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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 언약적 율법주의, 은혜언약 -

‘바울의 새 관점들’의 신학적 소재(所在)?

 

김병훈, 합신 조직신학

   

들어가는 말


바울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주장들, 곧 ‘바울에 대한 새 관점들’이라 일컫는 견해들은 교리사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새 관점’이라 불릴만하다면 그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의롭게 됨의 교리와 관련하여 종교개혁신학으로부터의 이탈, 또는 거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곧 ‘탈 종교개혁신학’ 또는 ‘반 종교개혁신학’의 주장을 개진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들’은 루터파 또는 개혁파의 종교개혁 신학들이 바울을 읽어왔던 것과는 다르게 바울을 읽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사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들’(이하 ‘새 관점들’로 줄여씀)이라는 신학적 흐름의 물꼬를 터놓았던 샌더스(E. P. Sanders)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해석 이전에도 샌더스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던 이들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새 관점들’이 주장하듯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도덕적 의미와 관련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할례나 절기 등과 관련한 의식법의 준수와 관련한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주석적 검토를 받아 거부된 것이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새 관점들’은 샌더스를 이어 제임스 던(James D. G. Dunn)과 라이트(N. T. Wright) 등의 노력을 통해 신약학계를 망라하여 개신교 신학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새 관점들’이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샌더스의 해석을 긍정적으로 받아 신약의 복음 해석을 유대주의와의 연속적 맥락에서 이해할 것을 나름대로의 주석적 작업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 관점들’은 서로 다소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를 하나의 통일된 범주로 묶는 신학적 구조 또는 패러다임은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종교개혁신학이 전제하였던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는 이해이다. 샌더스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율법주의(legalism) 종교’이기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내포하는 소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이해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던과 라이트는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여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넘어 신약의 복음의 해석에 있어서도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배경으로 삼으며, 그 결과들을 복음의 바른 해석으로 삼는다.


그런데 신약의 복음을 ‘언약적 율법주의’의 배경 하에서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새 관점’이 옳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신학의 구원론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거나 또는 거부를 행할 것을 요구하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루터파와 개혁파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신학은 성경해석 상의 오류를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됨의 교리와 속죄의 교리 등을 포함하는 구원론 전반에 걸쳐서 그릇된 신학을 성경적 복음으로 가르쳐 온 셈이 된다. 종교개혁신학에 대해 ‘아니오’라고 외치는 ‘새 관점’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하여 반립하고 있던 중세 후기의 로마 카톨릭의 유명론(nominalism) 신학과 비슷한 신학적 특징들을 갖는다. 실제로 ‘새 관점’ 신학은 스스로 자신들의 노력을 평가하기를 바울과 초대 교회에 대한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하며, 성경적 기초가 튼튼한 교리를 제공하고,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신학적 동질성을 증진시켜 주며, 더 나아가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를 개선해 주는 등의 유익을 준다고 말한다.


본 논고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언약적 율법주의’는 개혁신학이 복음을 이해하는 구조적 틀인 은혜언약과 다른 것임을 설명하고, 그러한 만큼 ‘언약적 율법주의’는 성경적 의미에서의 ‘은혜의 종교’가 아니며, 신학 특성상 신인동력적(synergistic) 세미펠라기우스주의에 해당하며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율법주의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아울러 의롭게 됨의 교리를 비롯한 교리 상의 주요 특징들을 중세 후기의 유명론 신학과 비교하여 제시하고 개혁파 신학과의 뚜렷한 차이를 통해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所在)를 확정하고자 한다.


 

‘새 관점’의 새로움은 무엇?


‘새 관점’ 신학이 바울 해석과 관련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넓게 말하면 구원론에 관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의롭게 됨의 교리와 관련한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전환은 바울 서신에 빈번히 언급이 되는 ‘율법의 행위’와 관련한 해석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바울 해석에 대한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적인 옛 관점은 ‘율법의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호의를 얻기 위하여 사람이 행하는 의와 관련한 행위로 이해를 하는 반면에, ‘새 관점’은 ‘율법의 행위’가 유대인들의 특권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이방인들과 구분하여 주는 표식과 같은 유대법적인 요소들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시몬 게더콜(Simon Gathercole)이 잘 정리하였듯이 ‘새 관점’이 ‘율법의 행위’에 대해 전통적인 종교개혁신학의 해석과 다른 새로운 해석을 주장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해의 요소들을 기저에 두고 있다. 첫째, 유대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바울 시대의 유대 종교는 자신들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쌓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는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새 관점’에 따르면 유대 종교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며 단지 안식일, 할례 그리고 율법에 따른 정결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의식들을 통해 이방인들과 구별이 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을 따름이다.


둘째, ‘새 관점’이 유대주의에 대한 새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되는 까닭은 이러한 유대주의의 이해를 바울 해석에 끌어와 바울을 해석한 데에 있다. 즉 바울이 비판한 유대 기독교인들의 ‘율법의 행위’란 유대주의 중심의 율법적 의식들이었으며, 따라서 유대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율법주의적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도덕적 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마치 유대주의가 의식법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 이방인들이 기독교인들이 되기 위하여서는 율법의 의식들을 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바울이 이를 가리켜 ‘율법의 행위’라 일컬으며 이에 대한 비판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새 관점’은 바울 신학의 탈 종교개혁신학화 또는 반 종교개혁신학화를 위한 신학적 전환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울의 구원론이 소위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이신칭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개혁신학은 사람이 자신의 의를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그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즉 종교개혁신학에서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고백이었다.


그러나 ‘새 관점’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할 때, 바울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바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받으시며, 또한 그것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을 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와 관련하여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새 관점’에서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적 고백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새 관점’은 ‘이신칭의’를 통하여 교회에 가입이 된 자라 할지라도 육신으로 행한 일들에 대해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 일에서 면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행한 대로 율법에 따라 갚으실 것이라는 것이 ‘새 관점’의 구원론이다.

 

‘새 관점’ 신학의 구원론적 배경: 언약적 율법주의


‘새 관점’의 구원론적 주장들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배경 하에서 개진이 된다. 샌더스는 말하기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는 종교개혁신학이 단정을 내렸던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전제로 하는 종교이다. 샌더스의 설명은 이렇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의 인간의 지위가 계약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고 계약은 그 명령들에 대한 순종을 인간의 합당한 응답으로 요구하는 한편 범법에 대한 속죄수단을 제공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 순종은 계약 안에서 그의 지위를 유지시키지만,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얻지는 못한다 ... 유대교에서의 의는 택함 받은 자들의 집단 안에서의 지위의 유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이다.

 

샌더스가 보는 견지에서 유대주의는 항상 무엇보다도 은혜를 전제로 하는 종교였으며 인간의 순종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하였다. 샌더스는 이러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종교 패턴을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밝힌다. 샌더스가 정의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며, (2)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 율법은 (3) 그 선택을 유지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4) 순종하여야 할 요구를 내포하고 있다. (5) 하나님은 순종에 대해 상을 베푸시고 불순종에 대해 벌을 내리신다.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며, 이 속죄의 수단을 통하여 (7) 언약 관계의 유지와 회복이 가능하다. (8) 순종과 속죄와 하나님의 긍휼로 언약 안에 보존이 된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될 무리들에 속하게 된다.

