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문제로 인해 한국 교회 안에서 더욱 심각한 갈등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그 동안 방언에 대한 그릇된 물결은 규장출판사, 김우현, 손기철, 김동수 등의 불건전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평신도 옥성호 집사가 자신의 책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를 통해 먼저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정이철 목사가 자신의 책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 3의 물결에 빠진 교회>를 통해 방언에 대해 바른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기독교 신문 '코람데오닷컴(kscoramdeo.com), '뉴스파워'(newspower.co.kr), 그리고 미주의 기독교 신문 '뉴스엠'(newsm.com)과 정이철 목사가 창간한 인터넷 신문 형식의 신학연구소 '바른믿음'(good-faith.net)를 통해 방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개혁주의 관점의 바른 지식이 본격적으로 퍼트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비주의 쪽으로 치우쳐있던 방언에 대한 이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시 회복되는 조짐이 보였고, 방언에 대한 논쟁은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동시에 양측 사이의 예민한 갈등과 긴장은 더욱 치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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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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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박영돈 교수가 자신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통해 방언에 대해 나름대로 바른 관점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방언에 대한 박영돈의 말을 살펴보니, 매우 실망스러웠다. 박 교수의 말에는 성경의 방언에 대한 정확하고 치밀한 연구의 흔적, 참고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지식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방언에 대한 그의 결론은 무책임했다. “방언을 과하게 말고 적당하게 활용하면 좋다!”라는 모호한 처방에 불과했고, 보수교단의 신학교의 교수라는 그의 신분으로 인해 방언 미혹에 빠진 사람들의 영혼이 돌이킬 기회를 얻지 못하고, 더 안락하게 부패되게 만드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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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하우스' 대표 노우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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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방언에 대한 또 하나의 세찬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1977년부터 ‘에스라하우스’를 운영하면서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온 노우호 목사가 방언에 빠진 사람들을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고 말았다. 나는 노우호 목사에 대해서 잘 모른다. 노우호 목사가 성경에 대해 무척이나 박식하고 잘 가르친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고 그릇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을 뿐이다.
방언에 대한 노우호 목사의 견해를 요약하면, 현재 한국 교회에 확산되어 있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노우호 목사가 어떻게 표현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알려지기로는 “현재의 방언은 100% 거짓 방언이고, 악령의 역사이다”라고 진단하였다고 한다. 노우호 목사의 말은 많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그리고 방언현상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서 막연하게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옹알거리는 현상이 성경의 방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도 고요한 충격을 주었다.
이 논쟁을 두고서 한국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의미없는 분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람들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방언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들이다. 간단히 이것만 생각해 보자. 지금 방언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불과 110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는 이 방언이라는 현상이 매우 보기드문 현상이었다.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었다. 왜 그렇게 보기드물었을까? 이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하나의 심각한 사실이 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방언의 역사가 이처럼 짧다는 것도 너무 이상하고, 또한 이렇게 넘쳐나는 방언현상이 하필이면 이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단들이 종말 부흥운동을 추진하면서 성령세례의 징조로서 들고 나온 것이 방언현상이었다. 지금 널리퍼진 방언운동의 뿌리가 100년에 등장한 미국의 이단들이라는 사실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다.
나도 그 동안 방언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방언에 대한 나의 부족한 글을 통해 거짓된 방언 현상에 대해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분개하면서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방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성경의 고귀한 방언을 당연히 사모한다. 성경의 참 방언을 경험하기를 바라고, 그것으로 나의 신앙과 목회가 더 풍성해 지기를 바란다. 성경의 그 고귀한 방언이 지금 나타나면 안되고, 지금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 박지 않는다. 성경의 방언에 대해서 나의 마음을 열려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방언현상을 드러내는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 가운데 성경의 그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성경의 그 방언을 말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례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오늘 날의 흔하고 흔한 많은 사람들의 방언현상은 다른 종교에서 타나나는 방언현상과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불교에서는 변음이라고 하면서 방언하고, 무당들에게서도 방언현상이 나타나고, 힌두교의 쿤달리니 수련에서도 부지기수로 방언현상이 방언찬양과 함께 나타난다. 몰몬교에서도 방언이 나타난다고 보고되고 있고, 최면실습에서도 방언현상이 나타난다고 보고되었다.
오늘 날의 길 가의 돌맹이처럼 흔한 방언현상이 성경의 방언이라면 나도 정말 좋겠다. 개짓는 소리처럼 흔한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으로 인정되려면, 당연히 세상의 잡종교들의 방언현상과 명백한 차이를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방언과 다른 종교의 방언현상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자기의 방언이 진짜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란 고작해야 이런 내용이다.
