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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문제로 인해 한국 교회 안에서 더욱 심각한 갈등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그 동안 방언에 대한 그릇된 물결은 규장출판사, 김우현, 손기철, 김동수 등의 불건전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평신도 옥성호 집사가 자신의 책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를 통해 먼저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정이철 목사가 자신의 책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 3의 물결에 빠진 교회>를 통해 방언에 대해 바른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기독교 신문 '코람데오닷컴(kscoramdeo.com), '뉴스파워'(newspower.co.kr), 그리고 미주의 기독교 신문 '뉴스엠'(newsm.com)과 정이철 목사가 창간한 인터넷 신문 형식의 신학연구소 '바른믿음'(good-faith.net)를 통해 방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개혁주의 관점의 바른 지식이 본격적으로 퍼트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비주의 쪽으로 치우쳐있던 방언에 대한 이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시 회복되는 조짐이 보였고, 방언에 대한 논쟁은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동시에 양측 사이의 예민한 갈등과 긴장은 더욱 치열해졌다.


 

 

 ▲ 박영돈 교수

많은 사람들이 박영돈 교수가 자신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통해 방언에 대해 나름대로 바른 관점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방언에 대한 박영돈의 말을 살펴보니, 매우 실망스러웠다. 박 교수의 말에는 성경의 방언에 대한 정확하고 치밀한 연구의 흔적, 참고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지식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방언에 대한 그의 결론은 무책임했다. “방언을 과하게 말고 적당하게 활용하면 좋다!”라는 모호한 처방에 불과했고, 보수교단의 신학교의 교수라는 그의 신분으로 인해 방언 미혹에 빠진 사람들의 영혼이 돌이킬 기회를 얻지 못하고, 더 안락하게 부패되게 만드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에스라하우스' 대표 노우호 목사

이러한 상황에서 방언에 대한 또 하나의 세찬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1977년부터 ‘에스라하우스’를 운영하면서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온 노우호 목사가 방언에 빠진 사람들을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고 말았다. 나는 노우호 목사에 대해서 잘 모른다. 노우호 목사가 성경에 대해 무척이나 박식하고 잘 가르친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고 그릇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을 뿐이다.


방언에 대한 노우호 목사의 견해를 요약하면, 현재 한국 교회에 확산되어 있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노우호 목사가 어떻게 표현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알려지기로는 “현재의 방언은 100% 거짓 방언이고, 악령의 역사이다”라고 진단하였다고 한다. 노우호 목사의 말은 많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그리고 방언현상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서 막연하게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옹알거리는 현상이 성경의 방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도 고요한 충격을 주었다.


이 논쟁을 두고서 한국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의미없는 분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람들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방언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들이다. 간단히 이것만 생각해 보자. 지금 방언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불과 110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는 이 방언이라는 현상이 매우 보기드문 현상이었다.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었다. 왜 그렇게 보기드물었을까? 이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하나의 심각한 사실이 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방언의 역사가 이처럼 짧다는 것도 너무 이상하고, 또한 이렇게 넘쳐나는 방언현상이 하필이면 이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단들이 종말 부흥운동을 추진하면서 성령세례의 징조로서 들고 나온 것이 방언현상이었다. 지금 널리퍼진 방언운동의 뿌리가 100년에 등장한 미국의 이단들이라는 사실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다.


 

 


나도 그 동안 방언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방언에 대한 나의 부족한 글을 통해 거짓된 방언 현상에 대해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분개하면서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방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성경의 고귀한 방언을 당연히 사모한다. 성경의 참 방언을 경험하기를 바라고, 그것으로 나의 신앙과 목회가 더 풍성해 지기를 바란다. 성경의 그 고귀한 방언이 지금 나타나면 안되고, 지금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 박지 않는다. 성경의 방언에 대해서 나의 마음을 열려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방언현상을 드러내는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 가운데 성경의 그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성경의 그 방언을 말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례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오늘 날의 흔하고 흔한 많은 사람들의 방언현상은 다른 종교에서 타나나는 방언현상과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불교에서는 변음이라고 하면서 방언하고, 무당들에게서도 방언현상이 나타나고, 힌두교의 쿤달리니 수련에서도 부지기수로 방언현상이 방언찬양과 함께 나타난다. 몰몬교에서도 방언이 나타난다고 보고되고 있고, 최면실습에서도 방언현상이 나타난다고 보고되었다.


