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예수가 버린 기적·신비현상에 집착”
박정근 목사, 침신목회연구원 영성수련회 강연서 비판
미주 크리스천투데이(2014/03/26) 보도문
예수가 대한민국에 나타났다. 그가 63빌딩으로 갔다. 뛰어내린다고 했다. KBS, MBC 등 방송 3사와 메이저 신문사들이 다 몰려왔다. 취재 경쟁이 무르익을 때 그가 뛰어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급속도로 떨어지다가 3층 높이 쯤이었다. 하얀 날개를 단 천사 둘이 나타나 예수의 팔에 손을 꼈다.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예수는 63빌딩 꼭대기에서 아스팔트로, 마치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처럼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놀라운 기적과 신비적 현상을 보이고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준 그 예수가 여의도에 교회를 개척했다. 과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박정근 목사(부산 영안침례교회)가 2014년 3월 24일 침례신학교 목회연구원의 강사로 나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가 예화로 ‘63빌딩에서 뛰어내린 예수’ 얘기를 건넸다. 이 예화 하나에 그가 생각하는 목회의 본질, 한국교회의 현실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박 목사가 보는 한국교회는 ‘예수가 버린 것’에 집착하고 있다. 예수는 사탄의 시험을 통해 권력·기적·신비를 쟁취하거나 보여주는 것을 모두 거부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가장 추구하는 게 이 3가지라는 것이다. 특히 목회가 잘 되지 않을 때 이 3가지에 기웃 거린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말씀을 죽어라고 가르쳤더니 기도원 가서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원장을 만나서 휙 돌변하는 게 성도들이다”며 “목회자들도 신비적 현상에 수많은 성도들이 몰려드는 걸 보고 여기에 휘둘리다보면 양복 입은 무당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 글은 그의 2시간에 걸친 강연을 요약한 것이다.
박정근 목사는 침례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1985년 도미하여 10년간 달라스신학교에서 성서강해를 전공하였다(Th.M., Ph.D. 과정수료). 1995년 귀국하여 부산 영안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버티신학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있으며 목회자들에게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복음의 자유를 누려라」(갈라디아서 강해), 「그리스도인의 대헌장」(산상수훈 강해), 「최고의 선물, 그리스도의 복음」(로마서 강해) 등이 있다.
신학생들을 보면 처음 드는 생각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목회자 세미나에서 목사들 보면서 드는 첫 마음이기도 하다. 목회환경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거기에 맞춰 앞으로 목회할 후학들을 생각하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정말 신학생들이 불쌍하다. 포스트모던 시대다.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 우리가 시대를 읽는 목사로서 살아야 한다. 시대를 읽지 못한 목회자들이 애꿎은 자기 열심으로 아내의 인생까지 망친다.
우리가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자로서의 시대를 읽어야 한다. 이제 시대는 보편적인 진리를 부정한다. 예전에는 ‘진리’하면 꺼뻑 죽었다. 진리가 ‘내가 좋아하고 재미있고 유익하고 필요하면 진리다’라는 개념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나’, 곧 ‘나의 유익’이 가장 중요한 진리가 된 세상이다. 예전엔 나보다 가정, 가치를 중요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틀리면 가정을 버리기도 한다. 교회도 조금만 맘에 안 들면 바꾸고 떠난다. 목회를 준비하는 여러분에게 진리는 뭔가? 평생을 걸고 살 진리는 뭔가? 목회? 그건 너무 광범위하다. ‘죽을 때조차 웃을 수 있는 그런 진리를 갖고 있는가?’ 묻고 싶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추구하는 것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정성과 기적’을 바란다. 내가 정성을 다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는 신앙을 갖고 있다. 교역자들에게도 이 생각이 크다. 그러나 정성과 기적은 거의 모든 종교의 특징이다. 지성이면 감천식의 신앙에서 중요한 건 신의 뜻이 아니다. 돼지 머리 놓고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신의 뜻을 중요시하는가? 정화수 떠 놓고 비는 사람이 ‘당신의 뜻과 그의 나라’를 구하는가? 그들이 원하는 건 내 정성을 다하면 신이 감동해 내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요구다. 새 차를 뽑으면 고사를 지낸다. 이것도 같은 뜻이 숨어 있다. ‘내 차에 사고가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정성을 드리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솔직하게 교회를 바라보자. 한국교회의 저변에 흐르는 종교성도 샤머니즘이다. 우리 민족 모두의 피에는 샤머니즘의 피가 흐르고 있다. 종교는 내세적이고 철학적 요소가 있는데 샤머니즘은 내세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않다. 샤머니즘은 완벽하게 현세적이다. 샤머니즘의 특징은 친화적이고 강인하다는 점이다. 고려 시대, 샤머니즘과 불교가 섞였다. 샤머니즘은 불교와 싸우지 않았다. 대신에 불교를 샤머니즘화 시켰다. 불교는 자신이 깨달은 부처가 되는 것이 본질이다. 갓바위에서 기적을 바라며 비는 것은 불교와 무관하다.