 

이처럼 여덟 가지 항목들로 언약적 율법주의를 정의한 샌더스는 첫 번째 항목에서 보듯이 선택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며 또한 마지막 항목에서 보듯이 궁극적인 구원은 또한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는 인간의 성취나 업적에 의한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전제로 하는 종교라고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의 요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는(getting in) 것은 오직 선택에 의한 은혜이며, 그 가운데 머물며(staying in) 끝까지 구원을 받기 위하여서는 율법과 속죄의 요구를 행하여야 하며, 이러한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또한 본질상 은혜임을 말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한 샌더스의 노력을 크게 반기면서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샌더스로 말미암아 바울을 16세기의 관점이 아니라 1세기의 정황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평가를 내린다. 여기서 던은 흥미롭게도 샌더스가 바울의 종교 이해가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다르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고 지적하면서 그 결과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열어가는 데에 오히려 실패를 하였다고 지적을 한다.


반면에 던은 바울의 신학이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연속선 상에 있음을 주장한다. 바울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 구조에 반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던의 이해이다. 예를 들어 던에 따르면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처럼,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 형태 안에서 유대주의 선택과 관련한 은혜의 신학을 은혜에 의한 유대-기독교적 선택의 신학으로 적용을 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의도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인 할례나 절기와 같은 의식들을 언약백성의 특권으로 주장하면서 이방인들에게 강요함으로써 배타적인 유대주의화가 나타나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부정을 하였다는 것이 던의 해석이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란 영 단번에 모든 상황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던의 생각에 바울은 율법의 순종을 통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때에 완전히 의롭다함을 받는 일이 미래에 남아 있음을 말한다.

 

칭의는 하나님의 단번의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칭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회복된 관계로 맨 처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그 관계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심판과 무죄방면의 최후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그의 의롭다고 하시는 의(義)를 행사하지 않으시면 유지될 수 없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여 그 사람이 죄 없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여기서 우리는 단지 바울은 신자들이 그 최후의 심판을 면제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만을 지적하면 된다. ... 신자들은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 신자들은 그들이 ‘구원받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들의 도덕적 결과들로부터 면제받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범하였다고 바울이 비판하는(롬 2장) 그런 우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하나님은 공평한 심판자이기도 하다. ... 그리스도를 삶의 토대로 삼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해서 심판을 면제받지는 못한다. 이신칭의는 율법에 따른, 그리고 육신으로 행한 일들에 의거한 심판을 배제하지 못한다.

 

바울에 대한 이러한 던의 해석은 바울이 끝까지 순종하는 자에게 최종적인 구원을 베푸신다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배경 하에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 신학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배경적 이해와 관련하여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새 관점’ 신학의 구원론은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과 관련하여 라이트(N. T. Wright)가 말하는 바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또한 보증하였던 바대로 바울 시대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을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인 까닭은 그들이 언약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선행을 하기 때문이 아니며 단지 선택과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즉 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혈통에 따른 자녀들로 태어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거의 확실하게 말하였을 것이다 - 이것이 ‘새 관점’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혹은 이것이 틀림없이 뜻하여야 하는 바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의 첫 단계에 유대인들은 은혜를 믿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언약에 들어온 것은 그들이 행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의 세 번째 단계에 그들은, 예수님과 바울과 마찬가지로, 살아온 전 생애에 근거한 마지막 심판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교리는 중간 단계에 속한다. 바리새인으로서 그(바울)는 일단 사람들이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온 이후에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현재, 유대인의 율법인 토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특징이 지워져야 한다고 믿었다. 기독교인으로, 그(바울)는 일단 사람들이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온 후에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현재,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믿음에 의하여 특징이 지워져야 한다고 믿었다.

 

라이트의 생각에 바울은 ‘의롭게 됨’이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믿음에 근거하여 선언하시는 것이며, 그런 후에 (마지막) 구원과 (마지막) 의롭다하심과 심판은 처음의 믿음과 육체적 죽음의 사이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전 인생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당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마찬가지로 함께 가지고 있던 이해라고 판단을 내린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새 관점’은 바울의 신학이 언약적 율법주의의 중요한 구원론적 특징들, (1) 곧 은혜로 최초의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 유대인들은 선택에 의하여, 이방인들은 믿음에 의하여 - (2)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의 교훈에 순종을 함으로써 마지막 심판에서 의롭다함을 최종적으로 받는 두 단계에 걸친 의롭다함의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물론 이것은, 라이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바울이 단순히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라이트는 의롭게 됨을 샌더스가 말한 들어감(getting in)이나 머무름(staying in)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트가 생각하는 의롭게 됨이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가는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그 공동체 안에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즉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의 문제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울은 할례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언약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언약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을 한다. 또한 바울은 이 사실로 인하여 당황한 유대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의롭다함은 현재와 미래의 이중적이며, 언약의 충실함을 통해 현재의 의롭다함이 미래에 궁극적으로 드러나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구원론적 구조는 여전히 동일하다.

 

바울신학은 언약적 율법주의? - 방법론상의 문제


‘새 관점’ 신학은 바울신학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은 바울 당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새 관점’에게 있어서 바울도 또한 바리새인 출신이므로 그도 또한 구원론의 구조 틀에 관한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연속선 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조는 바로 언약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울 당시의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한 샌더스 자신은 바울신학이 ‘언약적 율법주의’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하였지만, 던과 라이트의 ‘새 관점’ 신학은 샌더스를 비판하면서 바울과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조적 유사성을 강하게 확신한다.


그렇다면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구원론적 구조 틀이 과연 전통적 의미에서의 은혜언약과 일치하는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 관점’의 주장대로 만일 바울 신학이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신구약 성경의 신학적 통일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신약성경은 물론 구약성경의 언약들이 바로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은혜 언약’과의 비교를 요구한다. 적어도 개혁신학은 바울의 신학이 ‘은혜언약’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적 율법주의’와 ‘은혜언약’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새 관점’과 ‘개혁신학’ 가운데 어느 하나는 성경의 언약 신학을 바르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 된다. 양자의 차이는 단순한 해석의 차이를 넘어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바울 신학을 당대의 유대주의와 연속성에서 찾으려는 방법론과 그보다 훨씬 폭이 넓게 구약 성경과의 맥락 안에서 찾으려는 방법론의 차이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신학이 살피는 바울신학은 성경해석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확실히 ‘새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다음의 메이천의 글은 도움을 준다.

 

회심한 이후 바울이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에 대한 증거들을 찾을 때, 당대의 유대주의가 아니라 구약성경을 살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바울신학은 후기에 나온 것들(곧 유대주의 문헌들)이 아니라 선지서와 시편의 종교에 기초를 하고 있다.

 

‘새 관점’에서 재해석을 요구하는 ‘율법의 행위’ ‘의롭게 됨’ ‘하나님의 의’ 등을 바울이 성경에서 언급을 할 때 그 의미 해석을 위하여 단 한 곳에서도 1세기 당대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문헌을 인용하여 참조한 적이 없음은 바울신학을 이해하는 ‘새 관점’의 방법론적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더욱이 뛰어난 유대주의 연구가인 뉴스너(Jacobs Neusner)가 샌더스를 비평하면서 이르기를, 샌더스가 1세기 유대주의를 연구하면서 그것과 구약성경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샌더스의 연구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지적을 한 사실은 ‘새 관점’의 방법론적 문제점을 잘 말해준다.

 

언약적 율법주의와 중세 후기 구원론


이러한 방법론상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언약적 율법주의가 과연 성경적 의미에서의 은혜의 종교인가에 대해서 논하기로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샌더스는 바울의 신학적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공로적 의에 근거하여 구원을 말하는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역설을 한다.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는 율법주의 종교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이며 그것은 곧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은혜를 전제로 하는 종교임을 말한다고 주장을 한다.


