에 출석해서 은혜 받았다는 그 해입니다. 17년 동안 열린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하나님이 가장 축복하신 설교 시리즈 다섯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시리즈입니다. 당시에 설교를 듣는 동안 어렵다고 말하는 교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큰 은혜를 받았고 열린교회가 커다란 영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출판에서의 배려
이 책을 출판하면서도 교인들이 어려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서 나름대로 배려하여 그런 형태의 책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설교를 먼저 듣고 책을 읽었더라면 다섯 페이지를 읽고 그 책을 덮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했을 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그대의 지적 수준이 미치지 못할 때와 영혼이 싫증에 빠져서 마음을 기울여 깨닫고자 하는 의지가 없을 때입니다. 그렇게 개혁주의를 좋아하고 순수한 청교도신앙을 열렬히 추구하는 그대라면 전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왜 나의 책을 펴자마자 덮어 버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등학교를 방금 졸업한 교인도 읽고 은혜를 받는다는 책을 성인이 된 그대가 어렵다고 덮었다면 그것은 단지 가방끈의 길이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3) “내용은 깊지 않은데...”
그대는 지적하기를 “내용은 깊지 않은데 ... 좀 짜증이 나더군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대는 나의 책의 신학적 깊이를 의심하였습니다. “머리 나쁜 우민이라서” 다섯 페이지도 못 읽고 책을 덮었다고 고백한 그대가 내 책의 학문적 깊이를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게 판단하였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설교 준비가 그러하듯 나는 남의 책을 펴놓고 설교 준비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새해사경회를 준비하며 이 설교 주제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하여 미국에 특별히 주문하여 급히 도착한 박사논문(UMI의 doctoral dissertation service)을 8편이나 읽고 설교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대가 내 책에 별로 없다고 하는 내용의 깊이가 도대체 무엇이고 어느 정도의 수준을 기대하는 것인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 이미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되었거나 혹은 이제 막 그 길을 들어서기 위해서 교부들과 성경의 근거들을 가지고 이 특정한 논문 주제에 대해서 논문을 쓰기 위해 짧으면 5년에서 길면 10년까지 헌신한 학자들의 논문을 8편(약 1,600쪽 분량)이나 탐독한 후에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해서 진술한 설교 내용입니다. 나는 그 책 중 어느 부분이 그대에게 깊지 않은 상식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내용이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신약 성경과 이레나이우스(Irenaeus)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까지 가깝게는 종교개혁자들에게 까지 연결되는 기독교의 유산, 사랑의 교회론(the Ecclesiology of caritas)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기에 나의 책을 내용에 깊이가 없다고 말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깊이 없는 책을 왜 다섯 페이지도 이해를 못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가 보기 그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교인보다 그 책이 담고 있는 진리의 내용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 전체가 그대가 지금 하고 있는 이러한 행동이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질서에 현저히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책이 바로 그대처럼 무지와 은혜의 결핍 속에서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참된 교회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이지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대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신이 스스로 그 책을 거절하였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책이 그대를 거절한 것입니다.)
4) ‘짜증이 난다’는 그대에게
그대는 반복해서 ‘짜증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짜증이 전적으로 설교자와 저자의 책임인지 정직하게 물어 보십시오. 그대는 나의 설교와 저술을 비난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Confession of Westerminster),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교리 설교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것들이 계승하고 있는 기독교강요(Institute)는 “읽기에 짜증 나는 책” 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어느 책이 그대에게 그렇게 쉬웠는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기독교강요> 라틴어 직역본 6 권을 모두 읽으셨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유장한 교리설교 3권을 다 읽으셨습니까?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교회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읽어보셨습니까? 어느 내용이 그렇게 쉽던가요?
내가 알기로 한국에 있는 신학대학원 학생들 중 그 6 권짜리 <기독교강요>를 1회만이라도 완독한 학생은 5%도 안 됩니다. 더욱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교리 설교 특히 로마서 강해가 그렇게 쉽다면 왜 대학생들도 읽다가 그만 두는 것일까요? 칼빈의 <설교집>은 모두 합쳐서 1년에 단 천 권도 팔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소명감을 가지고 하시는 어떤 분은 집을 팔아서 헌신하는 마음으로 출판 비용을 충당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성경을 읽고자 하였습니다. 신약은 마태복음 1장을 읽다가 짜증이 났고 구약은 창세기 5장에서 짜증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잘못된 것입니까? 성경이 나의 짜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까? 나는 한 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를 읽어 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고백록을 읽다가 짜증이 났습니다.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더군요. 그러나 그 후 나의 신학적인 이해가 깊어지고 신앙의 경험이 세월을 더 하면서 그의 저작을 사랑하게 되었고 지금은 내가 고백하기를 존 오웬(John Owen),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그리고 존 칼빈(John Calvin), 그리고 개혁파 정통주의신학자들 몇 분과 함께 나의 인생과 신앙에 최대의 스승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그대도 알 것입니다. 그분들의 책의 공통점은 심오하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통해 성경을 탐구하기를 고3처럼 공부해야 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소명입니다.