오늘 날의 길 가의 돌맹이처럼 흔한 방언현상이 성경의 방언이라면 나도 정말 좋겠다. 개짓는 소리처럼 흔한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으로 인정되려면, 당연히 세상의 잡종교들의 방언현상과 명백한 차이를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방언과 다른 종교의 방언현상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자기의 방언이 진짜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란 고작해야 이런 내용이다. 


"가짜가 있다는 것은 진짜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리를 들어보면 다릅니다!"
"쏴한 느낌, 써늘한 느낌을 주는 방언은 귀신의 방언입니다!"
"끼리리리, 꼬리리리 ... 듣기 싫은 소리를 짧게 반복하는 것은 거짓 방언입니다!"


현대 교회의 신앙의 신실성과 진정성에 관련된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방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나아가고, 명백한 이단 교리를 표방하는 집단은 누구나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표면상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성경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방언현상을 용인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신앙성장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셀 수 없는 많은 교회들의 불건전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침묵한다. 문제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무수한 돌맹기가 날라오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심각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방언 논쟁은 더욱 더 뜨거워져야 한다. 지금 당장은 아프겠으나, 방언으로 인해 많은 분열과 싸움이 일어나야 교회에게 좋다. 그러한 과정에서 신자들이 더 중요한 사실을 보고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니다. 
 

성경의 방언은 한 종류? 두 종류?


방언 논쟁에 관한 핵심은 간단하다. 성경의 방언이 한 종류였는가? 두 종류였는가? 이것이다. 성경의 방언이 단 한 종류였다면, 비록 노우호 목사는 다른 면에서 약점과 부족한 점을 보였다고 할지라도 가장 고질적인 방언 문제에 있어서는 탁월하게 짚었고, 루터와 같이 용기있게 한국 교회의 괴질을 질타한 선각자로 추앙받게 된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이 두 종류, 즉 사도행전의 방언은 이방인들의 실제 외국어였고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세상 어디에서도 통용되지 않았던 영의 언어였다면, 노우호 목사는 성령의 역사를 악령의 역사로 훼방한 흉한 죄인으로 간주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이 오직 한 종류, 즉 유대인들이 멸시하였던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였다면, 오늘 날 방언한다면서 신자들 앞에서 우쭐대고, 방언이라는 지저분한 현상으로 기도한다고 웃기지도 않게 폼 잡은 모든 목사들과 신자들은 진지하게 반성해야만 한다. 노우호 목사의 말대로, (만일 스스로 지어내는 방언이 아니고 진짜로 어떤 영으로 인해 나타나는 방언이라면) 많은 방언하는 목사들이 귀신들린 상태로 목회하였다는 비참한 참극이 그 동안 살벌하게 벌어졌다고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 길이 열릴 것이다. 


 

 

  전, 총신신대원장 서철원 교수

과연 성경의 방언은 한 종류였을까? 두 종류였을까? 과연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영의 언어였을까? 아니면 사도행전의 방언처럼, 유대인들에게 종말론적 심판을 경고하는 이방인들의 실제언어였을까?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이 부분을 연구하기 위해 오래전에 서철원 교수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방언에 대한 이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던 초창기에 서철원 교수에게서 개인적으로 전화와 메일을 통해 받았던 도움이 방언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방침이 되었다.


물론 서철원 교수의 말이 절대적 진리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이 세상에 믿고 따르고 배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 진리이니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참고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 자체도 부정해야만 할 것이다. 서철원 교수는 조직신학자로서 독일 튀빙겐대학이 선정한 20세기 신학자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던 개혁주의 신학의 세계적인 석학이고, 한국 교회의 개혁주의 신학 진영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와 함께 한국 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한 거목이라고 인정되는 분이다.


문론 서철원 박사가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 그의 듣고 말고 하는 것은 모두 우리 개인들의 몫이다. 어떤 사람이 서철원 박사의 말을 ‘개무시’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서철원 박사의 말을 깊이 참고하여 방언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가꾸기도 할 것이다. 각자 알아서 서철원 박사의 방언에 대한 말을 택하고 참고하기를 바란다.