확실히 샌더스 자신이 정의한 율법주의에 따르면 언약적 율법주의는 율법주의가 아니다. 언약적 율법주의도 샌더스 자신이 율법주의와 구분하여 정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율법주의란 행위를 통해 구원을 획득한다는 견해이며, 자신의 죄과에 비교하여 순종의 성취가 능가하는 지의 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이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율법주의는 한 편으로는 율법에 명하여진 바를 행하여 선행을 쌓고 다른 한 편으로는 속죄의 행위를 통해서 범과를 줄여가기에 애를 쓴다. 율법주의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는 종교이다. 반면에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는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긍휼에 의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며, 율법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선택이라는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써 순종을 통해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다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그 구조가 너무 단순하여 그것이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완전한 신학적 결론에 이르기에 미흡하다. 율법주의를 엄격한 공로(exact quid pro quo)를 근거로 하는 구원론으로 정의한다면 언약적 율법주의는 신학적으로 율법주의라 할 수 없지만 - 이것이 샌더스가 주장하는 바임 -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더하여 인간의 노력과 성취가 조건적으로 필요하다는 신인동력적(synergistic) 요소를 담고 있다면 넓은 의미에서 율법주의라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샌더스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은혜로 선택을 받아 언약 관계에 들어가지만 언약적 지위는 계속적인 순종을 통해서 유지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율법주의가 율법주의가 아닐 수 있는 까닭은 언약적 지위를 유지하는 조건이 율법의 완전한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불완전한 성취라 할지라도 율법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완전한 성취가 아니라 불완전한 순종의 의도라 할지라도 그것이 조건이 된다는 것은 종교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펠라기우스적인 오류는 피하였을지라도 중세 후기의 유명론의 신인동력적 오류를 피한 것은 아니다. 호튼은 언약적 율법주의가 종교개혁자들이 배격한 중세 후기 구원론 체계와 구조적으로 상당히 유사함을 지적한다. 우선 “은혜로 들어가고, 복종을 통해 유지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세례로 인하여 ‘첫 의롭게 됨’(first justification)이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한 편 은혜의 증가와 ‘마지막 의롭게 됨’은 인간의 협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중세의 견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교 판단을 통해서 1세기 유대주의를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샌더스가 1세기 유대주의가 루터가 생각하듯이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했을 때, 언약적 율법주의가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거부했던 중세 후기 구원론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또한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관찰에 주목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칼 쿠퍼(Karl T. Cooper)는 하이코 오버만(Heiko A. Oberman)을 참조로 하여 다음과 같이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중세 후기 유명론을 비교하여 제시한다.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그런 것처럼, 후기 중세 유명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긍휼을 가지고 끙끙거렸다. 유대주의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긍휼로써 그의 공의를 부드럽게 하신 언약의 흐름을 따라 해결책을 찾았다. 유대주의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러한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는 사실은 순전한 긍휼의 행동이다. 유대주의에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인 것처럼, 유명론에서도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유대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명론에서 복종은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필요 조건이다. 유대주의에서와 같이, 이 복종은 완전한 의가 아니어도 된다. 마음의 의도에 강한 강조를 두면서 최선을 다한다면 기본적인 요건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복종의 수준에 조차 못미치어 떨어지게 되는 사람에게는 참회를 통해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하다. 여기서 다시 마음의 의도가 참회를 유효하게 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참회하며 복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베푸시는 받아주시는 은혜는 엄격한 공로에 근거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단지 적당한 수준의 공로(meritum de congruo)에 근거하여 주신다. 구원을 실제로 상실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뿌리깊게 끝까지 거부하는 불순종을 범하는 자들에게만 나타난다.

 

샌더스가 제시하고 있는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나 오버만이 설명하고 있는 중세 후기 유명론에서나 모두 율법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한 수준의 엄격한 공로가 아니며 마음의 진정한 의도에 의하여 불완전한 복종이라도 구원에 이르는 가치로 인정이 된다. 이 점에서 언약적 율법주의와 중세 후기 유명론은 모두 엄격한 공로에 근거한 좁은 의미의 율법주의라는 비난을 면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은 유대주의 신학과 중세 후기 유명론 신학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균형을 세워가는 노력의 결과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유대주의 랍비들의 노력과 관련하여 호튼은 샌더스의 글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제시하여 준다.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계명에 순종한 일에 상을 베푸신다는 성경의 증거 때문에 공로에 대한 보상의 개념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또한 공의로운 이유와 상관없이 선택을 하시는 교리에 내포될 법한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 랍비들은 선택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함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호소를 하면서 때때로는 공로의 개념에 호소를 하였다.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의 상관 관계에 대한 유대주의 신학의 해법은 중세 후기 유명론에서도 그대로 발견이 된다. 오버만은 은혜로 언약 관계에 들어가며 순종으로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일과 관련하여 전자는 오직 은혜로만으로(sola gratia) 후자는 오직 행위로만(solis operibus)으로 중세 후기의 구원론을 요약한다.

언약적 율법주의와 중세 후기 구원론의 구원론적 구조의 유사성은 샌더스의 경우에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던과 라이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그들이 의롭다함을 믿음에 의한 첫 의로움(first justification)과 행위에 의한 마지막 의로움(final justification)으로 구분을 하는 것은 이들의 구원론이 신인동력설(synergism)을 따르고 있는 중세 후기 유명론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언약적 율법주의와 은혜언약


종교개혁신학은 은혜로 인한 첫 의로움과 행위로 인한 마지막 의로움이란 중세 후기의 교리에 대해서 신인동력설이며 세미펠라기우스라는 이유로 확고한 반대를 표명했다. 만일 중세 후기 구원론이 구조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와 유사하다고 한 것이 옳다면, 설령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종교 형태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샌더스의 주장이 옳다하더라도,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후기의 정황을 1세기 유대주의에 덧입혀 바울을 잘못 읽었다는 주장은 성립이 되지를 않게 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엄격한 공로에 근거한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주의와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신인동력적이며 세미펠라기우스적인 중세 후기 유명론을 향하여 “아니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 구원관은 바로 중세 후기 유명론의 신인동력적 구원론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개혁신학은 중세 후기 구원론과의 신학 논쟁에서 은혜언약에 기초한 구원론만이 성경적임을 분명히 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샌더스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한 율법주의와 다름을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샌더스가 말하고 싶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은혜는 개혁신학의 은혜언약이 말하는 은혜와는 본질상 다르다. 이를 테면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감’을 입고, 일단 들어온 후에는 자신의 책임에 의한 ‘머무름’ 또는 ‘유지’를 통하여 종말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부여받음을 뜻한다. 던과 라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처음 의롭게 됨’(first justification)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것이니만큼 자신의 공로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한 ‘최종 의롭게 됨’(final justification) 또한 자신의 행위로 심판을 받지만 완전한 의를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 순종 또한 성령의 인도함에 힘입은 것이므로 은혜의 요소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인가는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


결국 ‘언약적 율법주의’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그의 언약 백성이 되는 초기의 ‘의롭게 됨’을 받았으나, 율법을 불순종함으로써 종말론적 ‘의롭게 됨’을 누리지 못하는 위험성을 열어 놓는다. 이러한 위험성은 던이나 라이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종말에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최종적으로 확정을 받는 미래의 있을 궁극적인 의롭다 함을 받는 일은 자신의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하여 은혜언약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를 공로적 근거로 삼아 언약의 약속을 베풀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유일한 공로적 원인으로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은혜언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으로는 스스로 생명에 이를 수가 없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는 이른바 은혜언약이라 불리는 둘째 언약을 맺기를 기뻐하셨다. 이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죄인들에게 주시며, 또 생명을 얻도록 예정이 된 모든 이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믿을 수 있도록 하신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3항)

 

은혜언약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생과 구원을 값없이 거저 주심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믿음일 뿐임을 가리킨다. 또한 그 믿음을 갖는 일도 생명을 얻도록 예정이 된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리킨다.