"가짜가 있다는 것은 진짜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리를 들어보면 다릅니다!" "쏴한 느낌, 써늘한 느낌을 주는 방언은 귀신의 방언입니다!" "끼리리리, 꼬리리리 ... 듣기 싫은 소리를 짧게 반복하는 것은 거짓 방언입니다!"
현대 교회의 신앙의 신실성과 진정성에 관련된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방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나아가고, 명백한 이단 교리를 표방하는 집단은 누구나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표면상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성경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방언현상을 용인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신앙성장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셀 수 없는 많은 교회들의 불건전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침묵한다. 문제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무수한 돌맹기가 날라오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심각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방언 논쟁은 더욱 더 뜨거워져야 한다. 지금 당장은 아프겠으나, 방언으로 인해 많은 분열과 싸움이 일어나야 교회에게 좋다. 그러한 과정에서 신자들이 더 중요한 사실을 보고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니다.
성경의 방언은 한 종류? 두 종류?
방언 논쟁에 관한 핵심은 간단하다. 성경의 방언이 한 종류였는가? 두 종류였는가? 이것이다. 성경의 방언이 단 한 종류였다면, 비록 노우호 목사는 다른 면에서 약점과 부족한 점을 보였다고 할지라도 가장 고질적인 방언 문제에 있어서는 탁월하게 짚었고, 루터와 같이 용기있게 한국 교회의 괴질을 질타한 선각자로 추앙받게 된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이 두 종류, 즉 사도행전의 방언은 이방인들의 실제 외국어였고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세상 어디에서도 통용되지 않았던 영의 언어였다면, 노우호 목사는 성령의 역사를 악령의 역사로 훼방한 흉한 죄인으로 간주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이 오직 한 종류, 즉 유대인들이 멸시하였던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였다면, 오늘 날 방언한다면서 신자들 앞에서 우쭐대고, 방언이라는 지저분한 현상으로 기도한다고 웃기지도 않게 폼 잡은 모든 목사들과 신자들은 진지하게 반성해야만 한다. 노우호 목사의 말대로, (만일 스스로 지어내는 방언이 아니고 진짜로 어떤 영으로 인해 나타나는 방언이라면) 많은 방언하는 목사들이 귀신들린 상태로 목회하였다는 비참한 참극이 그 동안 살벌하게 벌어졌다고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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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총신신대원장 서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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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성경의 방언은 한 종류였을까? 두 종류였을까? 과연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영의 언어였을까? 아니면 사도행전의 방언처럼, 유대인들에게 종말론적 심판을 경고하는 이방인들의 실제언어였을까?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이 부분을 연구하기 위해 오래전에 서철원 교수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방언에 대한 이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던 초창기에 서철원 교수에게서 개인적으로 전화와 메일을 통해 받았던 도움이 방언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방침이 되었다.
물론 서철원 교수의 말이 절대적 진리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이 세상에 믿고 따르고 배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 진리이니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참고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 자체도 부정해야만 할 것이다. 서철원 교수는 조직신학자로서 독일 튀빙겐대학이 선정한 20세기 신학자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던 개혁주의 신학의 세계적인 석학이고, 한국 교회의 개혁주의 신학 진영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와 함께 한국 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한 거목이라고 인정되는 분이다.
문론 서철원 박사가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 그의 듣고 말고 하는 것은 모두 우리 개인들의 몫이다. 어떤 사람이 서철원 박사의 말을 ‘개무시’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서철원 박사의 말을 깊이 참고하여 방언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가꾸기도 할 것이다. 각자 알아서 서철원 박사의 방언에 대한 말을 택하고 참고하기를 바란다.