유교가 국가 종교가 되자 샤머니즘은 유교와 융화됐다. 유교의 제사의 본 뜻은 사자의 유지를 받들고 형제가 우애하는 데 있다. 그러나 샤머니즘과 유교가 합쳐지자 사자의 묘자리의 각도가 15도여야 하느냐, 아니냐 때문에 유족들이 싸운다. 묘자리를 잘 쓰려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 나와 내 자손이 복 받기 위해서다. 제사상을 잘 차리는 목적이 뭔가? 조상신이 와서 내 가정에 복을 주니 차린다는 의미다. 겉은 유교인데 속은 완전히 샤먼화돼 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샤먼이 기독교에 무릎을 꿇었을까? 오늘날 교회를 보면서 솔직하게 신학생들이 답해야 한다. 기독교 인구를 최대 600만이라고 보자. 곧 400만으로 격감할 수 있다. 더 무서운 것은 400만의 반수 이상은 65세 노인들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앞에 펼쳐질 시대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곤두박칠 치고 있다. 외형은 교회인데 진정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 아닌가?
도스트 예프스키의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을 보면 대심문관이 예수를 처단하면서 죄명을 ‘권력·이적·신비’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행히 당신이 버린 것을 우리는 버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들은 목회가 잘 안되면 예수님이 버리신 이 3가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간다. 사탄은 속삭인다. “예수여, 뭐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시는가? 이거 한방이면 모든 대중들이 당신에게 몰릴 거요. 이 쉬운 길이 있잖소. 이 길을 가시오.”라고 제시했다. 그게 권력, 기적, 신비였다.
예수가 대한민국에 나타났다. 가장 높은 빌딩 63빌딩으로 갔다. 뛰어내린다고 했다. 방송 3사에 메이저 신문사들이 다 몰려왔다. 취재 경쟁이 무르익을 때 그가 뛰어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급속도로 떨어지다가 3층 높이 쯤에서였다. 하얀 날개를 단 천사 둘이 나타나 예수의 팔에 손을 꼈다.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예수는 63빌딩에서 마치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처럼 사뿐하게 땅에 내려앉았다. 그 예수가 여의도에 교회를 개척했다. 과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신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신비적 현상에 수많은 성도들이 몰려 들 수도 있다. 내게도 교인들이 몰려와서 묻는다. ‘사업을 할까요, 말까요?’ 이 현실에 휘둘려 목사들이 양복 입은 무당이 될 수 있다. 무당이 별건가? 하나님과 인간의 매개인으로 나서는 게 무당 아닌가? 목사가 하나님과 교인 사이를 가로막고 매개체로 자리하려고 한다. 성도들에게 말씀을 충실히 가르치면 기어오른다. 그래서 신비한 영성으로 확 찍어 눌러 버리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이 욕망을 목회자들이 버려야 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싫어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그게 심성이다. 말씀을 죽어라고 가르쳤더니 기도원 가서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원장을 만나서 휙 돌변하는 게 성도들이다. 내가 보기엔 기도원 원장이 사기 치는 게 보이는 데도 성도들이 빠져간다. 내가 목회하면서 제일 조심하려는 게 그거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매개체, 중보자 역할을 하는 모습이다. 성도들의 영혼을 움켜쥘 만한 카리스마가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포기한 것을 내가 왜 해야 하느냐는 자기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포기한 권력과 기적과 신비를 내세워 숫자를 불리면 사람들은 ‘목회를 잘했다’고 칭찬한다. 이것이 두렵고 싫어서 나는 비서를 없앴다. 부산역에 차를 대 놓고 기차타고 서울역에 와서 택시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바쁠 때는 차안에서 묵상도 하고 쉬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도 이런 어려움을 고집하는 것은 목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때문이다.
계시와 진리가 기독교의 본질
신학생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공부하는가? 기독교의 본질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정성·기적·권력·신비가 아니라 계시와 진리가 기독교의 본질이다. 내가 한국에 와서 기도원에 갔다. 북 치고 장구치고 난리를 쳤다. 교회 집사에게 말했다. “집사님, 부산에 조용한 기도원은 없습니까?” “목사님 없어요!” 이렇게 말한 집사가 나를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목사님, 조용한 데가 한 곳 있는데 ‘합천 해인사’입니다.” 목사에게 해인사를 소개하다니 참 별난 집사였다.