물론 은혜언약은 조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영생과 구원도 아무런 조건이 없이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조건적으로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공로적 원인이 아니라 도구적 원인이므로 구원을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상충이 되지 않는다. 개혁신학 안에서 은혜언약의 대상자들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하여야 할 의무를 갖는다. 이 의무와 관련하여 튜레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가지 중요한 의무 사항들이 요구가 된다 - 믿음과 회개이다. 전자는 약속을 받아들이며 후자는 명령들을 성취한다. 전자는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은혜의 약속에 대답을 하며, 후자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는 복음적인 율법(the evangelical law)에 의해 명령이 내려진다. 하나님 편에서 언약하신 두 개의 특별한 은택들(죄사함과 마음에 법을 쓰심)이 있는 것처럼, 사람 편에서 그것들에 응답을 할 두 가지 의무들이 있다. 죄의 용서에 응답하는 믿음과 명령에 따라 행함으로써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실행하는 회개 또는 성화의 열망 등이 그것이다.

 

은혜언약은 인간 편에서의 의무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무가 은혜언약의 약속을 받음에 있어 어떤 공로적 원인(meritorius cause)으로 작용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은혜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고 또 언약이 주는 약속들을 누리는 도구로서 조건적 기능을 할 따름이다. 믿음과 행함 가운데 믿음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며 그로 인한 은택들을 누리게 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은혜언약의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으로서의 조건이다. 그러나 행함이 믿음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볼 때 넓은 의미에서 행함도 은혜언약의 도구적 원인으로서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은혜언약은 언약에 참여하고 언약을 통해 베푸는 모든 은택들을 누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언약을 위한 공로적 원인으로 삼지 않는다. 은혜언약은 언약적 율법주의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지만 사람의 책임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신인협력적(synergistic) 설명을 용납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앞서 본 신앙고백서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은혜언약은 도구적 원인인 이 믿음과 행함조차도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혜의 교리를 완성한다. 다시 튜레틴의 설명을 들어본다.

 

이러한 두 의무들은 사람이 행하여야 할 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물로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람이 행할 의무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들로 생각이 되어야 한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 조건들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으며 그러하기에 의무를 넘어 약속들이 된다는 것이 자연언약에 비하여 은혜언약이 누리는 단 하나의 특권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은혜언약은 인간의 힘에 근거하여 세워졌던 첫 번째 언약처럼 효력을 읽어버리게 되는 일이 없으며 영원히 계속적으로 효력을 갖는다. 은혜언약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으며 언약에 담긴 모든 것들은, 조건들도 또한 마찬가지로, 은혜로 주시는 것들이다.

 

요컨대 은혜언약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영생과 구원의 약속들, 사람이 행할 의무들과 그 의무들을 행하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더해지는 약속들, 택한 자를 끝까지 구원하시는 성도의 견인 등을 담고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뜻한다. 사람이 행하는 어떤 순종도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 누림의 공로적 조건이 아니며 단지 도구적 조건인 믿음에 결과하여 따라 나오는 도구적 조건이며 그 자체가 복을 누리는 경로일 따름이다.


‘새 관점’ 신학이 행위의 심판을 말하지만 그 행위를 공로적 원인이 아니라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였다면 행위에 의한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새 관점’ 신학의 강조는 개혁신학의 구원론적 이해와 충돌을 상당히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 있어서 ‘새 관점’은 분명하지가 않으며, 오히려 이 점에 있어서 ‘새 관점’은 중세 후기 유명론과 더 유사한 신인협력적 특징을 보인다.


물론 라이트가 심판 날에 구원을 결정할 행위가 인간의 독립적인 자력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날에 “행위들”에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인정을 받게 된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돕는 도덕주의자들이 도움을 받지 않고도 행하는 행위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종적으로 독특한 유대인들의 경계 표지들(안식일, 음식법, 그리고 할례)을 행하는 것도 또한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 곧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역사의 결과로 자신의 삶 안에서 열매맺어진 것들이다. 이렇게 하여 로마서 8:1-17은 로마서 2:1-16에 대한 진정한 답을 제공해 준다. 왜 이제 “정죄함이 없는” 것인가? 그 까닭은 한 편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에 죄를 정하셨기 때문이며 ... 그리고 다른 한 편 성령께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신자들 안에서 행하기 위해 - 궁극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에 순종함으로 따르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현재에 시작되고 있는 생명, 그 생명을 주기 위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될 행위들은 현재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음으로 가능케 된 결과들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런 만큼 행위에 대한 심판은 펠라기우스적인 의미에서의 구원론적 근거나 공로가 될 수는 결코 없으며, 그런 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종말에 심판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할 행위가 성령님의 도움을 받은 것임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은혜언약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고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중세 후기 유명론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자력적인 공로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력적인 공로에 의한 구원은 일찍이 정죄를 받았던 펠라기우스적 오류이다. 종교개혁신학이 중세 후기 유명론에 대하여 반대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순종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개혁신학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가르침 안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크게 인정을 하는 영적 사실이다. 예를 들어 개혁신학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칭의와 성화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교훈한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으며 우리에게 전가된 오직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가 보시기에 의로운 자들로 받아주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이다.

 

성화는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며, 죄에 대하여서는 더욱 더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하여는 더욱 더 산자가 되도록 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이다.

 

즉 칭의론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죄사함과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은혜를 다루는 반면에, 성화론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아나는 은혜를 다룬다.

종교개혁신학이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이었던 중세 후기 유명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성화를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근거로 이해하는 주장이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천주교회가 트렌트 종교회의(1545-63)를 소집하여 1547년에 작성한 “칭의에 관련한 칙령”에서 천주교회가 정죄하고 있는 개신교 신학과 아울러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간명하게 살펴 볼 수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성령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부으시고 또한 내재케 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배제한 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죄의 용서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혹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

 

중세 후기 유명론을 따라 천주교회는 그리스도의 의가 사람에게 실제로 주입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 곧 주입된 은혜(gratia infusa)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iustitia infusa)고 믿었다. 반면에 종교개혁신학은 ‘의롭게 됨’을 죄인의 죄책과 형벌을 제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히시는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로 고백을 하며, 주입된 은혜는 성화의 기반이라고 가르친다. 그렇지 않고 주입된 은혜에 대한 반응의 결과인 성화에 구원의 기초를 둔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행위에 의한 신인협동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신학에서는 “모든 구원의 과정의 시작이며 과정이며 또한 끝이 다 은혜이다. 그것에는 어떠한 인간의 공로다 완전히 배제가 된다. 마치 창조와 구속이 다 그렇듯이 성화도 또한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은혜언약은 의롭다함을 받는 죄의 용서와 거룩함을 이루는 삶의 실제적 변화를 서로 구별을 한다. 따라서 라이트의 ‘새 관점’이 말하는 행위에 따른 종말의 심판과는 구원론적 구조가 전혀 다르다. 비록 라이트가 종말에 최종적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될 행위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증거이며 또한 열매라고 강조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의롭다함의 근거나 이유로 삼는 이상 라이트는 그 걸음을 중세 후기 유명론과 함께 가고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가 어렵다. 즉 여전히 라이트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원론적 틀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무엇일까? 그 답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그의 의를 전가받는 것뿐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신학의 결론이다. 라이트와 던의 ‘새 관점’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해 태도가 불분명하고 의의 전가라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칭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신인동력적인 언약적 율법주의 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은 더욱 확고해진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중세 후기 천주교 신학도 전가된 의를 부정하고 주입된 의를 의롭다함의 근거로 삼은 결과로 말미암아 신인동력적 구원론을 열어간 것이다. 예를 들어 던은 바울의 속죄 신학을 전통적인 대속의 죽음의 교리로 해석한다면 법정적 허구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주장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의 속죄 교리가 대속의 교리(예수가 죽고, 죄인은 형벌을 면하게 된다)라면, 그러한 주장(법적 허구라는 주장)은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죄악된 육체를 지닌 자들을 대표한 죽음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복음은 믿는 죄인들이 죽음을 면하는 것이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속의 교리에 의한 의의 전가를 부인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인을 대표하는 죽음으로 해석을 하며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의 실제적 적용의 의미는 무엇일까? 던의 답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삶으로 변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참여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성령을 따라 살며 성령의 법을 성취하는 것을 포함한다. 요컨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로 구원을 위한 마지막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라이트는 법정적 의의 전가 개념은 부정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수반하며 단지 은유적으로 말해질 뿐 실제적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단언한다.

