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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와 이웃종교 사이: 종교다원주의 문제

 

WCC 공동선언문 4개 조항 발표 후인 2013년 2월 4일에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에큐메니컬 신학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생명평화마당 신학위원회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공동 주최한 심포지엄이다. WCC 찬성측 그룹이 'WCC 신학과 한국교회의 신학적 대응'을 주제로 열렸다.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이정배 박사가 발표한 글이다. 변선환 박사의 사상 차원을 훨씬 더 넘어선다. WCC가 여러 종교들의 사상을 통합하는 다중 신학(Polydoxy)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본다.

 

타종교와 이웃종교 사이: 종교다원주의 문제

 

1. 10차 WCC 총회가 한국에서 열리는 의미 - 서론을 대신하여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0월 부산에서 제 10차 WCC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시리아 교회와 여러 차례 경합했으나 결국 한국 부산으로 결정된 모양이다. 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까닭에 그리고 대회 개최에 필요한 실제적 경비 등이 이유가 되어 세계교회가 한국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하지만 시리아 교회가 탈락된 것이 여러모로 아쉽고 미안하다. 바울이 회심한 다마스쿠스가 수도인 나라, 이천년에 걸쳐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문화권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을 지켜온 시리아 교회를 세계 교회가 좀 더 주목했어도 좋았을 것이란 판단이다.

 

 

그렇다면 결과론적이긴 하나 시리아가 지금처럼 내전으로 수백만의 인명 피해를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하지만 무슨 모임이든 결국 재정이 문제인 정황에서 세계교회의 실리적 선택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10차 대회가 아시아 지역, 더욱 한국에서 개최되는 적실하고도 당위적인 물음을 물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 3차 대회가 열렸던 뉴델리와 함께 금번 부산은 아시아에서의 두 번째 개최지가 되는 셈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금번 한국 대회의 의미를 다음 세 차원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우선은 한국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점을 세계 교회가 주목할 수 있으면 좋겠다. 특수한 형태이긴 하나 냉전 이데올로기로 갈등하며 고통받고 있는 남북 현실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변 국가에 휘둘리지 않고 남북이 함께 모여 세계사의 비극적 결과인 분단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옳다.

 

 

다음으로 한국은 1990년 서울에서 기독교 공의회 형태로 소집된 JPIC 개최국이란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실상 금번 대회가 내세운 슬로건 '생명의 하느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Life of God, leads us Justice and Peace)' 역시 JPIC의 연속선상에서 생각할 사안이다. 즉 분배 문제의 불균형, 전쟁(핵) 무기의 과다 보유 그리고 생태계 파괴라는 지구적 모순을 응축하고 있는 이 땅의 실상을 한국교회가 깊이 인지하고 자신의 과제로 수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세 번째 사안은 본 논문의 핵심 주제로서 개최국인 한국의 종교적 실상에 대한 서구 기독교의 개방적 시각을 요청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3차 대회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것은 당시 제국주의적 선교 방식에 대한 반감의 확산이 하나의 이유였다. 이는 아시아의 독립으로 그 영향력이 확산되는 시점과 맞물려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도 탈식민주의 해석학이 학문의 대세를 이루며 기독교 신학 안에도 구성 신학을 넘어 다중 신학(Polydoxy)이 회자 되고 있다. 물론 WCC 내에 이런 경향에 대한 반작용이 없지 않겠으나 피할 수 없는 과제라 생각한다. 주지하듯 한국은 힌두교도들만의 국가인 인도와 달리 유불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종교들 모두가 살아있는 세계 유일의 공간인 것을 세계 교회가 인정해야만 한다. 종교 영역에서 가치 다원주의의 이같은 실상을 이곳에서만큼 경험할 공간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과 같은 유교 문화권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되는 시점에서 본토보다 유교를 창조적으로 발전, 계승, 보전시킨 개최지 한국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 앞서 유불선과 같은 차축 시대의 종교들이 이 땅에 정착한 것은 기독교적 시각에서도 축복과 은총임이 분명하다. 함석헌이 지적했듯 그들 역시 이 땅의 민족들에게 ‘뜻’을 전해 주고자 했던 탓이다. 어느 종교학자는 민족이 지닌 하늘 경험 속에는 이들 종교들이 제공한 미토스(불교), 로고스(유교) 그리고 데우스(기독교)가 중첩되어 있어 오히려 서구보다 풍부한 종교 유산을 함축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하튼 필자는 세계교회협의회가 1910년 영국 에든버러 대회로부터 줄곧 종교 간 대화의 중요성을 적시했고 기독교와 이들 종교들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해명코자 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그 입장을 존중한다. 하지만 WCC의 이런 행보를 국내외적으로 비판하는 기독교 단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금번 10차 부산 대회 역시 이점에서 난관에 부닥칠 개연성이 있다. 마르크시즘, 페미니즘과 대화하며 이웃종교들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WCC 입장을 국민일보 등을 통해 반성서(복음)적인 것으로 홍보하며 본 대회를 조직적으로 거부할 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까닭이다.