서철원 박사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사도행전의 방언과 같이 외국어였다는 것이다. 당시 나에게 보낸 짧은 메일로 표현된 내용이므로, 왜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영의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깊이 추론해 보면,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영의언어가 아닌 외국어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오리겐, 어거스틴, 칼빈, 루터, 스펄전, 벤자민 워필드, 리차드 개핀 ... 대부분의 정통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같은 견해가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오래전에 서철원 교수가 나에게 이 메일로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해 설명하신 내용이다. 이 내용은 나의 책 <제 3의 물결에 빠진 교회>의 방언 부분에도 서 교수님의 허락하에 소개되었으므로, 여기에서 또 다시 소개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통역자의 통역을 통해 권면의 말을 전하는 방언이었습니다.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으므로 계시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해설, 설명 수준이었습니다. 권면의 수준이지요. 그러나 방언으로 자기 과시를 많이 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혼란이 많았습니다. 특히 방언하는 사람들이 여자들이었고, 자기에게 방언이 임하면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있는 중에 앞으로 나가 밀쳐내고 자기방언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므로 방언을 말함으로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방언도 무슨 말인지 방언하는 자신도 모르고, 혹 통역한다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통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순절 운동가들은 방언을 통역하면 예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방언으로 전달되는 내용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구약의 성경들보다 더 영감된 말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방언에 대한 이런 그릇된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들의 방언으로 전달된 예언이 영감되었다고 하여도 성경에 편입될 수가 없었지요. 내적으로 직접 주어지는 말씀과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사에 숱하게 등장했지만 한 번도 그들의 주장이 교회에 의해서 수납된 적이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통역 없이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17개 언어 종족들이 직접 듣고 이해하는 실제 언어였고, 그것은 종말에 민족들의 언어가 통일될 것을 예시하는 성격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방언도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니어서 유대인들에게 경고의 성격을 갖는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백성 됨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간다는 것을 알리는 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방언들과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성령을 받는 것과 방언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방언을 말함이 성령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기도하는 것이 성령 받았다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입니다(갈 4:6; 롬 8:15).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방언들 중에 성령에 의한 방언이 전혀 없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그런 경우들을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라고 할 것입니다.”(서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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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신앙, 2015.5.10.)
선교사에게 ‘방언’을 할 자유가 허용됐다. 방언을 장려하는 교파들과 선교경쟁에서 뒤로 밀린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부가 ‘사적기도언어’로 정의된 ‘방언’ 하는 선교사 후보를 받지 않던 정책을 바꾼 것.
▲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부(SBC IMB) 행사 ⒸIMB 캡처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부(SBC IMB)가 2005년 방언(speaking in tongues)을 하는 선교사 후보들은 탈락시키는 특별지침을 마련해 지난 10년간 시행해오던 정책을 2015년 5월 13일부로 바꾸기로 했다고 종교통신(RNS)이 보도했다.
웬디 노벨 IMB 대변인은 “향후 방언을 하는 선교사들을 위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한다고 긍정하는 선교사들을 자동탈락 시켜온 그동안의 정책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결정은 근래 남침례회가 오순절교 등 방언을 장려하는 교파들과 선교경쟁을 해온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프리카 등에서 점차 방언신자가 증가되고 있는 현상을 감안하기로 했기 때문.
방언은 신약성경(막16:17, 행 2:4 등 여러 곳, 고전 12, 14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전에 알지 못하던 새 언어로 기도를 하는 일종의 은사였으나 점차 쇠퇴했다가 20세기초 오순절 교회의 발흥과 함께 용례가 급증해왔다.
웨이크포레스트신대원의 빌 레너드 교수(교회사)는 “세계 곳곳에서 이 은사체험이 정상화되어 있다.”며 “방언에 반대하는 교파나 교단들은 전도 면에서 뒤처지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교인수 약 1,600만에 달하는 미국 남침례회는 그동안 과거 기독교계의 다른 교파들이 가지 않았던 전인미답지를 포함한 세계 오지에 선교사를 과감하게 파견해온 교단의 하나이다. 그러나 3억 이상 되는 신자를 둔 오순절계와 선교지에서 치열한 전도경쟁을 해오면서 방언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되어왔다.
▲ Ⓒ종교통신(RNS) 캡처
성경에서 ‘글로싸’ 또는 ‘글로쏠랄리아’라고 불린 방언이 남침례교인들에게는 사도들이 죽은 후에는 끝난 것으로 단정돼 왔다. 또한 방언 금지는 남침례회의 중요한 교단적 표지의 하나로 부각돼 왔다.
그러나 이제는 교단의 표지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됐다. 이에 대해 레너드 교수는 남침례회가 갈수록 유색인종들 간에 늘어나는 방언현상에 대해 인구학적 ‘트로마’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웨이드 벌슨 목사는 “선교사 후보가 자신이 방언을 한다고 실토하면 결국 정직한 것 때문에 자동탈락이 되는 셈”이라고 황당해 했다.
IMB의 ‘FAQ’(자주 묻는 질문)란을 보면 아직도 선교사나 선교사 후보가 특정은사를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 은사라고 강조하거나 분열현상을 빚을 정도로 강조하면 선교사직을 잃는다는 원칙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밖에도 선교부는 향후 이혼한 선교사들에게 장기선교를 비롯한 더 많은 포지션에서의 사역을 허용할 방침이다.
또한 여타 교단에서 입수침례(immersion)를 받은 후보자도 앞으로는 인정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타 교단에서 전입해온 선교사 후보자는 반드시 남침례회에서 침례를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