 

만일 우리가 ‘의’(righteousness)의 개념을,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과거에 해왔던 것처럼, 단지 법정에서의 은유로만 남겨둔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받는 것은 법적인 일처리의 인상, 차가운 공무의 형태, 좀처럼 우리가 예배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논리적이며 교정적인 하나님에 의하여 행하여진 거의 생각의 장난과 같은 것이 된다.

 

만일 법정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재판관이 자신의 의를 원고에게든지 혹은 피고에게든지 전가하거나, 나누어주거나, 물려주거나, 전달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전이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의란 법정을 가로질러 넘겨질 수 있는 사물이나 실체 또는 가스가 아니다. ... 만일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여 풀어준다면 또 그렇게 할 때, 그의 백성들은 은유적으로 말해서 ‘의’의 지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이 갖게 되는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하나님의 것일 뿐이다.

 

결국 의의 전가는 은유적일 뿐이며 실제적인 결과를 낳을 수가 없기 때문에 - 이것은 던의 표현에 따르면 법적 허구일 뿐이기 때문에 - 결국 종말에 심판을 받을 때 구원에 이르는 의의 근거는 자신의 의 밖에 없게 된다. 그 의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새 관점’의 구원론은 결국 중세 후기 유명론의 신인동력적 구원론이며 종교개혁자들이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주의라 비판을 하였던 바로 그것이 된다.

 

나가는 말 - 성경의 ‘새 관점’과 신학의 ‘옛 관점’의 충돌?


어떤 이들은 ‘새 관점’은 성경에 대한 정직한 주석에 기초하여 제시하는 것이라고 믿는 듯 하다. 그들의 생각에 종교개혁신학의 ‘옛 관점’을 고집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정직한 태도가 아니며 교리의 전통 안에 갇혀 있는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所在)에 대한 논고의 평가는 단지 성경 주석에 근거한 ‘새 관점’을 전통 신학에 근거한 ‘옛 관점’으로 제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가 아니다. ‘옛 관점’도 성경의 근거한 신학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개혁신학은 철저한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의 기초 위에서 주석한 결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e)와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라는 해석의 원리는 개혁신학의 성경해석적 충실성을 잘 드러내 준다. 성경과 교리는 어떤 이들이 오해하듯이 그렇게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새 관점’ 신학은 정말로 성경 주석적으로 견고한가? 샌더스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과 바울의 논쟁 상대를 정확히 말해주는가? 만일 그렇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정말로 ‘언약적 율법주의’와 사상적 체계에 있어 근본적으로 동일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전제로 할 때, ‘언약적 율법주의’의 언약과 종말론적 체계가 성경 전체의 복음인가? 신학적으로 말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의 행위에 근거한 신인협동론적인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주의 구원을 말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본 논고의 판단은 ‘새 관점’이 제시하는 신학을 성경적인 답으로 받기에는 길이 너무나도 멀다는 것이다.


또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1세기 역사적 맥락을 살피기 위한 성경 외적 문서들의 연구에 의지하여 - 그것도 성경 해석을 지배할 만큼 확정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그것으로 성경의 해석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한가? 성경 자체의 해석적 음성은 없는 것인가? 왜 라이트와 같은 이가 ‘새 관점’을 논하면서 의롭게 됨과 율법의 행위에 관련한 중요한 본문들인 에베소서 2:8-9, 디모데 후서 1:9, 그리고 디도서 3:5 등은 다루지 않는 것일까? 그것들을 바울 저작으로 보지 않기 때문인가?


물론 본 논고는 ‘새 관점’을 성경주석적 논의를 통한 신약신학적 접근을 하고 있지 않다. 본 논고의 목표는 ‘새 관점’과 ‘옛 관점’이 성경에 대한 각각의 주석적 차이로 인하여 얼마나 다른 신학적 결과를 낳고 있는가를 규명해보고, ‘새 관점’의 신학과 비슷한 주장들이 옛 신학들 가운데 이미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를 규정하고자 하였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새 관점’과 비슷한 옛 신학들과의 논쟁 속에서 종교개혁신학 또는 개혁신학이 ‘옛 관점’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새 관점’의 성경적 주석의 주장들 가운데 여러 부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검토되었음을 암시하는 부수적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 현대 성경신학계의 ‘새 관점’에 대한 비평적 논의들은 제외하고서라도.


예를 들어 ‘새 관점’이 주장하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해석만 보더라도, 칼빈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주석 등에서 당시 천주교회의 주장, 곧 믿음의 반제로서의 율법을 단지 의식법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이에 대한 도덕법적 해석의 여지를 반대하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성경 주석적 노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의롭게 됨을 초기와 종말의 것으로 구별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도, 칼빈은 그의 ‘트렌트 종교회의 교리강령에 대한 비판(Antidota)'에서 로마서 1장 16절, 하박국 2장 4절, 창세기 15장 6절과 갈라디아 3장 6절, 로마서 5장 1절 등을 언급하면서 분명하게 비평적으로 검토하였다.


결론적으로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는 교리사의 흐름 가운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성경적으로 고백해온 단일동력적 신학의 결과와 대척점에 있다. 종교개혁신학 특별히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구원의 공로적 원인(meritorious cause)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로만 돌린다.(solo Christo) 인간의 순종은 결코 구원의 공로일 수가 없다. 또한 구원을 받는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 곧 방식에 있어서 오직 믿음만을 고백한다.(sola fide) 만일 행함을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열매 또는 증거로서 믿음에 덧붙여지는 것이므로, 믿음의 필연적 결과로서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 원인으로 간주될 수는 있을 것이다. 행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런 제한 안에서만 도구적 원인으로서의 의미를 갖을 뿐이다. 그리고 구원의 실행을 위한 유효적 원인(efficient cause)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오직 은혜뿐임을 고백한다.(sola gratia)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오직 성경의 주석적 근거에 기반을 둔다.(sola Scriptura) 개혁신학은 이 모든 은혜의 고백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언약을 통해 풀어간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신학적 평가만을 내린다면 언약적 율법주의과 ’새 관점‘의 신학적 주장들은 교리사적으로 이미 검토된 옛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율법주의‘인 것이다. - 끝 -

 

 

                                           김병훈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권문상 (웨스트민스터, 조직신학 교수)