서철원 박사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사도행전의 방언과 같이 외국어였다는 것이다. 당시 나에게 보낸 짧은 메일로 표현된 내용이므로, 왜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영의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깊이 추론해 보면,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영의언어가 아닌 외국어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오리겐, 어거스틴, 칼빈, 루터, 스펄전, 벤자민 워필드, 리차드 개핀 ... 대부분의 정통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같은 견해가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오래전에 서철원 교수가 나에게 이 메일로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해 설명하신 내용이다. 이 내용은 나의 책 <제 3의 물결에 빠진 교회>의 방언 부분에도 서 교수님의 허락하에 소개되었으므로, 여기에서 또 다시 소개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통역자의 통역을 통해 권면의 말을 전하는 방언이었습니다.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으므로 계시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해설, 설명 수준이었습니다. 권면의 수준이지요. 그러나 방언으로 자기 과시를 많이 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혼란이 많았습니다. 특히 방언하는 사람들이 여자들이었고, 자기에게 방언이 임하면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있는 중에 앞으로 나가 밀쳐내고 자기방언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므로 방언을 말함으로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방언도 무슨 말인지 방언하는 자신도 모르고, 혹 통역한다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통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순절 운동가들은 방언을 통역하면 예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방언으로 전달되는 내용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구약의 성경들보다 더 영감된 말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방언에 대한 이런 그릇된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들의 방언으로 전달된 예언이 영감되었다고 하여도 성경에 편입될 수가 없었지요. 내적으로 직접 주어지는 말씀과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사에 숱하게 등장했지만 한 번도 그들의 주장이 교회에 의해서 수납된 적이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통역 없이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17개 언어 종족들이 직접 듣고 이해하는 실제 언어였고, 그것은 종말에 민족들의 언어가 통일될 것을 예시하는 성격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방언도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니어서 유대인들에게 경고의 성격을 갖는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백성 됨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간다는 것을 알리는 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방언들과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성령을 받는 것과 방언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방언을 말함이 성령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기도하는 것이 성령 받았다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입니다(갈 4:6; 롬 8:15).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방언들 중에 성령에 의한 방언이 전혀 없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그런 경우들을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라고 할 것입니다.”(서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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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05.18 22:50
    미국남침례회 선교부 방언 정책

    (교회와신앙, 2015.5.10.)

    선교사에게 ‘방언’을 할 자유가 허용됐다. 방언을 장려하는 교파들과 선교경쟁에서 뒤로 밀린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부가 ‘사적기도언어’로 정의된 ‘방언’ 하는 선교사 후보를 받지 않던 정책을 바꾼 것.



    ▲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부(SBC IMB) 행사 ⒸIMB 캡처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부(SBC IMB)가 2005년 방언(speaking in tongues)을 하는 선교사 후보들은 탈락시키는 특별지침을 마련해 지난 10년간 시행해오던 정책을 2015년 5월 13일부로 바꾸기로 했다고 종교통신(RNS)이 보도했다.

    웬디 노벨 IMB 대변인은 “향후 방언을 하는 선교사들을 위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한다고 긍정하는 선교사들을 자동탈락 시켜온 그동안의 정책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결정은 근래 남침례회가 오순절교 등 방언을 장려하는 교파들과 선교경쟁을 해온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프리카 등에서 점차 방언신자가 증가되고 있는 현상을 감안하기로 했기 때문.

    방언은 신약성경(막16:17, 행 2:4 등 여러 곳, 고전 12, 14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전에 알지 못하던 새 언어로 기도를 하는 일종의 은사였으나 점차 쇠퇴했다가 20세기초 오순절 교회의 발흥과 함께 용례가 급증해왔다.

    웨이크포레스트신대원의 빌 레너드 교수(교회사)는 “세계 곳곳에서 이 은사체험이 정상화되어 있다.”며 “방언에 반대하는 교파나 교단들은 전도 면에서 뒤처지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교인수 약 1,600만에 달하는 미국 남침례회는 그동안 과거 기독교계의 다른 교파들이 가지 않았던 전인미답지를 포함한 세계 오지에 선교사를 과감하게 파견해온 교단의 하나이다. 그러나 3억 이상 되는 신자를 둔 오순절계와 선교지에서 치열한 전도경쟁을 해오면서 방언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되어왔다.



