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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보적 칭의론의 골자/ 김세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

(<뉴스앤조이 >2014. 6. 경 기사, 페이스북에서 옮김)


참고: 김세윤의 칭의론, 구원론은 복잡한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소위 "유보적 칭의론"을 펼친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시점이 언제인가? 김세윤은 심판대에 설 때로 본다. <리포르만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라고 본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와 능력으로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구원자로 믿을 때라고 믿는다. 이 주제를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있을 것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에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아래의 글은 대담형식이지만 실제로는 그 분 자신이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유보적 구원론"의 핵심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새관점 학파와 옛관점 학파의 논쟁, 야곱 타우베스,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과 같은 신학 밖에서의 사도바울 연구로 바울 연구는 마치 르네상스를 맞은 듯하다. 바로 그 중심에 ‘한국이 낳은 바울 신학의 대가’ 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은 김세윤 박사가 있다. 김박사는 세계적인 신약학 교수로 한국인으로서 국제 학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신학자라 평가를 받아왔다.


현대 신학계의 아이콘인 톰 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새관점(New Perspective)’ 학파의 위세는 대단하다. 복음주의자 존 파이퍼(John Piper)가 ‘칭의 논쟁’을 들고 톰 라이트에 덤벼들었다 완패(?)를 당하고 물러난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시점에 그들과 당당하게 맞서 가장 설득력 있게 토론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 중 하나로 단연 김세윤 교수가 꼽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풀러 신학교에 위치한 그의 교수실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김세윤 박사와 어렵게 연결이 되어 만날 수 있었다. 긴 수염에 투박한 듯한 목소리에서 나온 그의 메시지는 왜 그가 풀러 신학교에서 박수를 받으며 종강을 할 수 있는 교수들 중 한 명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 연구실에서 김세윤 교수 ⓒ 양재영 기자


“제임스 던(James Dunn)과 톰 라이트(N.T. Wright)와의 논쟁”


- 바울 신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조직신학을 공부하려는 생각을 갖고 영국에 갔습니다. 처음 1 년 동안 J. I. 팩커에게서 조직신학을, 콜린 브라운 교수에게서 종교철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조직신학을 잘 하려면 성경 신학적인 밑받침이 든든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성경 신학의 뒷받침이 없이 하는 조직신학은 구식 스콜라 신학을 넘지 못하거나 뿌리 없이 그저 사변적인 것이 되기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박사학위까지는 신약성경신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불트만식 극단의 회의주의적 역사비평이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예수와 복음서들을 연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었기에, 그런 문제가 비교적 적은 바울 신학을 하기로 했고, 바울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조직신학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제임스 던과 학문적 대척점에 서있다는 평이 많습니다


1977년 샌더스(E. P. Sanders)에 의해 시작되어, 78년 이래 제임스 던과 톰 라이트에 의해 ‘바울신학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운동이 시작 되었을 때, 많은 바울 신학도들은 큰 충격을 받았죠. 그들은 칭의론의 기본인 ‘죄용서’, ‘무죄선언’ 등의 법정적 측면은 거의 무시하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 율법을 지킴이 없이 신자 유대인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자손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일원들이 된다는, 구원론이라기보다는 교회론적 의미와 이방선교를 위한 선교론적 의미에 집중하니 전통적인 바울학도들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새관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는데, 특히 던과 많은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새관점’의 근본적 문제와 더불어 좀 더 구체적으로 그가 라이트와 함께 “율법의 행위들”이라는 바울의 개념을 너무 좁게 해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하였지만, 우리의 논쟁은 주로 칭의론의 기원 문제에 집중되었습니다. 던은 쉬바이쳐의 옛 이론을 부활하여 바울이 40년대 말 안디옥 사건과 갈라디아에서의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자신의 이방선교를 정당화하기 위해 칭의론이라는 복음 선포양식을 개발했다고 주장했죠.