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대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지적이고 영적인 수준에 따라서 글의 차이가 많지만 어느 청교도의 글도 재미있는 글은 없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재미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려고 배우는 것이죠. 그래서 어려운 내용을 만날 때나 쉬운 내용을 만날 때나 모두 유익을 얻게 됩니다.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튜레틴 Francis Turretin)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쉬운 성경 구절에서도 어려운 성경 구절에서도 유익을 얻었습니다. 쉬운 성경 구절에서는 은혜를 받았고 어려운 성경 구절에서는 겸손을 배우며 기도하였습니다.”
5) 차라리 Westerminster신앙고백이나 Heidelberg교리문답을 가르치는 충고에 대하여
차라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을 가르치라는 그대의 지적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목회자들이 알아서 할 터이니 그대의 할 일에 충실하라.” 그렇지 않아도 나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가 닿으면 하이델베르그 교리학교를 만들어 그 아름다운 교리 진술의 내용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미 제공되고 있는 꼴이라도 충분히 소화하도록 마음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그대의 제안을 참고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르침으로써 다른 교리설교나 우리의 교리교육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 설교자가 말씀으로 은혜를 끼쳐야지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1)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시다 울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오늘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강단에서 은혜롭게 눈물 흘리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은혜 받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런지요?”
2) 이에 대해서는 간단히 답하겠습니다. “그대들이 모두 그렇게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아마 내가 울지 않을 것입니다.”
4. 열린교회는 어정쩡하다.
1) 부활절에 특별 순서를 위해 임시로 찬양대가 서는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에 어긋난다.
개혁교회에서 성가대를 운영하지 않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옳습니다. 그래서 열린교회는 이제껏 성가대 없는 예배를 드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시대건 양보할 수 없도록 성경의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판단이 지나치게 되면 한국교회사에 나타났던 것처럼 예배 시간의 악기 사용 문제를 가지고 교단이 갈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하여 그 시대마다 적절히 문화적 소통을 도모하고 그것을 진리를 이해하고 전파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나의 판단은 이것입니다. 성가대가 서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가대의 제도가 있고 은혜롭게 운영해 오던 교회라면 분쟁을 하면서까지 그 성가대를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대는 칼빈이 얼마나 엄격한 신학자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목회하던 삐에르(Pierre) 예배당이 교회당 안에 천사와 성인들의 석상을 그대로 두고 개혁교회 예배를 드렸다면 믿겠습니까? 그런데 칼빈은 그렇게 했습니다. 온 교회의 민주적 합의 없이 일부의 사람들이 종교적 열심에서 그것들을 파괴하고 교회 전체를 어려움으로 몰아넣는 역사적 광경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겁쟁이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적절히 구분할 수 있는 성경적 중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사랑의 배려이지요.
열린교회가 성가대를 운영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평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위해 이웃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합창단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 교인들도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상 교회의 제도적인 기구와는 상관이 없는 단체이지요. 그러나 많은 열린교회 교인들이 거기에 참여하여 찬양으로 봉사합니다. 그 사람들이 고난 주간을 지나며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찬송하고 정성껏 준비하여 발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부활절 예배 시간에 제공하였다고 해서 왜 교회와 제가 그대에게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문화와 신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고 신앙이 단선적이게 되면 우리는 세상의 문화를 품고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미워하고 싸워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대처럼 본질과 적용을 구분 못하고 앙심과 반감을 품은 채 문화를 대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사랑하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들이 그 문화 안에 있습니다. 급기야 세상 문화에 대한 앙심과 반감은 그 문화의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으로까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 반대가 아닙니까? “인자의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내게는 우리에 들지 않은 또 다른 양이 있어서 ... ”
나는 그대가 좀 더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기를 정중히 권고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개혁신학의 정신과 청교도 신앙이 가지고 있는 넓은 적용의 진폭들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예화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만난 어느 목사님의 고백이었습니다. 교인들이 많이 커피를 찾기에 그것을 준비해 놓았더니 교회 로비가 하도 지저분해지고 커피물에 바닥이 오염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서 자판기를 하나 들여 놓기로 하였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는 수익금은 불우이웃을 돕기로 하였죠. 그 결정을 발표하고 나서 그 다음 주일에 낮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미 커피자판기는 교회에 들어왔고 말입니다. 장로님 한 분이 주일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하셨습니다. 흐느끼듯 울먹이며 간절히 대표 기도를 하였습니다.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거룩한 성전에 드디어 자판기가 들어 왔습니다. 주의 성전을 더럽히는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두 제가 교회를 잘못 섬긴 때문입니다. 흑흑흑 ... ” 결국 자판기는 다시 치워졌고 교회는 여기저기 커피 봉지와 종이컵 등이 어지러이 돌아다니고 커피물이 바닥에 여기저기 흐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대가 사모하는 모습의 모습입니까?