    ▲ Ⓒ종교통신(RNS) 캡처


    성경에서 ‘글로싸’ 또는 ‘글로쏠랄리아’라고 불린 방언이 남침례교인들에게는 사도들이 죽은 후에는 끝난 것으로 단정돼 왔다. 또한 방언 금지는 남침례회의 중요한 교단적 표지의 하나로 부각돼 왔다.

    그러나 이제는 교단의 표지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됐다. 이에 대해 레너드 교수는 남침례회가 갈수록 유색인종들 간에 늘어나는 방언현상에 대해 인구학적 ‘트로마’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웨이드 벌슨 목사는 “선교사 후보가 자신이 방언을 한다고 실토하면 결국 정직한 것 때문에 자동탈락이 되는 셈”이라고 황당해 했다.

    IMB의 ‘FAQ’(자주 묻는 질문)란을 보면 아직도 선교사나 선교사 후보가 특정은사를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 은사라고 강조하거나 분열현상을 빚을 정도로 강조하면 선교사직을 잃는다는 원칙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밖에도 선교부는 향후 이혼한 선교사들에게 장기선교를 비롯한 더 많은 포지션에서의 사역을 허용할 방침이다.

    또한 여타 교단에서 입수침례(immersion)를 받은 후보자도 앞으로는 인정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타 교단에서 전입해온 선교사 후보자는 반드시 남침례회에서 침례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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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05.30 05:37
    - 이창모 목사의 '김동수 교수의 거짓 방언'(3회)



    한국의 대표적 거짓 방언 옹호자 김동수 목사(평택대 교수)

    평택대학교 교수인 김동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옹앙거리는 거짓 방언을 옹호했다.

    “바울이 말한 방언은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이들의 주장의 요체는 바울이 소개한 방언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근거로 바울이 말한 방언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김동수)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는 김동수 교수의 주장은 그가 과연 정상정인 신학자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전후문맥을 무시하고,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 즉 어린아이 수준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말하는 사도 바울의 진술임을 간과하고서 단지 문자대로만 본문을 읽은 극도의 무지의 소치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전4:8).

    위의 바울의 말의 진의는 무엇일까? 고린도 교회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왕처럼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자아 충족성에 빠져, 복음 안에서 약속된 모든 것들이 자신들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여겼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왕들이 되었다’라며 자만하는 그릇된 신앙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1)

    바울은 이들의 그릇된 자만을 인용하면서 냉소적으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였다.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진의를 염두에 두고 8절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이미 배부른 자들이 되었구나(너희는 이미 부요한 자들이 되었구나). 우리를 떼어 놓고 너희는 벌써 왕이 되었구나! 실제로 너희가 이미 왕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으면 우리도 너희의 왕 노릇함에 동참할 수 있었을 텐데!”2)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수 교수식대로 이 본문을 문자대로만 해석한다면, 고린도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왕처럼 참여하고 있으며,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해석인가? 이러고도 어찌 김동수 교수가 방언을 논할만한 신학자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영과 마음과 육체를 다 동원하는 전인격적인 기도(기도하는 자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상적으로 기도할 때,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라는 수식어는 더러 쓰지만(엡6:18; 유20절) “영으로”라는 수식어는 굳이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음과 육체와 함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거짓 방언자들은 방언기도가 무슨 특별한 기도라도 되는 것처럼 “영으로 기도한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가를 깨닫고, 영과 마음이 함께 하는 정상적인 기도를 회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소통에 힘써야 할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수련회에서 거짓 방언을 받은 이후 30년 동안 그것으로 기도(?)했었던 필자는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짓 방언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한다. 이제라도 허망한 방언기도를 버리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라. 그리고 자신이 아는 말로 또박또박 하나님께 기도하라. 비록 처음에는 힘이 들지라도 말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방언으로 밤새 기도하기는 비교적 쉽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말로 진실을 토하며 밤새도록 기도하기는 정말 어렵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크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작은 내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 방언자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소통하는 바른 기도를 빨리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소통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를 염두에 두고 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표현한 고린도전서 14장 14-15절을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넋을 놓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내가 뭐라고 기도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과 마음이 함께 기도함으로써 영과 마음이 다 아는 바른 기도를 할 것이며, 찬송도 영과 마음이 다 아는 바른 찬송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4-15절에서 방언기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언기도의 폐해(자신과 소통되지 않음)를 지적함으로 방언기도를 버리도록 고린도 교회를 설득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6-17절에서도 14절에서 언급한 방언기도의 불소통의 폐해를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다. 14절이 방언기도를 하는 ‘당사자 자신’에게 미치는 불소통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16-17절은 ‘교회’에 미치는 불소통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그) 영으로” 하는 방언기도의 폐해를 명백히 알고 있는데도,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기도하겠다.’, 즉 방언으로 기도하겠다고 다짐했을 리는 결코 없다. 그러면 바울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살피기 전에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지금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대상이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으로 너무 어린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너희가 하는 방언기도는 거짓 은사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깨달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바울은 5절에서처럼 여기서도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고전3:1-2 참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그러나)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그러나)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5).(괄호 안의 ‘그러나’[de, 데]는 헬라어 원문에는 있으나 개역개정에는 없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의 의미는 방언기도도 하고 일반적인 기도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나의 영과 마음이 함께 하는 기도’, 즉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겠다는 말이다.3)

