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의 문제점: 새로운 계시 운동의 위험성 / 김영한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2014.05.12.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
머리말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서신에서 예수께서 에베소교회에게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를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계 2:3)을 칭찬하셨다. 자칭 사도라는 것은 초대교회부터 있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적 신앙에 굳게 서서 자칭 사도 행세를 하는 사이비와 거짓 사도들을 드러내어 교회의 순결성을 지켰다. 구약 정경 예언자의 예언이나 신약의 사도적 계시는 유일회적이며, 정경이 완성된 후에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다. 따라서 2천년에 피터 와그너(Peter Wagner)가 주축이 되어 일어난 “신사도운동”은 초대교회 때 일어난 혼란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사도”란 용어는 개혁주의 전통을 지닌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 안에서는 심각한 논란과 거부반응을 야기하고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결코 자신들이 사도적 계시와 권위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사도적 가르침과 권위로 되돌아 가자고 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사도”라고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로 되돌아간다고 했을 때 자신들의 권위가 초대교회 사도들의 권위와 같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적 가르침과 권위, 즉 성경의 권위 아래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권위를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과 권위의 기준 아래 비추어, 중세교회의 변질된 교리와 예전과 조직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은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필자는 신사도운동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 먼저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1. 사도성 주장은 새로운 계시 운동 우려
개혁교회는 오늘날 사도적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경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지속적 역사를 인정하는 오순절 교단인 하나님의성회조차도 오늘날 사도와 예언자의 명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와그너는 사도를 신약성경의 패턴에 따라서 인정한다. “그리스도 안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in Christ, COGIC) 감독 칼리스 무디(Carlis Moody)의 사도 이해에 동의한다.
“예. 오늘날에도 교회에는 사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영적인 지도력을 나타내고 사단의 권세들을 대면할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아, 표적과 기사로 복음을 확증하고, 신약성경 패턴과 사도들이 교리에 따라 교회들을 세움으로써 그렇습니다.”(Carlis L. Moody, World Pentecost (Autumn, 1996), 18; 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34.)
와그너가 주장하는 사도성(apostleship) 주장은 신학적 문제를 야기하고 심각한 영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신사도운동의 이러한 주장은 자칫하면 오늘날에도 새로운 계시가 가능할 수 있으며, 초대교회의 사도적 계시가 오늘날에도 가능할 수 있다는 열광주의 계시운동이 될 위험성이 있다. 와그너는 1999년에 미국 콜로라도 주의 도시 콜로라도 스프링스(Colorado Springs)에서 2,500명의 소위 예언자들과 예비 예언자들을 모아 전국 예언자 학교(the National School of the Prophets)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자신이 이 집단의 사도로서 의장직을 감당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개혁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예언자는 하나님이 임명하시고 세우시는 것이지 사람이 임명하고 세울 수 없으며 배출할 수 없다. 지금은 성경이 제정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는 자들이 필요시되었던 구약이나 신약시대가 아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은 한 개인이나 인위적인 단체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세우셨다. 신사도운동이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같은 권위와 질의 치유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될 때,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초대교회로의 되돌아감” 이상으로 새로운 계시운동으로 변질될 우려성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와그너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진지하게 수용한다. “시발점은 신학적인 지주들이 굳게 세워진 개신교 종교개혁, 즉 성경의 권위, 이신칭의, 만인제사장직이다. 또 웨슬리 운동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성결의 필요성을 도입하였다.”(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36.)
그러나 와그너가 신사도운동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교회성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21세기의 성령운동은, 종교개혁적 전통에서 멀어져 열광적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 성결 오순절운동은 다양한 능력 사역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첨가하였다. 1970년에는 중보기도자 직분, 1980년대에는 예언자 직분, 1990년대에는 마지막 직분인 사도은사와 직분을 인정하는 것이다.”(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36.).