 

 

최근에는 주무단체인 NCCK마저 이런 세력들에 굴복하여 세계 신학적 흐름에 역행하는 선언을 발표하여 에큐메니컬 진영을 자극하고 있다. 돈을 가진 기독교 보수 세력이 살아 역사하는 하느님의 활동마저 감옥, 즉 구시대적 세계상에 가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지반 100억에 근접한 비용을 들여 치룰 WCC 10차 총회가 빛 좋은 개살구 형태로 끝날 공산이 크다. 이런 양상으로 귀결된다면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기독교 역시 개선(혁)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민족 독립을 위해 모든 종교가 하나 되었던 100년의 역사(2019년)조차 무가치하게 내던져 버릴 듯싶다.

 

 

이제 곧 다가올 제 10차 WCC 대회가 우리 사회에 정의 감각을 요구하고 그에 터해 생명과 평화를 구현시키고자 하는 바, 이 또한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만 이뤄질 과제로서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JPIC 주제는 결코 어느 특정 종교, 특정 이데올로기만이 감당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닌 까닭이다.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는 H. 큉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간 WCC와 소원했던 세계복음주의연맹(WEA)조차 다종교 사회를 인정하는 현실에서 일부 국내 기독교 단체의 몰(沒)역사성은 이제는 지양돼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이웃 종교를 향한 WCC의 신학적 입장(본래 WCC 모든 보고서에는 타종교란 표현이 대세이나 필자는 그를 대신할 말로서 이웃 종교를 사용한다. 이미 국내에서 이 표현을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향후 WCC 역시도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은 언제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 근거했기에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비껴나 있지 않다.

 

 

이로 인해 아시아적 교회의 시각에선 WCC의 신학적 입장이 지나칠 정도로 서구적이란 불만도 표출되는 정황이다. 최근 일신교(Monotheism)를 넘어서는 '다양성의 신학(Theology of Multiplicity)'이 앞서 말한 '다중교리(Polydoxy)'라는 개념과 함께 회자되는 신학 사조에 비춰 보더라도 WCC의 이웃 종교관은 상당히 온건한 편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에큐메니컬 차원에서 지난 세월 동안 WCC가 추구해 왔던 종교 간 대화의 여정을 정리하여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기독교는 물론 이웃 종교들의 전폭적 지지하에 생명과 평화를 목적한 WCC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2. 1990년까지의 WCC 종교 간 대화의 배경 ? 인류의 공동 모험

 

 

