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
[시론] 한국교회 위기의 탈출구: 다른 복음을 몰아내라(2): 율법주의
▲정성욱 교수. |
한국교회의 안방을 차지해 들어와서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부패하게 하고 있는 다른 복음 중 두 번째는 율법주의다. 율법주의의 기본 정의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런 주장에 근거한 신앙생활이다. 좀더 풀어 해설하면 죄인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도덕적 공로를 세울 경우, 그 도덕적 공로에 대해 하나님께서 칭의나 구원으로 보상하신다는 도덕주의·공로주의적 신념과 그런 신념에 기초한 잘못된 신앙생활이다. 좀더 넓게 말한다면 죄인이 칭의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모든 종류의 조건주의 역시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내에 팽배한 율법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 첫째 경우가 바로 오직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와 구원을 거부하고, 죄인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으로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원조 율법주의이다. 이런 원조 율법주의를 신봉하고, 또 그렇게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교단이나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세계 교회사에서 어거스틴과 구원론 논쟁을 벌였던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은 율법주의·도덕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을 거부하고, 인간의 본성이 근원적으로 선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본성적으로 선하고 능력 있는 인간이 도덕법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급진적 펠라기안주의자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둘째 경우가 로마 가톨릭적 율법주의다. 로마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 의하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세를 받을 때, 죄인의 원죄를 포함한 과거의 죄가 사함을 받고 처리된다. 그러나 이때 칭의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영세를 받은 천주교인은 남은 인생 동안 지속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야 한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 의하면 영세 이후 신앙생활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는 과정이 칭의다. 신앙생활 과정에서 영세받은 천주교인이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야 한다는 조건을 성취할 때만 최종적으로 칭의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천주교인이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는 칭의의 과정 속에서 계속 죄를 범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보속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천주교인들 중 최종적으로 자신이 칭의되어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또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의 구원론은 펠라기우스주의 같은 원조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오직 하나님 은혜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고 의지함으로 영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적 구원론에서 크게 이탈한 이단적 주장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인의 모든 죄를 일거에 용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믿음으로 붙드는 모든 죄인이 영 단번에 의롭다 함을 받아, 영원한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된다는 성경적 구원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예수 믿음에 인간의 율법적·도덕적 공로를 더해야 칭의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비판받아 왔다.
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관은, 바로 신약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 또는 유대주의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의 효력을 거부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한다 해서 칭의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한 율법 준수란 할례 받음, 안식일과 다른 절기 준수, 구약 정결음식법 준수 등을 포함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은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완성된다는, 순수한 복음, 순도 100%의 복음, 진짜 복음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복음을 믿고,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이기에 영원히 저주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로마 가톨릭적 율법주의가 한국 기독교회 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공공연히 가르치는 교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들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후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새벽기도, 주초 금지 등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 심지어 어떤 교회들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새벽기도, 주초금지 등을 준수하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이들의 의도가 어떻든, 이런 설교는 철저히 율법적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정면 배치된다. 이런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며, 다시금 믿는 자들을 율법과 정죄 의식의 굴레와 속박에 빠져들게 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상술한 관점이 좀 더 노골적인 율법주의라면, 좀 더 미묘한 차원에서 율법주의적 다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교회들은 칭의·구원과 선행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오해로 말미암아 이런 미묘한 율법주의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소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삶 속에 선행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함정은, 여전히 믿음에 선행을 더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적 패러다임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믿음에 선행을 조건으로 더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믿음+선행=구원’이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이유와 배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과 윤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윤리적 실패의 모습을 보여준 사례가 최근 많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계속되는 윤리적 실패를 바라보면서 좌절을 경험한 일부 지도자들은, 선행과 윤리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이들의 의도는 십분 이해하더라도, 그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오직 은혜와 믿음과 보혈의 복음과는 배치되는 다른 복음이다. 왜냐하면 선행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구원의 조건으로 높여도 안 되기 때문이다.
선행은 참된 믿음의 결과와 열매이며 동시에 선행은 구원의 목적이요, 증거라는 것이 100% 순수한 복음이다. 이것을 수학적인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믿음=구원’이며, “구원이 뿌리라면 선행은 열매”, “구원이 원인이라면 선행은 결과”, “구원이 실재하다면 선행은 그 증거”, “구원을 받은 사람의 삶의 목적은 선행”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돼야 한다. 참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 속에는 선행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선행은 구원의 조건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와 결과와 목적과 증거로서 따라온다.
최근 교회 갱신 전략으로 제시되었지만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제안들 중 다른 하나는, 바로 성경과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칭의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몇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런 제안을 하고 있고, 이 제안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외부에서 신천지와 하나님의교회 같은 이단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내부에서 교리적 수정주의자들로 인한 혼란으로 골치를 앓고 있는 형국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교회에서 가르친 칭의론, 즉 종교개혁의 법정적 칭의론이 신학적으로 심각한 오류라고 주장한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영원히 칭의된다는 법정적 칭의론은 구원파적 오용과 남용의 대상이 되었다고 수정주의들은 주장한다.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더라도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전통적인 칭의론 때문에, 교인들의 방종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칭의를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이며,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선취적으로 칭의를 받았더라도 남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종말에 최종적으로 완성적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따라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다음 삶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경우 종말론적인 완성적 칭의를 받을 수 없으며,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번 칭의는 영원한 칭의이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전통적 교리가 도리어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의 주범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견 일리가 있는 분석인 것 같으나,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런 수정주의는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깊이 분석해 보면 죄인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고 선포하는 칭의는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영 단번의 사건이며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그리고 칭의는 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공로 덕분에, 그리고 오직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과 공로에 대한 믿음만으로 완성되는 사건이다. 한 번 칭의된 자는 영원히 칭의된 것이며, 한 번 칭의된 자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가 복음의 중심이요, 복음의 정체성 자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참된 믿음으로 칭의된 신자는 성화의 과정을 시작하며, 점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가고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자라가게 된다. 즉 칭의가 뿌리라면, 성화는 열매이다. 칭의가 원인이라면 성화는 결과이다. 성화의 칭의의 증거이며, 목적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별되지만, 필연적인 연합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입술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사람의 삶 속에서 거룩함과 선행의 열매가 나오지 않을 경우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그의 신앙고백이 거짓인 경우 즉 참되게 거듭나지 못한 경우이고, 둘째는 신앙고백은 참되나 아직 믿음이 연약하고 유치한 단계에 있는 경우이다.
한국교회 내에는 성경적 칭의론에 대한 오해와 남용이 팽배해 있다. 이것은 율법주의적 유혹을 부추긴다. 그렇다 해서 성경적 칭의론을 수정하여 율법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배신이요, 진리의 왜곡이기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성경적 칭의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 나아가 칭의론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신앙인들의 윤리적인 삶을 고취시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점진적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한국교회는 새롭게 갱신되고 개혁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 정성욱 교수(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크리스천투데이에서 옮김
박기주 전도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