제가 77년에 완성한 박사학위 논문, 81년에 독일과 미국에서 출판된 책 ‘바울 복음의 기원’에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과 이방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체험하고 이방선교에 나서면서 칭의론을 중심으로 구원론을 전개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는데, 던은 자기의 논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저를 많이 공격했습니다. 그때 80년대 제가 한국에서 쉽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기에 답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이후 미국에 와 학문의 세계에 다시 진입하고 반박의 글을 쓰면서 논쟁을 몇 번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그게 많이 알려지게 된거죠. 이 논점이 중요한 것은 칭의론이 바울복음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문제와 함께, 그것이 근본적으로 구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교회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느냐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한다면 바울이 회심과 소명 후 안디옥 사건과 갈라디아 논쟁 때까지 16-17년간 선포한 복음은 뭐냐?’고. 근자에 이르러 던은 칭의론이 내용적으로는 처음부터 바울의 복음에 속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은혜/믿음으로만 – 율법의 행위 없이 의인으로 칭함 받음’의 표현 양식은 안디옥 사건과 갈라디아 논쟁 이후 이루어졌다고 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만족스런 답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이것을 지금 쓰고 있는 책에서 지적하였습니다.

- 이후 ‘새관점’ 학파와 논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그 논쟁이 한 20년 간 치열하게 진행된 후, 즉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이르러 새관점 학파와 옛관점 학파가 상호 접근을 이루면서, 그들의 논지들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많은 공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새관점 학파는 자신들이 칭의론의 기본적인 의미인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무죄 선고됨, 의인이라 칭함 받음’이라는 법정적 의미를 간과한 것은 불찰이었다고 반성하고 (라이트는 솔직하게, 던은 ‘본의가 아니었다’고), 옛관점 학파는 너무 법정적 개념으로만 칭의론을 이해하면서 그것의 사회적,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를 간과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 풀러신학교에서 개최한 바울 신학 컨퍼런스에서. 김세윤 교수(우측), 풀러 신학교 총장 마크 레버튼 박사(중앙), 한인목회학박사원 원장 황진기 박사(좌측) ⓒ 사진제공 황진기 박사


- 얼마 전 풀러 신학교에서 주최한 톰 라이트 컨퍼런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친구(톰 라이트)가 칭의론에 있어 자신의 ‘새관점’적 견해와 전통적인 구원론적 이해를 많이 통합하고 있지만, 지금도 전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칭의론을 주로 이방인들이 유대의 율법을 행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신자 유대인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가족의 멤버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칭의론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가 얻게 될 ‘무죄 선언’, ‘의인으로 칭함’ 받음을 지레 얻게 됨이라는 법정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곧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칭의론은 이와 같이 관계론적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이 되었다,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되었다’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고 우리가 그의 피조물로서 그의 은혜에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관계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즉 ‘언약의 관계’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또는 이스라엘)의 언약의 관계를 아비와 자식의 그림으로도, 왕과 백성의 그림으로도, 목자와 양떼의 그림으로도 표현합니다. 그런데 라이트는 아직도 그의 초기 ‘새관점’ 적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칭의론을 줄기차게 ‘아브라함의 가족’ 이라는 범주로만 해석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의 범주로는 거의 해석하지 않음이 나의 불만입니다. 라이트는 칭의론을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자신이 창세기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심, 즉 열방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인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통합되어 복을 받게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해석합니다. 그러다보니 칭의론을 죄인들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됨’의 의미가 간과되는 것이지요.