    사람을 영적인 존재라고 말할 때, 이미 ‘영적’이라는 의미 안에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과 마음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도 바울이 굳이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분리해서 표현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아 영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굳이 이런 표현으로 ‘너희들은 영 따로 마음 따로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하지만 나는 영으로 기도할 때 또 마음으로도 함께 기도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거짓 방언자들의 주장대로 방언기도가 도깨비 방망이처럼 그렇게 능력 있는 기도가 사실이라면 기도할 때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한들 무엇이 문제겠는가? 내 마음이 아는 것보다 더 심오한 것을 아는 내 영이, 비록 내가 아는 언어는 아닐지라도 하늘 언어로 놀라운 기도를 하나님께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기도쯤은 안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거짓 방언자들에 따르면 일반적인 기도의 능력은 감히 방언기도의 능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이 점이 사실이라면 기도하는 자들은 능력이 출중한 방언기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방언기도를 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면 능력이 별로 없는 일반적인 기도라도 열심히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출중한 능력의 방언기도를 하고 나서 굳이 별 볼 일 없는 일반적인 기도까지 또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만약 바울이 15절에서 방언기도와 함께 일반적인 기도도 하겠다는 뜻으로 말했다면 바울도 어리석은 자임이 틀림없다.

    어떤 거짓 방언자들은 바울의 이 말을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통역을 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리석은 짓이기는 마찬가지다. 거짓 방언자들은 방언기도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영적 비밀을 하늘 언어(방언)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나 영적인 상태를 하늘 언어로 표현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해하지 못하시기 때문이란 말인가? 더 기막힌 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늘 언어로 표현한 방언기도를 어떻게 다시 인간의 언어로 통역해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설령 통역이 된다고 하더라도, 거짓 방언자들의 말대로 마귀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하나님께 은밀하게 하는 것이 방언기도라면 더 더욱 통역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마귀에게 비밀이 탄로 나면 하나님이 곤란해지실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이들이 하는 방언기도와 통역이 거짓이기 때문에 생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순이다.

    바울은 14절에 언급한 비정상적인 방언기도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하기 위해, 15절에서 부정 접속사 ‘데’(de, 그러나)를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바울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그리고’(kai., 카이) 마음으로도 기도하겠다.”는 것으로도 자신의 뜻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지만, 부정 접속사 ‘데’를 의도적으로 ‘카이’ 앞에 덧붙여서 “영으로 기도하고”보다 “마음으로 기도하고”를 더욱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결심을 더욱 분명히 한다. 이것은 “영으로 기도하고”와 “마음으로 기도하고”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백하게 밝힘으로, 자신이 말하고 있는 ‘영으로 기도하고’가 14절에서 언급한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 즉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다.

    바울은 이어 16-17절에서 마음, 즉 이성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영으로 기도하거나 찬송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밝힌다. 여기서 바울이 문제 삼는 것도 역시 ‘불소통’이다. 바울은 방언기도나 방언 찬송이 설령 신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는 자신이나, 그것을 듣는 다른 사람들이 방언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14:16-17).