20세기 초반 동서가 교접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기독교인들은 점차 아시아 종교들을 희랍철학과 조우했던 초대 기독교인 입장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신약성서가 희랍적 사유를 필요로 했듯이 아시아적 종교들을 서구 기독교인들의 자기이해의 토대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를 거부하는 세속화 물결이 거세진 서구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아시아 종교들과 더불어 이에 공동 대응할 필요가 있었기에 더욱 상호간 적대성을 완화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 있던 세계 교회는 H. 크레머가 주축이 된 1938년 탐바라 선교 회의(IMC)를 통해 기독교와 이웃 종교들 간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잠시 방향이 선회된 적도 있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여타 종교들처럼 인간적 요소가 개입되나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려진다고 본 것이다. 즉 현상적으로 기독교는 여타 종교들과 차이 없으나 본질(계시종교)에서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 말미를 ‘-ism’ 으로 표기한 것은 이런 이중적 잣대의 반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2차 대전 종료 후 아시아 아프리카 민족들이 해방되면서 그들 입지가 커졌기에 양자 간 불연속성에 기초하여 기독교적 우위를 강조하는 크레머적 시각 역시 급제동이 걸렸다. 1961년 비기독교지역인 뉴델리에서 WCC 3차 총회가 열린 것도 이런 정황과 무관치 않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가 발족했던 바, 아시아 종교성과 기독교 신앙 간의 대화가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 주제로 부상했으며 가톨릭교회의 참여로 더욱 고조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가톨릭교회를 개혁했던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영향이 그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 뿌리내린 것이다. 주지하듯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교회 밖 구원(익명의 기독교인)의 가능성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고 이슬람을 비롯한 아시아 종교들과의 관계를 전혀 새롭게 설정할 수 있었다. 이렇듯 아시아 종교들의 부상과 이들의 입지를 존중한 신구교의 공조로 인해 기독교와 이웃 종교를 가르는 이분법적 시각(크레머)이 점차 흐릿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후 WCC는 아시아 종교를 '살아있는 종교' 라 칭하며 이들 연구를 목적한 부서를 별도로 만들 정도로 본 사안에 집중했다. '종교간대화국'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처럼 종교간 대화의 가시성이 신구교 양편에서 두드러지자 점차 대화의 방식 및 원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대화와 함께 항시 따라붙는 혼합 주의(Syncreticism)에 대한 논쟁을 불식시키고자 함이었다. 자기 신앙 전통에 뿌리 내리면서도 이웃 신앙으로부터 자극과 도전을 받고 변화될 수도 있는 개연성을 인정하는 일종의 신학적 테크닉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자기 종교만 알아서는 결국 자기 종교도 알 수 없다(One who knows one knows none)'는 종교학적 명제를 수용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WCC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궁극성을 위협하는 혼합주의의 도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위태롭게 될 경우 선교 자체가 불가한 상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본 탓이다. 따라서 1977년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대회를 통해 WCC는 기독교적 가치(기초)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는 쪽으로 방향을 재선회했다. 이는 대화와 선교 간의 관계를 옳게 정립할 목적에서였다. 대화를 강조하면 선교가 어렵고 선교를 목적하면 대화가 성립할 수 없는 모순을 극복해야 할 신학적 과제로 인식한 것이다.

 

 

한편 가톨릭 측에서도 이탈리아의 섬 앗시시(1986)에서 열린 '기도의 날' 행사에서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기도할 수 없으나 같은 주제를 놓고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양자 간 모순을 실천적 방식으로 극복코자 했다. 가톨릭으로부터 일탈 경험이 있었던 개신교로서는 오늘의 다원적 세계상 자체를 긍정할 필요가 있었고 그 상황에서 교회가 증언할 바를 더욱 새롭게 찾는 노력을 역설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와 선교, 모순된 두 가치를 결합시켜 아시아 지역의 교회들과의 결속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이로부터 WCC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종교 간 대화 모임을 기초로 '기독교와 타종교간 대화에 관한 지침(1979)'을 만들었고 종교 간 대화를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공동 모험'이라 칭할 수 있었다. 명백한 정답이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는 인류 공동체의 유산들 즉 이웃 종교들과 공존해야 할 사명을 지녔다고 천명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보다 앞서 이 땅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던 불교, 유교는 기독교를 위해서도 여전히 축복이란 발상이 제공된 것이다. 인류 공동체를 위해 다양성은 부정될 수 없고 미래를 풍부하게 할 원천이란 생각 때문이다. 각 종교의 정체성은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이들 간의 관계 맺음을 추구하는 일은 역사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 막급한 일이다.