“올바른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와 성화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칭의란 근본적으로 ‘죄 용서’, ‘무죄선언’, ‘의인이라 칭함 받음’ 이라는 법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됨’이라는 관계론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주의 재림 때 있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에서 얻게 될 것의 선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칭의’의 완성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 개신교가 대체로 그랬듯이, 한국교회도 칭의론의 관계론적 의미를 간과하고 그것의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무죄선언’ 받고 ‘의인이라 칭함’ 받는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만 강조하고, 그것을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하면서, 복음을, 칭의론을 아주 단순화시켜 가르쳐온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더 단순화 하여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구호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온 사람들이 ‘아 그래? 그럼 나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지금 교회 다니고 있으니, 나의 구원은 확실히 보장된 것이구만. 그럼 아무렇게나 살아도 뭐 문제될 것 없겠네?’ 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러니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 교회는 의인의 삶이 없으면서 ‘의인’으로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칭의론에 대한 부분적 (즉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윤리 없는 구원론을 설파하는 많은 한국의 목사들은 사실상 그들이 이단이라고 규정한 구원파의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꽤 많은 진지한 목사들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의 서정’ 론에 입각하여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얻는 ‘칭의’는 ‘성화’로 이어져야 우리가 ‘영화’, 즉 구원의 완성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롬 8:30), 오늘 여기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성화론’이라는 개념이 꽤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 즉 믿음으로 의인 된 자들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념의 이름이 잘 못 붙여졌고, 그것을 칭의론과 구분하여 생각하게 하므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화’라는 개념을 ‘칭의’ 뒤에 오는 구원의 새로운 단계로 사용하지 않고, 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 받을 때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짐, 하나님의 소유물이 됨, 하나님의 백성이 됨, 곧 ‘성도’가 됨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바울은 또 그의 편지들 중 서너 번 이렇게 우리의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성화’ 된 사람들은 계속 그 ‘성화’의 삶을 살아서 (즉 계속 세상의 가치나, 정신, 도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후의 심판에서 ‘성화’ 에 있어 흠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살전 3:13-14; 4:1-8; 5:23; 롬 6:19-23).

그러니까 ‘성화’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종말에 ‘완성될’ 것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둘 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음, 곧 그의 백성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지금 현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와 ‘성화’는 같은 실재를 말하는 병행어들 또는 동의어들로서 (고전 6:11), 그 실재 (곧 하나님의 백성 됨)을 서로 다른 그림언어로 표현하는 것들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이제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의로운’ (즉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고, ‘성화’는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어 ‘거룩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보고 율법과 관계하여 구원론을 펼칠 때는 ‘칭의’의 개념을 사용하나, 그것을 세상의 오염으로 보면서 율법의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으며 구원론을 펼칠 때는 ‘성화’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하나님께 바쳐져 ‘성도’가 된 것은 여러 서신들에서 언급하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현재적 삶을 순결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것은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오염될 위험이 컸던 이방세계의 그리스도인들, 즉 고린도인들과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쓴 편지들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롬 6:19-23 도 참조).

‘성화’라는 개념을 이렇게 사도 바울이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대로 쓰지 않고,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의 서정’의 틀 안에서 이해하여, ‘칭의’ 다음에 오는 구원의 새로운 단계, 즉 현재적 단계를 지칭하기 위해서 쓰면, 그 언어 사용으로 얻고자 하는 결과를 얻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구원의 서정’의 구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도, 우리 개신교의 전통에 따라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칭의’를 강조하는 것만큼은 하지 않으며 (아니, 하지 못하며 – 혹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오류를 범할까봐), 게다가 선취된 ‘칭의’를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견고히 뒷받침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니, ‘칭의’ 다음에 있다는 ‘성화’의 단계가 항상 부차적인 것, ‘이루면 좋지만 못 이루어도 뭐 나의 구원에는 큰 지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의’ 뒤에 ‘성화’의 단계가 있다는 식으로 구원론을 전개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칭의’나 ‘성화’ 둘 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삶으로써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며 (‘칭의’), 세상의 오염을 피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성화’)를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각각 그 자체 내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에서 얻을 ‘무죄선언/의인이라 칭함 받음’을 지레 받음이라는 법정적 뜻과 그것이 함축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이라는 관계론적 뜻을 둘 다 중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주심을 덕입어 사는 그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가족’의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더 포괄적으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 아래로 이전되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통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칭의’는 ‘주권의 전이’ (Lordship-transfer) 인 것입니다 (골 1:13-14).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된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속’ 받아 만유 위에 대행하는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 (통치)’는 현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의 나라 (통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우리의 심장으로 고백하고 ‘예수가 주이시다’고 입으로 부르짖음으로써,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롬 10:9-10). 이것이 ‘칭의’입니다.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하는 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꺾은 주 예수의 도움을 청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권 (통치)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된 자는, 즉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된 자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로 들어간 자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즉 더 이상 세상을 좇지 않고 (즉 이 세상(대)를 통치하는 사단에 순종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론’은 이렇게 구조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윤리적 요구를 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칭의론’을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됨’으로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 않는, 아니 윤리적 삶을 방해하는 거짓 ‘칭의론’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싸구려 은혜’ 로,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구원파의 ‘복음’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두란노를 통하여 출판한 책, ‘칭의와 성화’에서 칭의론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의 부패의 가장 근본 원인은 그들이 바울의 칭의론의 복음을 의로운 삶이 없는 구원파적 구원론으로 왜곡하여 선포하여 온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여러 목사들의 왜곡된 ‘복음’이 결국 기독교로 하여금 ‘개독교’로 욕먹게 하고 전도의 문을 닫는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나요?