    여기서 바울이 고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네가 영으로 축복”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통역할 수 없는 불소통의 거짓 방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면 16-17절의 방언을 왜 거짓 방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본문에 나타난 방언의 대상이 외국인이 아니라 현지인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현지인 신자들과는 소통되는 말(아마도 헬라어)이 있는데도 소통되지 않는 방언으로 말하고, 다시 그것을 통역해서 소통하려는 것은 바보짓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도 이런 바보짓에 역사하실리 없기 때문에 16-17절의 방언은 거짓 방언으로 단정해도 무방하다. 만약 “네가 영으로 축복”하는 말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이 방언은 통역할 수 있다. 그러면 바울은 고뇌하는 대신에 5절과 13절에서처럼 이들에게 통역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네가 영으로 축복”한다는 방언에 대해서는 통역하라고 말하지 않고 불소통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방언은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거짓 방언의 특징은 통역할 수 없는 ‘불소통’이다. 만일 이런 거짓 방언이 교회 안에 범람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과의 불소통으로 교회와 하나님이 서로에게 외국인이 될 것이며, 지체들 간의 불소통으로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에게 외국인이 될 것이다(고전14:11).

    한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님과 서로에게 외국인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심판의 전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몸 된 교회가 결국 산산조각 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고린도 교회는 서로 다투며, 고소하고, 당을 짓는 등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과 지체들 서로에게 외국인이 되는 심판의 전조를 피하려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과 지체들 간에 소통해야 한다.

    즉 현지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때는 뜻 모르는 방언 대신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해야 하며, 방언을 말할 때는 통역할 수 있는 방언을 말함으로 외국인들뿐 아니라 현지인들과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예언을 풍성히 구해야 하며(고전14:1, 5, 19, 24, 39), 방언을 말할 때는 통역이 가능한 방언을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전14:11-13).



    --- 각주 ---

    1)빅터 C. 피츠너, <고린도전서>(이기문 옮김)(서울: 컨콜디아사, 1990), pp.79-80.
    2)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91.
    3)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정정숙 옮김)(서울: 신망애출판사, 1972), p.115.

    이창모 rhicm153@hanmail.net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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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06.09 05:26
    방언기도에 대하여]

    서철민 페북에서

    우연히 어떤 여자 목사님의 설교 동영상을 보았는데 그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방언기도를 강조하는 것,잘 아시죠. 할 수 있는 대로 방언으로 기도하세요. 특히 새벽에 모여 기도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시면 좋습니다.” 그 분의 강조점은 방언 기도는 일반 기도보다 하늘의 문을 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기도이며 따라서 공적 모임에서도 방언기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어떤 성경, 어느 구절에서 그러한 가르침을 이끌어냈는지 질문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대로라면 성경 어디에서도 ‘방언이 하늘의 문을 여는 특별한 기도’라고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강단의 설교가 성경의 궤도를 많이 벗어나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베풀어 주신 은사를 왜곡하고 거짓으로 사용하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사실 ‘방언기도’는 성경이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가 아닙니다. 다만 고린도 교회에 ‘방언기도’로 인한 어떤 소요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그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다른 성경에서도 방언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해 볼만한 여지들이 있지만 핵심적이지는 않습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몇 가지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하지 말라. 2. 방언하기 보다는 예언을 사모하라. 3. 방언은 영으로 하는 비밀기도여서 알아 듣는 자가 없다. 4. 공동체보다는 개인에게 유익이 있다.

    바울은 직접적으로 방언기도가 통역되어지지 않는 이상 교회 앞에서 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금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방언을 보다 특별한 능력의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유익이 있으나 개인적이며 교회에 덕을 세우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그 여자 목사님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바울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외에 다른 사변적 논리를 가지고 와서 방언기도를 더욱 부각시키려거나 특별한 은사로 취급하려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반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따를지,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의 말을 따를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성경을 따르고자 한다면 방언은 공동체가 함께 기도할 때는 하지 않는 편이 더욱 정당합니다. 특별히 공적인 기도의 제목으로 함께 기도할 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선은 방언기도는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공적인 기도의 제목에 대해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후자의 문제가 더욱 큰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는 무엇이 실상 중요하겠습니까! 그것은 신비로운 은사나 경험이 아닙니다. 주여 삼창이나 큰 목소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한 마음이며 믿음이며 사랑이며 진리입니다. 기도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청결한 양심이나 진리나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큰 목소리로 기도하여도 그것은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귀한 도구이며 방편입니다. 불순한 마음이나 정욕을 섞지 말고 왜곡하거나 거짓으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대로 기도하는, 진실한 기도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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