2) 열린교회가 전도할 때 C.C.C.의 사영리를 사용하는데 그 폐해를 모르고 있다.
열린교회에서 전도할 때 사영리를 사용하는 것을 보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의 판단으로는 그대가 그것을 가지고 전도해 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대가 만약 그 전도지를 들고 단 열 명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보았다면 열린교회에서 그 전도지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아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전도지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약점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 전도지가 제1영리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고 해서 우리 중 어느 전도자도 인간의 전적인 타락이나 부패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때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행동이 왜 사랑일 수밖에 없는지를 말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성을 강조합니다.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들의 처지를 가르치는 개혁신학의 내용을 따라서 말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 전도지를 들고 신학적으로 선교적으로 폐해를 실감할 정도로 그대가 구령의 열정에 불탄 적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만문해 보십시오. 그렇게 복음 전해 보셨습니까? 오랜 전도의 경험을 통하여 4영리 전도지가 신학적으로 폐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대는 어떤 전도지를 만들어서 개인전도에 활용하셨습니까? 그래서 김준곤 목사님이 실수하신 것을 그대가 바로 잡아서 큰 성과를 거두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를 전도학교에서 강의하도록 한 번 초청하여 시간을 줄 터이니 그 전도자의 구령의 간증을 한 번 들어보십시다.
나는 그대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직접 그 전도지를 들고 전도를 해보라고 말입니다. 그 전도지를 들고 전한다 할지라도 그대가 올바른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앵무새처럼 그 전도지를 읽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내용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청교도 신앙을 추종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청교도는 좋아하지만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똑같은 말로 나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개혁신학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지적하셨듯이 개혁신학과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장 위험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멋이 드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청교도와 개혁신학을 알고 지적인 우월주의에 빠지는 것이죠. 자신의 마음과 삶은 청교도를 닮으려는 진지한 몸부림이 없고 지식적으로만 그들을 알고 있다는 데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인 우월감을 갖는 것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개 교회에 대해 앙심을 품고 건전한 기독교적 가르침에 반감을 품습니다. 사랑하여야 할 세상 대신 몇 줄 안 되는, 그것도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도 못한 청교도 신학 지식의 나부랭이를 끌어안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과 마음이 짝퉁이라면 청교도원전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3) 열린교회에서 교인 교육을 위해 운영되는 어떤 학교들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대가 열린교회에서 제공되는 어떤 교육 프로그램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필요 없는 것들이 가르쳐지고 있다면 그렇게 말아야 할 것입니다. 타이틀은 그럴듯해도 내용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그대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또 내용은 잘 몰라도 학교이름이나 강의의 제목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어떤 교회 프로그램들이 그대에게 “ 왜 열린교회에서 저런 학교를 운영하지?”라는 질문을 하게 하였는지 교구교역자나 다른 목회자에게 좀 자세히 지적해 주십시오. 그대의 의견을 반영할 것입니다.