성경은 두 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계속 등을 돌리고 죄를 지으면 구원의 완성을 받지 못하고 탈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려 계속 은혜를 베푸십니다: 목사의 설교나 아침에 묵상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선생이나 친구의 조언을 통해서도, 사회의 법이나 예술 작품 등을 통해서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상기시키며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행하라고 요구하시고 그 선한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믿음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히 지키십니다.
 

 

 

▲ 김세윤 교수 저 <칭의와 성화>

그러나 또한 성경은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등을 돌리고 계속 사단의 종노릇을 하면서 타락의 길을 가면 되돌아 올 수 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출애굽하여 구원의 첫 열매를 얻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면서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결국 다 죽은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이 우리를 향한 경고의 예라고 말하고 있죠. 비슷한 경고가 우리 신약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파는 차치하고, 정통이라는 교회들에서도 그런 본문들은 무시하고, 롬 8장 3-39 절 같은 본문들만 일방적으로 강조되니, 성도들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 하지 않고 쉽게 죄를 짓는 삶을 하도록 오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견인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끝까지 지켜주심)과 타/탈락에 대한 경고, 성경의 이 두 개의 상반된 가르침들을 어느 쪽도 약화시키지 않고 상호 논리적 긴장을 의식하는 가운데 함께 견지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입니다.

-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바울의 ‘정치신학’을 통해 바라본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를 평해주신다면.


바울의 정치신학은 아주 변증법적입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이 사단의 통치의 매체가 되어서 민족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고 압제하는 사악함, 문화적인 타락, 황제숭배 등을 조장함과 같은 것에 대해선 분명 비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제국을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고 인정했죠. 로마제국은 당시 지중해 세계에 (무력에 의한 것이었기는 하였지만) 하나의 통일된 평화의 세계를 확보했고, 고대사회로서는 가장 발전된 정의로운 법 집행, 유능한 행정체계를 갖추었는데, 그것이 바울의 세계선교의 한 물리적 조건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이러한 면을 인정하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란이나 조세 저항에 참여하지 말고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순종하고 세금을 내라고 일렀죠. 그게 로마서 13장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노예제에 대해서 그것의 사악함을 아주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제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노예도 없고 자유자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너희는 모두 하나다” (갈 3:28) 는 위대한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칭의론의 사회적 함축의미를 드러낸 이 선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세계 속에서는 이 타락한 세상의 불평등과 불의를 낳는 전형적인 구분들, 인종적 구분, 신분적 구분, 성적 구분이 해소됨을 설파하는 것입니다. 모두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바울이 이 선언에 따라 부부관계도 새롭게 정립하고, 자유자와 노예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합니다. 사실 갈 3:28과 같은 본문들, 그리고 빌레몬에게 그의 노예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더 이상 그를 노예로가 아니라 형제로 받으라고 당부함 등은 실질적으로는 노예해방을 부르짖은 셈입니다. 혁명적 발언들이지요.