여기서 신사도운동은 자기들이 임명한 “중보기도자”가 우리의 유일의 중보자요 중보기도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을 대체한다거나, 자기들이 인정하는 “예언자”가 성경과 동등한 새로운 계시를 말한다거나, 자기들이 인정한 “사도 직분”이 초대교회 사도직과 동등하다거나 심지어 능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성령운동은 1세기의 몬타니즘(Montanism) 운동처럼 열광적으로 나아갈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개혁주의 견해에 의하면 사도 시대의 이적과 기사들(τε τέρατα καὶ σημεία)은 사도들을 통해 주시는 계시를 확증해 주는 사도적 이적(apostolic miracles)인데 비해서, 오늘날 이적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사도적 이적과 같이 계시를 확증해 주며 선포의 내용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와그너는 그의 저서 『통치』에서 요한복음 14장 12절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혹은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동일한 일을 하거나 혹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도 예수님과 동일한 능력의 근원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C. Peter Wagner, Dominion, Ventura, CA: Regal Books, 2008, 서종대 역, Dominion, 과천: WLI Korea, 2007, 130 그리고 Peter Wagner, 『제3의 바람』, 120.).
그러나 개혁주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더라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될 수 없으며, 우리의 능력이 예수님의 능력과 동일시되거나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어느 누구도 예수님보다 더 큰 권능을 행한 자가 없었다. 와그너는 자칫 열광주의와 자신 신격화에 빠질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2. 교회 권위가 목회자 개인에게 옮겨감
신사도운동은 교회, 즉 목사직의 권위보다는 목사 개인의 권위에 더 비중을 둔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목회자 개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으로 본다. 이렇게 되면 공교회가 갖는 사도적 권위가 목회자 개인에게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자의 공동체인 공(公)교회 개념은 약화된다. 거기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지는 권위는 목회자 개인에게 옮겨가게 된다. 와그너는 “오늘날 세계적인 초대형교회를 이룬 목회자 개인이 사도적 권위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종교개혁적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로서 교회의 개념이 주관적으로 변모되고 탈공동체적으로 카리스마를 가진 개인 사역자 목사에게 이전된다는 것이다. 거기다 와그너는 사도로 지명되는 기준을 윌로우크릭교회처럼 초대형교회를 인도하는 목사들(릭 워렌, 빌 하이벨스 등)(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9.)로 보고 있다. 이것은 그가 사도성의 척도를 신학적 교리적 건전성과 도덕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교회의 외적 크기(신자수, 재정 규모, 서업 등)에 두는 것으로,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다.
교회사를 보면 도나티스트 논쟁(Donatist controversy)에 있어서 신앙박해 시, 변절한 목사에게 받은 세례는 무효인가라는 논쟁이 있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공교회는 배교(背敎)한 목사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권위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공교회가 부여한 직책인 목사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어느 개인 목사가 준 세례는 그의 변절(變節) 때문에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사도적 가르침과 성경적 권위는 전승되어 있으나, 사도적 직함이나 심지어 초대교회 사도를 대체할 수 있는 개인적 권위나 성경을 능가하는 새로운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적 가르침이 쓰인 성경이 우리들에게 사도적 권위로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사도운동이 말하는 신사도직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3. 카리스마의 제도화와 네트위크(친목회)를 통한 배양에 의한 사도의 양적 증대
신사도운동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카리스마의 제도화를 거쳐서 신사도교단을 형성하고, 이 교단은 사도 네트워크(Apostolic network) 안에서 각 사도들이 카리스마를 배양한다면 더 많은 사도들을 배출시킬 수 있다고 본다.
“사도들이 카리스마를 자기 자신의 네트워크 안에서 계속 배양한다면 불가피하게 더 많은 사도들이 나올 것이다.” “이 책에서 묘사해 온 유형의 사도들은 많은 교회들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감독하는 사도이다.”(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79.).