 

1. 요약


이 논문은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근본적으로는 중세 후기 로마 카톨릭의 유명론 신학이 제기한 것과 같은 것으로 그 신학적 所在는 16세기 중세 신학의 재탕임을 말하고 있다. 제임스 던의 '새 관점' 신학은 '옛 관점'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종교개혁 신학의 '이신칭의' 교리는 여전히 유효하므로 '새 관점' 신학은 중세 신학의 위험성 못지않게 경계해야할 것임을 밝힌다. '새 관점'은 종교개혁자들이 강도 높게 비난한 중세 후기의 '공로사상'에 근거한 신인동력적 구원론이며 넓은 의미의 율법주의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먼저 '새 관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제임스 던이 명명한 '새 관점'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기초하여, 바울 서신에 나타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구원론적 측면에서 '율법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이방인과 구분하는 표로서 유대법적 요소인 것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이 행위로 구원 얻는다고 판단하였던 전통적 견해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의식들은 구원 얻는 방편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일련의 행동들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새 관점'에 의하면 바울의 구원론이 이신칭의로 요약된다고 믿었던 종교개혁 신학은 틀린 것이다. 다만, 바울이 말한 믿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제시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새 관점'에 따르면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성격이라기 보다는 교회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어서 저자는 '새 관점'의 기초로서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분석하였다. 언약적 율법주의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따라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율법 준수를 통해 언약 관계가 유지되고 회복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언약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주의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전제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제임스 던은 이러한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따르면서 바울 신학이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연속선상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은혜의 신학이라는 틀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즉 각각 언약 안에 그리고 믿음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이 말한 '율법' 또는 '율법의 행위'는 '믿음'과 대치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율법'에 대한 비판은 배타적 유대주의 혹은 민족적 우월감을 지적하고자 함인 것이다. 나아가 던은 바울의 구원론을 해석하길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일'을 단회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율법의 순종을 통한 의가 주어져야 마지막 심판을 면하게 하여 완전한 의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라이트는 2단계의 의를 주장하여 바울 신학이 은혜로 첫 번째 의를 얻은 후에 순종을 통해 마지막 심판에서 최종적으로 의를 얻어 구원받는다고 해석하였다.

 

이어서 저자는 바울이 '언약적 율법주의' 틀 안에서 구원론을 전개하였다고 하는 '새 관점' 신학에 대해 반박하였다. 이를테면, 바울의 '은혜 언약'이 '언약적 율법주의'와 동일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말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새 관점'의 주장이 잘못된 증거로, 바울은 당대의 유대주의 문헌보다는 구약성경을 참고하였다는 이유로 바울이 당대의 유대주의와 연속성 상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새 관점'이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1차적으로 '새 관점'의 방법론적 문제를 제기한 후, 저자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새 관점'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은혜'의 틀을 갖는지를 비판하였다. 샌더스에 따르면 '언약적 율법주의'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와 달리, 하나님의 언약적 긍휼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받은 이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궁극적으로 율법주의가 아님을 말하기에는 그 구조가 너무 단순하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은혜에 2차적으로 더해진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신인동력적 요소를 담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펠라기우스적인 오류는 아니더라도 중세 후기 유명론의 신인동력적 오류를 피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호튼(Michael Horton)에 의지하여 저자는 세례로 첫 번째 의를 얻은 다음 인간의 협력에 따라 '마지막으로 의롭게' 된다는 중세의 견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중세 후기의 구원론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거부당한 것으로, '언약적 율법주의'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분석, 비판하였다. 샌더스의 경우와 같이 던과 라이트의 '새 관점' 역시 중세 후기 구원론 구조와 유사하다. 첫 의로움과 마지막 의로움의 두 단계를 설정하여 중세 후기의 유명론과 같이 신인동력적임을 지적하였다.

 

끝으로 저자는 종교개혁 신학이 중세 후기 유명론을 신인동력적이며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이라고 비판한 것과 같이, 개혁신학적 기준에서 보아 '새 관점' 신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신인동력적 구원론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유대주의라고 비판하였다. 개혁신학은 은혜언약에 기초한 구원론이 성경적임을 혹은 바울신학적임을 말한다면, 샌더스가 비록 은혜로 언약 백성이 된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 책임에 의해 언약 관계가 유지된다고 말함으로써 샌더스가 말한 '은혜'와 개혁신학이 말하는 은혜는 본질상 다르다고 규정하였다. 샌더스의 견해는(던과 라이트도 역시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는 '공로주의'적이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 그 다음에 순종과 그에 따른 심판, 그리고 최종적 의에 이름이라는, 이 두 단계의 의를 얻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진정한 은혜를 보장시킬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개혁신학이 순종의 의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순종은 의를 이루게 하는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을 뿐이며, 나아가 그 순종 역시 은혜 안에 있는 것으로 믿음과 같이 순종도 '도구적 원인'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 개혁신학이 '새 관점' 신학과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새 관점' 신학은 순종을 '공로적' 원인으로 보게 하여 궁극적으로 신인협력적이 되게 한다면, 개혁신학은 철저하게 칭의는 은혜로만 주어지고, 다만 믿음은 '도구적'이 되게 하는데 그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혁신학은 '은혜 언약'이 말하는 은혜의 진면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반면에 '새 관점' 신학은 은혜를 말하기도하고 표면적으로도 공로주의적 구원론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은혜의 진정성은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순종을 통한 '의의 주입'을 주장하는 데에서도 역시 진정한 은혜는 발견되지 않는다. 개혁신학이 '전가된 의'를 주장하는 데에서만 은혜가 보장되는 것이다. 물론 개혁신학이 순종 혹은 성화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성화는 믿음과 칭의 이후에 나타나는 열매로서 개혁신학에서는 매우 중시된다. 다만, 개혁신학의 '은혜 언약'은 칭의를 단회적으로 만드는 것 외에, 성화를 보장시켜주면서, 동시에 칭의와 성화를 구별한다. 이 점에 대해 '새 관점'은 '의의 전가' 개념을 은유적이며, 법적인 허구라고 비판하면서, 결국 의에 이르는 길로서 '자신의 의' 외에는 없다고 판단, 궁극적으로 성화를 칭의의 근거로 삼아 신인동력적 구원론을 전개 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새 관점'의 구원론은 전통신학의 '옛 관점'을 뒤집을 만큼 주석적으로 견고하지 않으며 성경 전체에 충실하지도 않은 것이고 방법론적으로도 1세기 역사적 맥락을 살피기 위해 성경 외적 연구에 의존하는 등 전체적으로 설득력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아울러 신학적으로 분석할 때 '새 관점은' 이미 종교개혁시대에 개혁신학이 맞닥뜨려서 논박한 중세 후기 유명론의 반펠라기우스적 논리와 다를 바 없는 '옛' 관점과 유사한 것으로 비판하며 마무리 하였다.