바울은 그렇다고 ‘노예제를 철폐하라’고 공개적으로 부르짖거나, 억압받고 수탈되는 민족들을 해방하기 위해 정치적 투쟁을 벌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정복과 수탈, 황제숭배와 도덕적 타락을 조장하는 로마제국을 사단의 화신으로 보고,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를 군대 (144,000)로 삼아 그것에 대해 성전 (聖戰) 을 전개하여 승리한다는 식으로, 즉 요한계시록 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미국의 Bush 정권의 제국주의적 경향에 대항하여 일부 미국의 신약학자들이 바울을 2천 년 전에 미리 나타난 맑시스트 혁명가로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그 유행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만.

앞서 예를 든 대로 만민의 인권의식과 사회 정의를 복음의 근본적 함축의미로 철저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바울이 실제로 정치적 혁명이나 사회 개혁 운동을 하지는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의인’들이 되어, 즉 주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 인종차별, 신분적 차별, 성적 차별 등의 불의를 극복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그리하여 진정한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는데 집중한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제가 제 책 “그리스도와 가이사”에서 그들을 조금 설명하였습니다만, 바울이 로마제국에 대해 변증법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보았으며, 그의 종말론 (특히 임박한 종말론), 당시 교회가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무의미할 정도로 미미한 새 싹에 불과했다는 사실 등을 꼽을 수 있겠지요.

바울이 정치, 사회적 혁명이나 개혁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데서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오늘 교회가 인권증진, 정의와 평화 실현 등을 위해서 정치, 사회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교회는 오로지 ‘구령사업’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주 좁은 의미로의 전도와 선교에만 집중합니다. 아주 무식한 목사들이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고 (영혼이) 천당 가는 일’에만 관심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대행하는, 온 세상에 걸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에 대해서는 의식이 없고, 복음의 사회적, 문화적 함축의미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예수와 바울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일차적으로 교회 내에서 거룩성, 사랑, 정의, 화평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세상의 구원의 도구 또는 일꾼 (‘소금과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나 한국 내에서나 더 이상 미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상당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도 한국과 세계 도처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종말론적인 완성의 약속과 함께 현재 만인의 인권증진과 정의와 평화로 실현되어가도록 주의 일꾼 (또는 군사) 노릇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보수주의자’ (복음과 올바른 신앙을 ‘보수’한다는 자?) 라 자처하는 자들이 인권과 정의와 평화를 등한시하거나 심지어 짓밟는 권력이나 금력에 아부하며 그들의 불의와 부정의 덕을 보려 하는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는 곳이 오늘의 한국 사회와 교계 아닙니까?

-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그들을 따라 잡고 싶어하는 많은 목사들이 여전히 기복적 설교를 남발하고 있고, 이러한 설교가 한인교민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인데…


그게 비극입니다. 그런 맘몬적 복음, 왜곡된 복음, 바알 숭배의 복음을 선포해야 사람들이 몰려들고 교회가 대형 교회로 성장하게 되는 것은 70-80년대의 한국에서의 체험인데, 불행하게도 그것이 지금도 한국에서도 그리고 여기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현상이죠.

교인들이 지금까지 제대로 된 복음을 배우지 못하고 거짓 복음으로 오도되어 온 결과, 목사가 ‘예수 믿으면 건강과 부를 얻고 출세한다’는 설교를 해야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그런 설교를 하는 교회들로 몰려듭니다.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교회성장과 선교를 빙자해서 더 많이 헌금하고 더 많이 봉사하라 하면서, 그렇게 하면 더 많이 복 받는다고 부추기는 데, 이렇게 해서 이른바 ‘교회성장’을 도모하고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한국, 한인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한국의 여러 대형 교회들에는 다수의 ‘지성인’들이 출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마저도 그런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설교들을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며 그런 교회들의 충직한 일꾼 노릇을 한다니,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단’이 뭡니까? 거짓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이단이죠. 구약으로 보면 ‘거짓 선지자’고, 교회사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이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거짓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요 ‘이단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오도하는 행위는 그 폐해가 어느 범죄 행위 보다 더 커서, 신명기 법은 거짓 선지자를 최고형으로 다스리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과 부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음에까지 충성한 예수와 바울이 하나님의 복을 제일 많이 받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더 오래 건강하고 풍요롭게 살았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고난만 엄청나게 받다가 처참히 죽었으니,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을 잘 못 믿은 모양이지요? 
 