4) 온가족교회 오는 날 신앙고백 순서를 빼버렸는데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전도를 위해 보여준 복음 동영상이라는 것이 단지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가스펠송을 너무 많이 부른다.
a. 신앙고백이 빠진 것에 대해
온가족 교회 오는 날 신앙고백 순서를 제외한 것은 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 많이 교회 오는데 자신들을 세워 놓고 알지도 못하는 내용들을 외우라고 할 때 받는 배타적인 느낌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무슨 개혁신학의 예배의 원칙을 허물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종교개혁 당시에는 신앙고백이라는 예배순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들이 모두 이 순서를 예배 속에 채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순서는 저의 판단으로는 아직까지 예배 시간에 넣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예배의 순서를 변경할 수 없는 절대 가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학적으로 ‘아디아포라’(adiaphora), 곧 신앙적으로 관용이 허락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열린교회의 예배에서 이 순서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열린교회가 개혁주의를 버리고 이단으로 돌아갔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대개 성경의 진리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가 부족하고 교회의 역사와 신학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때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인 줄 알고 목숨을 거는가 하면 정말 본질적인 것이 아무렇게나 해도 좋은줄 알고 누구에게나 관용을 베푸는 것이죠. 나는 그대가 이러한 문제들을 판단하기에는 신학적으로 미성숙하고 신앙적으로 좀 더 많은 성장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지적은 그대를 아프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잘 깨닫고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b. 복음전도용 동영상에 대해
온가족 교회 오는 날 상영된 동영상에 관하여 그대가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판단을 달리 합니다.
물론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분을 인간이 배우로서 대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영화는 믿는 사람들이 돌려 보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전도용으로 만든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주님의 성육신과 지상생애와 십자가의 고난을 보여주었고 마지막에는 부활과 승천까지 제기함으로써 그분이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짧은 시간에 세상 사람들의 문화를 통해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첨가된 고난의 영상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채택된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영상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만나는 교인들에게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늘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그 영화를 보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기도와 묵상 속에서 만나는 그리스도가 내게는 영화보다 더욱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기도하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명한 복음이 제시된 후 이런 영상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가르치는 것이 어떤 점에서 심각한 신학적 오류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화를 교인들에게 보여주며 말씀과 영적 교통의 신비를 대신할 대체물이라고 홍보하지 않습니다.
c. 가스펠송을 많이 부른다는 불평에 대해
또 그대는 열린교회의 찬양을 “무절제한 가스펠송의 남발 ... ”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주위에 있는 새중앙교회를 비난하였습니다. “개혁주의적인 시편 찬송은커녕 가스펠로 감정을 자극하고 ... ” 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대의 이러한 지적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은 얼마든지 그 시대의 곡조와 언어로 고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과 자기 시대의 변화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대가 칼빈이 좋아한 대로 왜 시편 찬송은 안 부르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찬송을 부르면 교회가 개혁이 됩니까? 찬송가의 상당 부분이 시편으로 되었다는 것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이미 우리가 가진 찬송가 중 시편으로 된 찬송가만 부르십니까? 시편을 사랑하십니까? 그대가 지금 애창하고 있는 대부분의 많은 예배용 찬송가가 이전 시대의 가스펠송이었던 것은 알고 계십니까?
그러면 이 아름다운 찬송가를 남겨준 사람들이 시편 찬송 말고 왜 우리에게 이것을 남겨 주었냐고 비난을 받아야 됩니까? 나는 칼빈(John Calvin)을 사랑하고 그의 신학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수 백년의 세월이 흘러도 시편 이외에는 찬송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존 칼빈의 의도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가 다시 살아나서 ‘나의 의도는 그렇다’고 답변한다면 나는 ‘당신과는 신학적인 판단이 다르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시편을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교회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게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우리도 그 곡들 중 좋은 것은 보급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교회가 시편만 부르지 않는 교회를 단지 그것 하나 때문에 개혁주의를 버리고 칼빈을 배신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문제로 목회자들이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까지 하더군요. 교인들의 영혼은 회심이 없고 삶으로는 칼빈의 주권사상을 짓밟고 있는데, 그러한 교회의 영적 상황 때문에는 자신에 대하여 얼굴을 붉힌 적이 없는 사람들이 찬송가 형태 하나 가지고 싸우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한 비개혁주의입니다. 그리고 반청교도적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염려스러운 것이 신앙의 단편적인 지식들을 자기 이념으로 삼아서 지나치게 확대하여 밀고 나가 그것으로써 모든 교회들을 판단하고 심지어 자신의 지체들을 정죄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개혁신학의 원리가 아닙니다.