여기서 신사도교회가 말하는 사도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하기보다는 많은 사도의 네트워크들을 관리하는 초대형 목회자들(목자장, 총회장 등)을 말한다. 이들은 신사도 네트워크 안에서 인위적으로 인정을 받아 세워진 자들로서, 신약시대 사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와그너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사도개념을 떠나서 교회사회학적인 사도 개념으로 이탈하고 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사도 개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Apostolos, αποστολος)이다. 교회가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보내신 자이다. 그런데 와그너는 사도들은 사도 네트워크를 통하여 카리스마를 배양하여 많은 사도들을 거닐 수 있을 때 “감독 사도”(존 켈리, 척 스미스, 존 윔버 등)(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51, 183.)가 된다고 말한다. 와그너 자신은 이들 사도들을 임명한 “사도 총수”(總帥)가 된다. 이것은 자기가 카리스마를 배양하여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것으로서 매우 인간학적인 방법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도는 신약성경의 바울적인 사도 개념과는 다르다. 그리고 이런 사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소종파 교주들처럼 새로운 권위의 경전(몰르몬경, 원리강론 등)을 만들게 될 때, 기독교는 재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로 변질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오늘날 목사와 교사와 장로와 집사 등은 항존직으로 인정되나 사도직과 선지자직은 인정되지 않는다. 사도 직위는 성경을 정립하는 권위이기 때문이요, 정경이 성립한 후에 더 이상 또 다른 정경 제정의 권위는 필요 없다. 와그너처럼 오늘날 “사도직”을 말하는 것은 전통적인 교회의 질서에 많은 혼란을 가져다 주는 시도이다. 사도 바울은 선언하였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4. 찬양 경배, 쓰러짐 등 체험에 치우쳐 말씀 선포 등한시
신사도교회에서 드리는 공적 예배는 대중적인 공연과 혼동되고 있다. 예배 시 박수를 자주 보내는 것은, 사람이 중심이 되며 설교자나 간증자가 우상화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공연 성격의 예배 스타일이 칼빈이 말하는 바 외경의 태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잘 음미해 보아야 할 일이다. 아무리 예배의 스타일을 구도자(求道者)의 눈높이로 낮춘다고 하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는 경건성의 표현과 기본적인 예배 순서가 있어야 한다. 주일 대예배만큼은 전통적인 예배 순서에 따라서 정장(正裝)을 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인격적인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신사도교회 예배에서 찬양 시간을 너무 길게 잡는 것은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찬양 경배 시간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말씀의 강론 시간이 짧아지는 것은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교회 예배가 너무 예전(禮典)과 의식(儀式)에 치우치는 것도 문제가 있으나, 신사도 예배처럼 너무 감성에 치우는 것도 문제가 있다. 찬양과 말씀 선포가 적절히 배합하여, 신자들이 감성과 이성이 균형잡힌 태도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신사도운동이 쓰러짐 등 체험 위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신사도운동 전도자 베니 힌(Benny Hinn)은 1996년 그의 집회에서 초기 오순절운동의 여성 사역자 마리아 우드워드 에터(Maria Woodworth Etter, 1844-1921)의 집회에서 쓰러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Benny Hinn, Praise the Lord Programm, Trinity Broadcasting Network, 1996.6.20. 오디오 테이프).
“한 나이 든 자매가 푹 쓰러지더니 몸이 차가워지면서 경직되었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 같았습니다. 맥박이 뛰는 것만 제외하고는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매를 강대상 소파에 눕혔습니다. 그날 내내 자매는 그곳에 누워 있었고, 저녁집회 때도 두 명의 여자가 같은 방식으로 쓰러졌습니다.”(Maria Woodworth-Etter, Diary of Signs and Wonders (Tulsa, Okla.: Harrison House, 1919, 48.) “복도 쪽에 있는 남자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쓰러졌습니다… 제가 뒤로 조금 물러나자 연단에 있던 목회자들 중에서 한 명이, 그 교회 담임목사였는데, 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쓰러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죄인들에게 엄습했습니다. 목회자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이제 피할 곳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Maria Woodworth-Etter, Diary of Signs and Wonders, 66.)
1994년 빈야드운동이 캐나다로 가서 토론토공항교회에서 일어난 토론토블레싱운동의 경우, 교인수의 절반 이상은 첫 교회 방문 시 감각적으로 보고 느끼는 기사와 표적에 단번에 매혹되어 회원들이 됐다. 이러한 결신(結信)은 초대교회나 뉴잉글랜드의 노스햄프턴교회에서 일어난, 말씀에 찔림을 받아 통회 자복하고 회심에 이른 결신(結信)과는 너무나 다르다.