 

2. 평가:


저자는 개혁신학의 구원론에 도전하는 '새 관점'의 실체를 밝히고 이 신학이 갖는 주석학적, 신학적 문제점들을 여러 관련 저서들을 참고하여 '새 관점'의 신학적 자리를 매우 설득력 있게 잘 밝혀주었다. 신약신학적 논의의 주제이기 때문에 탐험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담도 있었을 터인데 비교적 관련 신약 저서들을 탐독하여 소개한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새 관점'이 어떤 의미에서는 '옛 관점'임을 부각시킴으로써 여전히 반펠라기우스적 구원론이 개혁신학에 도전을 주고 있음을 밝혀준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다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질문 또는 제안을 참고한다면 더욱 더 훌륭한 논문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1). 이 논문이 '새 관점'의 신학적 소재를 밝히는 것이고, 그것이 개혁신학에 의해 이미 논박된 중세 후기 유명론의 반펠라기우스적임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칼빈의 구원론과 중세 후기 유명론의 구원론을 관련 주 저서에 의존하면서 논의를 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았는지 제안하고 싶다. 비록 현재는 신약신학적 논의이기는 하지만, 조직신학적 주제였던 것이라고 볼 때, 이러한 방법론이 더 타당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2). 이 논문이 신약신학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독자가 알고 있을지라도, 이 논문의 주제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 있음을 고려하여, '새 관점' 논의가 무엇인지 논문 앞에서 이 주제에 대한 신약신학적 논의가 왜 이렇게 심각하였는지, 한국(인)의 신학자들 가운데 이 논의에 참여하고 그 결과는 어떠한지를 밝혀둔다면 훨씬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김세윤 교수의 '바울신학과 새관점'(두란노, 2002) 및 '바울 복음의 기원'(엠마오, 1994) 등을 참고하면 '새 관점'의 칭의 해석이 바울 복음과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새 관점' 신학이 기여한 바는 없는지 질문하고 싶다. 어떤 신학이든지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고 이를 객관적으로 살피는 것은 논자의 공정한 자세가 아닌가 한다. 전통적 칭의론이 성화를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갈 수'있음을 칼빈도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논의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은 믿음을 가진 자가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고는 보고 있지 않은데, 즉 칭의와 성화가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해서이다. 그렇다면, 비록 '새 관점'이 개혁신학적 칭의론을 부당하게 반대하고는 있지만, 개혁신학적 칭의와 성화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키려는 경향에 대해 도전을 주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할 수 있어서이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구원이 삶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현재 명령형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 우리 행위가 구원과 분명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17:15)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믿음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한 것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행함이 없는 자는 비록 목사라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 관점'이 제시한 2단계적 칭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종류의 성경 본문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면은 평가할 만 한 것이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믿음 외에는 없지만,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그 선한 행위가 드러나야 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마7:20).

 

(4). 기왕에 종교개혁신학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면, 루터의 칭의론과 칼빈의 칭의론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한다. 비록 칼빈이 루터를 존경하며, 그의 이신칭의론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루터처럼 칭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루터보다는 칼빈의 칭의론은 훨씬 더 성화와 불가분리적인 것이다.

 

(5). '새 관점'을 결론적으로 '옛 관점'이라고 칭하는 것은 매우 신선하다. 하지만, 이미 학계에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종교개혁신학의 '옛 관점'과 비교하고 있어서, 혹시라도 오해의 소지를 지닐 수 있는데, 다른 용어로 함축하여 표현할 길은 없는지 질문하고 싶다.

 

(6). 매우 흥미롭게 이 논문을 읽을 수 있게 해주어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도, 불분명한 내용 혹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어서 지적하고자 한다. 예: 논문 p.5의 각주 14번 다음 문장. p.6에서 라이트와 샌더스를 구별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더 논의가 필요하다. 샌더스가 의를 '들어감', '머무름'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이후 이 주제에 대해 이 논문 후반부에서 논의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더 발전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끝으로, 바쁜 목회 일정에도 불구하고 좋은 논문을 제공하여주셔서 감사드린다. 특히 전공분야와 다른 신약신학적 논제들을 다루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김 교수께 깊은 감사드린다.

 

   

김병훈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김윤태 교수 (백석대 조직신학)

 

   

근래 바울과 바울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소위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신약신학계를 넘어 모든 신학 분야 전반에 걸쳐 폭 넓게 확산되고 있으며 뜨거운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특별히 한국 신학계 안에서 이러한 관심의 깊이는 지난 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제55차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논문발표회”와 금번 한국개혁신학회의 학술심포지엄에서의 주제가 이러한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된 것에서 무엇보다 잘 나타나 있다. ‘새 관점’이 이처럼 집중적이고도 뜨거운 신학적 관심과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새 관점’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전통에 따른 개신교의 전통적 구원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일종의 충격과 도전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E. P. Sanders, James D. G. Dun, 그리고 N. T. Wright등과 같은 ‘새 관점’ 학파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주장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바울과 바울의 칭의론은 구원론적 관점에서 다루어져 왔으나 이런 이해는 정당한 주석적 작업의 결과라고 볼 수 없으며, 당대의 유대주의에 대한 그리고 이런 유대주의와 바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결과는 바울의 칭의론을 교회론적 관점에서 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새 관점’이 구원론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 관점’은 조직신학자들에게도 첨예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금번 김병훈 교수께서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이를 조명해 주시는 글을 발표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중요한 주제에 대해 그리고 존경하는 김병훈 교수님의 글에 대해 부족하지만 논평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특별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1. 논문의 이해 및 요약

 

(1) 저자의 ‘새 관점’에 대한 이해


‘새 관점’의 새로움이란 유대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리고 이런 유대주의와 바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말한다. 유대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란 유대주의를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지키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으려 한 것으로 본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적 관점과 달리 당시의 유대주의는 할례나 안식일 또는 정결의식 등과 같은 의식법으로서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하여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선택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유대민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관점'에서 보는 유대주의는 인간의 성취나 업적에 의한 율법주의 종교, 즉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또한 은혜의 종교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따른 은혜로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바탕 위에서 바울을 해석할 때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란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유대주의 의식법을 지키도록 요구한 것을 의미하며,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 신자들의 이방인 신자들을 향한 '율법의 행위'에 대한 요구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새 관점'의 이해에 있어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이 말 곧 '이신칭의'의 의미는 따라서 이방인 기독교 신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유대주의 의식을 준수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교회론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적 고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새 관점'이 보는 구원론은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언약적 율법주의'란 비록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라 하더라도 곧 교회에 가입된 자라 하더라도 신자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언약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기 위하여서는 또 그럼으로 끝까지 구원을 얻기 위하여서는 신자에게 율법의 준수와 속죄가 지속적으로 요구된다고 하는 것이다.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 그것이 곧 최종구원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언약백성으로서 신자라 하더라도 최종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종 구원을 위하여 언약백성으로서 신자는 율법을 순종함으로 지속적으로 언약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준수에 따른 완전한 의로움을 얻음으로 최종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새 관점’은 바울 또한 바리새인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신학은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 연속선상에 있으며 따라서 바울 신학의 구원론 또한 이런 ‘언약적 율법주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구원론의 중요한 특징은 “(1) 곧 은혜로 최초의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 유대인들은 선택에 의하여, 이방인들은 믿음에 의하여 - (2)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의 교훈에 순종을 함으로써 마지막 심판에서 의롭다함을 최종적으로 받는 두 단계에 걸친 의롭다함의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새 관점’은 주장한다.