별난 집사의 말을 듣고 나는 해인사로 갔다. 모든 곳이 주님의 집인데, 내가 못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승려를 만났다. 기도를 하러 왔다고 말했더니 승려가 ‘어떤 기도를 하시려구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계속되는 승려의 말을 듣고 더욱 놀랐다. 해인사 기도의 종류에 새벽/철야/40일 작정/ 서원 기도가 있다는 것이다. 해인사 법문을 듣고 사람들이 변화됐다는 각종 간증(?)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불치병 환자가 나았다는 체험도 있었다. 아이를 못 가진 부부가 임신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혼 위기의 가정이 회복됐다는 체험 등 교회 안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모든 간증이 가득했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와 설교와 간증의 스토리가 있다. 그들의 간증과 우리의 기도와 설교와 간증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진짜 하나님을 믿으니 진짜 기적이고, 그들은 가짜인가?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계시의 말씀으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이는 8년을 해인사에서 장좌와불(長坐不臥)하며 수행한 성철도 깨닫지 못한 진리다. 이 진리를 예수를 통해 열어 보이셨다. 이 진리를 전파하라는 게 목사에게 주신 사명이다. 당신은 말씀을 전파할 준비가 됐는가? 나는 목회자 세미나 후 목사들이 성경을 너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울었다. 나 또한 달라스신학교에서 10년 동안 성서강해를 공부한 후 ‘내가 이토록 성경에 무식하다니’라는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옥한흠 목사님 살아 계실 때 그분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분 사모님과 함께 계실 때 내가 질문했다. “목사님, 주일 예배 설교를 위해 몇 시간 준비를 하십니까?” 보통 목회자 중에 걸어 다니면서 묵상하는 시간까지 다 포함해서 설교 준비 시간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정리해서 물었다. “정말 책상에 앉아서 설교 준비하는 시간 말입니다.” 옥 목사님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일 설교에 30시간 이하를 준비한 적이 없습니다”고 답했다.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였다. 30시간 준비한 설교가 어찌 능력이 없었겠는가? 설교 준비에 그토록 진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옥 목사님 그렇게 일찍 돌아가지 않으실 분이다. 그토록 건강하셨다.
목사가 뭔가?(이 말을 하며 박정근 목사는 깊은 한숨을 지었다). 우리 형님 3명이 모두 목사가 됐다. 둘째 형님은 정말 진실하고 인품이 좋았다. 구약학을 전공해서 교수 생활도 했다. 그런데 목회를 했는데 정말 안됐다. 나이 60에 간경화를 얻었다. 그런 분이 어느 날 중국을 가신다고 했다. 놀라서 찾아갔더니 이미 교회도 다 처분하고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형님은 ‘우리 가문이 목회자 수십명을 배출했는데 선교사는 한명도 없잖은가? 나라도 가겠다’고 말했다. 후원 교회도 하나 없이 갔다. 형님이라 맘 놓고 후원을 할 수가 없어서 지켜보기만 했다.
1년 뒤 형수님이 ‘못 살겠다’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아침 밥 먹으려고 30분 나왔다가 다시 서재로 가고, 또다시 점심 먹으러 나와서 30분 있다가 서재로 가고, 저녁을 먹으러 기어 나왔다가 운동을 조금하고 다시 서재로 가고 그러기를 1년을 하더라는 것이다. 형님은 죽기 전에 성경 구절의 십일조, 1/10은 암송을 하셔야 하겠다는 고집이었다. 형수님은 내가 밥하는 기계도 아니고 못 견디겠다고 하셨다.
내가 형수님께 말씀 드렸다. “형수님, 1년만 저희 형님 좀 도와주세요. 뭔가 임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2년을 보내고 형님은 정말 성경 구절의 1/10을 암송하셨다. 그렇다고 달라진 게 있었나?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달라진 게 있었다. 형님 자신이 달라지셨다. 지금은 쓰촨성에 가서 목회를 하고 있다. 폭발적인 사역을 하고 있다. 4년 만에 형님 목회지를 찾아갔다. 65세가 넘었는데 나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떠나는 날 형님이 말했다. “정근아. 나, 잡생각이 없다.” 정말 형님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밝았다. 기쁨이 넘쳤다. 말씀과 함께하는 삶이 어떤지를 보여줬다. 기도, 말씀, 기도, 말씀으로 넘쳤다. 그의 설교는 설교학을 가르치는 내가 볼 때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원자탄을 터트린 것처럼 성도들의 마음을 울렸다.
양복입고 무당 흉내 내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럴려면 일찌감치 신학교를 때려 치워라.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말씀에 죽고 못 사는 목회자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 그만 둬라.
<기독교 포털뉴스> 제공
박기주 전도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