 

 

▲ 제자들과 함께하는 김세윤 교수 ⓒ 사진제공 김세윤 교수


“학자로서 잃어버린 12년”


- 교수님은 밥솥 하나만 들고 산에 들어가면 책과 연구에 파묻혀 평생 내려오지 않을 분이라고 하던데....


 (웃음) 전 그러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만 살지 않도록, 못하도록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학문적 은사를 조금 주셔서, 저는 연구와 저술, 그리고 가르치는 일에만 집중하기를 염원했는데, 그러지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들 중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저의 개인적인 한계성이었겠지요. 그러나 갈등이 많고 격동하는 한국이라는 사회의 한계성, 아직도 체 성숙하지 못한 한국 교회의 여건도 작용했죠. 전 안정된 유럽과 미국의 학계에서 동료들이 연구와 저술과 교수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을 보면서 늘 부러워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도합 12년 이상을 가르쳤지만,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어요. 그 시기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광야의 시기였습니다. 한국 교회를 많이 배우게 된 소득은 있었지만, 학자로서는 저의 황금기를 한국에서 잃었습니다. 그게 한국의 신학자로서의 저의 숙명이었죠. 학교들이 지연, 학연이 없으면 발을 붙이기 어렵고, 학교가 개인의 사물화 또는 개인 왕국이 되어버리거나 교단 정치꾼들의 노리개가 되고, 그들의 비리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소요가 끊이지 않아, 차분히 앉아 연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실하고 비리로 얼룩진 학교들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는 불쌍한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주는 월급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양심의 문제로 여겨질 때도 많았습니다.

- 교수님은 이곳에선 ‘복음주의 신학자’로 인식되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매우 ‘자유주의적 학자’로 평가되고 있는데…


구미의 스펙트럼으로 봤을 때 한국의 보수 신학교들은 그저 ‘근본주의’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학교들의 입장에서는 저 같은 사람을 ‘자유주의자’라 보겠지요. 어쩌다가 그런 학교들에서 가르치다 보니, 저를 뒷조사하고, 정치꾼들이 위협하고, 일부 동료들은 그걸 이용해서 자기들 자리 차지하려고 내부정치에 활용하고. 이런 역겨운 모습이 많아서 한국에서 신학자로서 살아간다는 게 어려웠죠.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다지만, 지금도 여러 후배들, 이제는 스스로 교수가 된 여러 제자들이 제가 겪은 경험들을 반복해서 겪는 것을 보면 아주 안타깝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그런 세월을 12년 이상을 지내고, 오십이 다되어 미국에 와서 새로운 적응기의 어려움을 지나 다시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 잃어버린 세월을 극복하며 연구에 매진하려 하니까, 30-40 년 전 나와 함께 성경 연구를 시작했던 내 또래의 서양 학자들, 지금은 나보다 훨씬 앞서 가 있는 동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미국 출판사들과 세 개의 책들을 계약하였는데, 우선 그들을 완성해야 하겠지요. 그러고도 주의 은혜로 기력이 남는다면, 나의 인자론에 관한 옛 책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바울 신학의 대가-김세윤 박사는 이 표현을 극구 반대했지만, 기자가 독단적으로 썼다-이신 교수님에게 도대체 바울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정신을 놀랍게 신실히 이어받아 세계 선교에 창조적으로 새롭게 표현한,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온 세계에 선포하고 실현되게 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종이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김세윤 교수와의 인터뷰는 학자로서의 그의 학문과 인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엿보는 듯한 즐거움과 감동이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바울을 공부하면 할수록 바울의 복음은 예수의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양재영 기자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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