 

(2) ‘새 관점’의 바울 신학의 구원론 이해에 대한 저자의 비평


저자는 개혁신학자로서 이러한 ‘새 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개혁주의 신학의 언약신학 특별히 은혜언약과 비교함으로 비평하고자 한다. 그것은 개혁신학자로서 저자는 바울의 신학의 구원론을 개혁신학의 은혜언약의 맥락에서 이해하면서 ‘언약적 율법주의’나 은혜언약이나 둘 다 성경을 ‘언약’이라고 하는 구조적 통일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언약적 율법주의’는 은혜언약이 성경을 보는 것처럼 신구약 성경을 하나의 언약으로 구조적 통일성을 가지는 것으로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둘 중의 하나는 성경의 언약 사상을 바르게 반영하고 있지 못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새 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가 바울 신학을 당대의 유대주의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하려는 방법을 쓰고 있는 반면에, 개혁주의의 은혜언약은 바울 신학을 구약성경의 폭넓은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방법을 쓰고 있다고 볼 때 저자는 후자가 더 성경적임을 주장한다. 특별히 저자는 ‘새 관점’의 방법론적 문제와 관련하여 “‘새 관점’에서 재해석을 요구하는 ‘율법의 행위’ ‘의롭게 됨’ ‘하나님의 의’ 등을 바울이 성경에서 언급을 할 때 그 의미 해석을 위하여 단 한 곳에서도 1세기 당대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문헌을 인용하여 참조한 적이 없음”을 지적함으로 ‘새 관점’의 방법론적 오류를 꼬집고 있다.

 

또한 저자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의롭다함을 믿음에 의한 첫 의로움(first justification)과 행위에 의한 마지막 의로움(final justification)으로 구분하는 중세 후기 유명론의 신인동력설(synergism)과 유사성을 가지는 것”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상 이의 반복이며,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이런 신인동력설(synergism)에 대한 반대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중세 후기 유명론을 따라 천주교회는 “그리스도의 의가 사람에게 실제로 주입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 곧 주입된 은혜(gratia infusa)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iustitia infusa)”고 믿었던 반면에 종교개혁신학은 “‘의롭게 됨’을 죄인의 죄책과 형벌을 제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히시는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로 고백을 하며, 주입된 은혜는 성화의 기반”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하면서 이와 같은 중세 후기 유명론과 같이 ‘언약적 율법주의’ 또한 “주입된 은혜에 대한 반응의 결과인 성화에 구원의 기초를 둔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행위에 의한 신인협동적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저자는 개혁신학의 은혜언약의 관점에서 이러한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신인동력설(synergism)의 반복인 ‘새 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반대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새 관점’이 바울의 신학을 유대주의와 관련시켜 ‘언약적 율법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바울의 신학에 대한 그리고 보다 넓게는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밝힌다.

 

 

2. 논문에 대한 평가 및 조언

 

먼저 본 논문의 의미는 소위 ‘새 관점’과 관련한 신학적 논의의 핵심들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새 관점’이 가지는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으며, 특별히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은혜언약과 비교함으로 ‘새 관점’이 내포하고 있는 구원론의 문제점들을 잘 지적함으로 앞으로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새 관점’과 관련하여 논의할 방향을 잘 정립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본 논평자는 저자의 ‘새 관점’에 대한 비평과 결론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본 논문과 관련하여 세부적인 논의에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기 보다는 본 논문이 가지고 있는 더 크고 중요한 의미인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새 언약’과 관련한 앞으로의 논의가 더욱 진전되고 활발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보다 큰 틀에서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한다.

 

(1) ‘새 관점’의 성경관과 성경해석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비평


‘새 관점’의 핵심은 바울과 바울의 글을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의 관련성 속에서 읽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바울의 글과 그 글 속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을 이해함에 이성적이고 학문적으로 바르고 정직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원저자가 성령이심을 믿음으로 성경의 완전영감을 받아들이고 그럼으로 구원계시로서 성경의 통일성을 전제로 신학적 성경해석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성경관과 성경해석방법론에 대하여 신학적 편견이요 비학문적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조롱하는 것이 된다. 본 논평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새 관점’을 비평할 때 그 출발점은 우선적으로 이러한 ‘새 관점’의 성경관과 성경해석 방법론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 관점’의 대표적 주자라 할 수 있는 N.T. Wright가 쓴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이라는 책에서 Wright는 그 책의 거의 대부분을 그의 바울과 바울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그가 가진 성경관과 성경해석 방법론을 밝히는데 할애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의 성경해석방법론은 소위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인 것이다. 곧 바울의 글 또는 바울의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의 근거가 되는 이야기 곧 source가 있으며 바울의 글의 source는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로서 바울의 이야기는 이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를 자신의 이야기로 바꾸어 말한 이야기, 즉 일종의“retelling story”라는 것이 그의 기본 인식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신학과 바울의 종교는 유대주의의 아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심각한 질문은 그럼 왜 우리는 바울의 글 또는 이야기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먼저 답하지 않고 구원론이든 교회론이든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상 교회와 신자들에게 별 의미가 없는 학자들의 말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된다. 바울의 글은 모든 성경의 원저자요 성경을 하나의 구원의 계시로 통일성 있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감된 하나님의 계시인가? 아니면 유대주의 이야기를 다시 각색한 바울 자신의 ‘retelling story’인가? 비록 ‘이야기 신학’이 자유주의의 비평적이고 파괴적으로 성경을 보는 소위 ‘문서설’에 반대하여 성경을 문서들로 쪼개지 말고 통째로 하나의 이야기로 읽자고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개혁주의 성경관과 성경해석방법론의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 신학’에 대한 계시관의 문제를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본 논문에서 이러한 점이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두 개의 언약인가? 하나의 언약인가?


‘새 관점’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방식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방식이 다르게 이해된다. 둘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은혜의 방식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되어지는 반면,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다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볼 때 이는 은혜언약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유대인들의 경우와 이방인들의 경우에 다른 것인가?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언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본 논문의 저자는 다루지 않았다. ‘새 관점’에 관해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비평하려 한 본 논문의 의도는 매우 적절하고 좋은 것이었지만, 그러나 ‘새 관점’을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다루려 할 때 반드시 이스라엘을 위한 언약과 이방인을 위한 언약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같은 하나의 은혜언약인지의 문제를 논의해야 하리라 본다.

 

(3) 은혜언약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책임도 강조하는가?


본 논문에서 저자는 최종구원을 개혁주의 언약신학, 좁혀서 은혜언약의 맥락에서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최종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도 동시에 강조하고 있으며(예컨대, “너희 구원을 이루라”) 칼빈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은혜언약의 회원이 되었다 하더라도 모두가 최종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은혜언약에서 끊쳐질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이점에 관해서는 Peter A. Lillback, "The Continuing Conundrum: Calvin and the Conditionality of the Covenant", CTJ, Vol. 29 (1994), pp. 42-74;그의 최근의 책 [The Binding of God]을 참고). 개혁주의 내에서 언약신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개혁주의 언약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은혜언약 안에서 인간의 책임의 요소는 과연 없는 것인가? 은혜언약의 백성으로서 은혜언약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한, 은혜언약의 유지와 완성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은 무엇인가? ‘언약적 율법주의’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반펠라기우스주의라면 개혁주의 언약신학에서 은혜언약 안에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강조하면서도 반펠라기우스주의의 신인협력설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울러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감리교의 소위 ‘복음적 신인협력설’에 대해서는 ‘언약적 율법주의’와 관련하여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저자의 입장이 궁금하다.

 

(4) 율법과 그리스도, 율법과 성화, 율법과 구원


‘언약적 율법주의’ 구원관을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비평하고자 할 때 또 한편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은혜언약 안에서 율법의 의미와 기능에 관한 것이다. 모세율법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지 430년 이후에나 주어졌으며 이는 모세율법이 은혜언약 안에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은혜언약 안에서 율법의 의미와 기능은 무엇인가?; 율법과 그리스도, 율법과 성화, 율법과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함으로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율법의 의미와 기능을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비교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좋은 논문을 발표해 주신 김병훈 교수님께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이후 더 발전된 논의가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출처:  조광성 2010.10.13 22:58   http://blog.daum.net/holylife2/1720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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