더욱이 그대는 이웃교회를 마치 진리 없이 세속적인 노래만 부르는 교회인 것처럼 비난했습니다. 새중앙교회에서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 그 교회의 예배에서 찬양하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더 이상한 것은 그대의 의견에 공감을 보였다는 어느 지체입니다. (그대가 상황을 정확히 옮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스펠송을 많이 부는 것이 새중앙교회를 옮기는 원인이 되었다면 그분이 왜 열린교회를 택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아직도 가스펠송은 물론 악기조차 사용하지 않는 교회들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데 말입니다. 더욱이 우리 교회는 공적인 예배 순서 안에서는 가스펠송을 채택하지 않습니다. 나는 가스펠송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대의 비난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판단에 기포하고 있으며, 현대문화에 대하여 반문화주의적인 앙심 같은 것을 품고 있는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 교회를 사랑하고 돕지는 못할망정 공개적으로 이름을 거론하며 비난을 하여 또 다른 지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제가 강단에서 어느 교회를 거론하며 욕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너무 개혁주의적인 교인은 덜 개혁주의적인 교회를 실명을 거론하면서 비난해도 됩니까? 이 점에 대하여는 그대가 진지하게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보태는 이야기
다시 전도용 영상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전도용 이외에 언제도 이런 영상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도 결국은 그대가 오늘날 현대의 문화에 대해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일일이 그대를 데리고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대와 같이 닫힌 사고를 가졌던 소위 보수교회들이 시대가 바뀌면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자신도 복음의 본질을 지키지 못한 사례는 허다합니다.
나는 그대가 내가 열린교회에서 강의한 세 번의 특별 강의 <현대 복음주의의 흐름>1,2 그리고 <세계화 사회에서의 진리의 전달자>라는 특강을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만약에 그대가 이 세편의 강의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내가 더 이상 역사의 예증들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대는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대가 정말 개혁신학을 사랑하고 청교도를 좋아한다면 겸손히 배우려고 노력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성경과 함께 역사를 배우십시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이 개혁신학을 좋아한 사람들은 대개 특정한 개혁신학자의 추종자가 되거나 널리 알려진 어떤 청교도의 하수인이 되어버리곤 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개혁신학과 청교도의 가치는 이념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진리의 체계대로 믿고 산 신앙의 선배들로서의 가치입니다.
5. 담임목사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그대에게
1) 그대가 받았다는 은혜에 대하여
“2006년 열린교회에 처음 왔을 때 목사님의 설교가 그리워집니다. 그때에는 매일 예배의 감격에 빠졌고 정말 이 교회야말로 내가 그토록 찾던 교회라고 주변에 알리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교회가 되어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 목사님의 초심으로 돌아가셔서 ... ”
나는 그대가 2006년도에 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그렇게 좋아하였는지 궁금합니다. 그 해 처음 주신 말씀은 <참아라!>라는 시리즈였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참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읽을 때 짜증이 난다고 하는 그 설교가 그 해 새해 말씀사경회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유장한 설교인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가 설교되었습니다.
만약 그대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짜증이 났다면 그 다음 시리즈에서는 분노가 치밀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리즈는 불신자를 겨냥한 그야말로 인생의 근본을 묻는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봄에는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시리즈가 넉 달 가까이 울려 퍼졌습니다. 서로의 단점이 있을 때 용서하고 사랑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따라 순결하게 생활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회심치 않은 영혼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며 그 평화 안에 사는 것은 신자의 의무이며 한 번 은혜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 늘 자기를 부인하고 살라는 것이 가을말씀사경회<은혜 안에 거하라>의 메시지였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시리즈 중에 무슨 설교를 그대가 듣고 그렇게 많이 변화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나는 오히려 그대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는 그대가 아직도 성실하게 열린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오히려 그대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처음 열린교회의 마당을 딛던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지금 그대가 짜증내 하던 책을 읽으면서 4년 전 그대처럼 현재 은혜 받고 있는 성도들이 있고 그대가 반감을 품으며 나의 설교와 목회에서 개혁주의적 결점을 찾아내려는 이때에 4년 전 그대처럼 예배의 감격에 빠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물론 설교자인 나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니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며 처음 마음으로 설교하고 목회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양 떼인 그대가 나에게 손가락질 하며 지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대의 분량을 넘어서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제발 그대처럼 개념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눈물로 그 시리즈를 설교하였고 그것도 모자라서 후에 <성도의 공동생활>과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라는 시리즈까지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보니 은혜 받았다는 그대는 지금 제시하는 세 시리즈 중 어느 하나도 결코 소화한 적이 없습니다. 그 시리즈 전체가 아니라 다만 그 중 설교 한 두 편만 듣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았어도 이 담임목사로 하여금 이 황금 같은 시간에 네 시간 째, 갈겨쓴 낙서 같은 가치 없는 질문에 답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010. 4. 30.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그대의 목자가 된 김남준 목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