이러한 쓰러짐의 현상은 서인도 제도에서 기인했으며, 미국 남부의 주술종교인 부두교(Voodooism)나 퀘이커 종교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복음 전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우드워드 에터는 1920년 네브래스카에서 몰몬교도들이 설교를 해달라고 초청했을 때 그에 응하여 설교했으며, 거기서 몰몬교도들을 회심시켰다는 보도는 없다[Stanley M. Burges and Gary B. McGee, eds., Dictionary of Pentecost and Charismatic Movement, (Grand Rapids, Mich.: Zondervan, 1988, 900.]. 기독교적 복음 전파는 외부적인 영적 현상의 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의 선포요 복음을 받는 자들의 내면적인 회심과 인격의 변화로서 행해진다. 초대교회 시(時) 있었던 베드로의 복음 선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39).
복음 전파와 예배 시에는 어떤 신비로운 종교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속의 죽으심, 회개와 죄 사함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5. 공격적 전도는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신사도교회가 가난한 자, 버림을 받은 자, 노숙자, 불우한 자, 장애인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이들에 대한 구제와 도움의 실천을 하는 행위는 매우 바람직한 선교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세력에 대한 공격적 전도는 한국에서는 봉은사 경내에 “땅밟기 전도”라는 형태로 사용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는 영적 대결(spiritual warfare), 능력 대결(power confrontation) 사상(Peter Wagner, “The New Apostolic Reformation,” 25; John Wimber, Power Evangelism, 이재범 역, 『능력전도』, 서울; 나단, 1991)에서 나온 것으로, 신사도운동가들이 지역의 영들을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 권능으로 묶어 내쫓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능력 대결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어느 집단의 흑암 세력을 묶어 내는 축사(逐邪) 시에는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어느 특정 종교의 경내에 들어가서 그 지역의 영들을 묶어서 쫓아내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타종교가 하나의 사회적 제도 종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고 참 종교와 타종교가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타종교는 하나님이 그의 때에 또는 최후의 심판 시에 판결하실 것이다. 그 이전에는 우리는 타종교와의 공존이라는 사회적인 덕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선교를 해야 한다.
6. 초자연적 일을 지나치게 부각
신사도운동은 성령 사역의 “초자연적 측면, 치유, 귀신 축출, 영적 전투, 예언, 성령의 역사로 쓰러짐, 영적 지역조사(영적 매핑, 도해)” 등을 지나치게 부각시킨다(Peter Wagner, “The New Apostolic Reformation,” 25.). 그리하여 구제와 나눔, 불우한 자들에 대한 긍휼, 중보기도 등을 제외하곤 성령의 윤리적 열매에 대하여는 크게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성령의 역사로 쓰러짐, 영적 지역조사” 등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으로 논쟁의 거리가 될 수 있다(신사도운동에 대한 세이연 연구보고서, http://www.cckpc.org/zbxe/236897, 2013.03.18. 06:16:40). 그리고 “예언활동” 등을 말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초대교회 정경과 같은 권위의 예언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게 될 때, 이것은 신약정경의 기준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면 신약의 사도를 대체할 수 있는 신사도, 오늘날의 사도적 사역과 권위를 강조하게 되어, 기독교 전통에서 이탈하는 영적 교만과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는 경향을 배제할 수 없다.
맺음말
신사도운동이 오늘날 영적으로 쇠잔해진 21세기 미국과 유럽교회에 성령의 새 바람을 불어넣는 건전한 교회갱신운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신사도적”이라는 말을 오해받지 않게 새롭게 고치거나 정의하고, “사도 직분” “중보기도자” “예언” “계시” “집회 중에 집단적으로 쓰러짐” “영적 지역조사”(영적 매핑, 도해) 등에 대하여 열광주의적 오해를 받을 많은 소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적 신앙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는 것이지, 쓰러지고 황홀경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에 일어나는 예언이나 계시는 오늘날 공교회에 주어진 66권의 신구약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만 매우 조심스레 사용해야 한다. 오늘날 사도 직분은 없다. 와그너가 인위적으로 만든 “사도 회의”라는 것은 또 하나의 종교회의가 되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은 하나님 말씀으로 되돌아 와서 스스로 영적 오만과 기존 교회에 대한 자기의 영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겸허하게 자신의 열광주의적 태도를 반성하고 겸허한 태도로 가르침을 받고 수정받고 섬기는 것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