 

 

하지만 본 지침은 이런 관계 맺음을 항시 기독교적 관점에서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역사를 진일보 시키는 뭇 정체성을 하느님 창조의 산물로 믿고 세상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징표로서만 수용하라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를 다스리는 이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이란 기독교적 정체성이 대화와 증언을 위한 선결 요건이란 주장인 셈이다. 이를 위해 교회 공동체에게 전 창조 세계와의 충만한 교제(코이노니아)는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를 통해 성, 계급, 인종 그리고 문화의 차이를 가로지를 절대 책임을 부가한 것이다. 비록 이웃 종교를 정죄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이들을 포함한 전 인류를, 세상을 온전케 하는 하느님 약속이란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했던 바이다. 바로 이것이 폭력이 아닌 대화를 통한 복음 전달 방식인 바, 거짓 증거를 삼가는 일이자 이웃을 자신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혼합 주의에 대한 우려가 전적으로 종식된다. 대화가 제3의 어떤 무엇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이웃 종교들의 영적 경험과 진정으로 만나되 그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인 까닭이다. 이런 시각은 분명 존재 유비(Analogia Entis), 곧 이웃 종교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가톨릭교회의 포괄 주의적 입장과 확연히 구별된다. 가톨릭처럼 보편적 틀을 상정하고 그 빛에서 상대방을 보는 것은 일종의 획일화(자기화)의 덧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1982년 공표된 문서 "선교와 복음 전도, 하나의 에큐메니컬 확언'에서는 인간 삶의 전환을 가져오는 회심을 대화에 앞서 강조하였다. 기독교적 정체성을 차이 혹은 다양성보다 강조할 목적에서다. 기독교의 우월성을 차이의 시각으로 해소시키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도(개인)와 선교(사회)의 관계를 옳게 정리할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회심은 인간 삶 전체를 새롭게 하는 획기적 사건인 바, 하느님 선교, 곧 하느님 나라 비전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정체성의 표현인 회심은 이웃 종교인들의 구원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화되신 하느님께서 만유와 만인 그리고 이웃 종교들 속에서도 현존하고 활동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은 더더욱 이웃 종교의 맥락 속에서도 하느님 현존을 증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회심은 가장 좋은 증언으로서 측량할 수 없는 신적 활동의 산물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증언으로서의 회심은 일방통행적일 수 없고 오히려 평화 공동체를 위한 이웃 종교인들과의 해후, 곧 손잡음의 과정이라 해야 옳다. 산 안토니오 세계선교와복음위원회(1989)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는 이점을 더욱 분명하게 고지한다. "…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 은혜의 수혜자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 신비는 이해를 초월하며 그에 대한 우리 지식의 미천함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이웃 종교인들의 심판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대해 증언자로서 부름 받았다."

 

 

회심을 강조했던 '선교와 복음 전도'에 견줘 다음의 진일보된 표현도 눈에 띤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구원의 길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 구원 능력을 제약할 수도 없다." 이런 시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WCC가 견지하고 있는 바로서 기독교와 이웃 종교 간의 긴장을 유지하는 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과 그의 활동을 기독교(교회) 안에 한정 지을 수 없다는 양자의 긍정은 결국 증언과 대화의 쌍방적 관계를 재차 확인시킨다. 이웃 종교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치 않기 때문이다. 증언(전도)과 대화(선교)는 결코 적대하지 않으며 서로를 심화시키는 관계라는 것이 바로 산 안토니오 보고서의 핵심이다.

 

 

3. 1990년 바아르 선언 이후의 WCC 시각 - 기독론 중심의 이웃 종교관

 

 

이렇듯 WCC 안에서의 종교 간 대화는 대화와 선교의 양면을 충족시키기 위한 지난한 여정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노력은 1990년 스위스 바아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본 모임에서 WCC가 명시적으로 다원주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사실 바아르 성명서는 그 이듬해 열렸던 7차 WCC 호주 켄버라 대회를 사전 준비한 것으로 이전의 어느 것보다 신학적 모험의 산물이었다. 특별히 WCC는 생태계 위기를 비롯한 JPIC의 범지구적 실상에 직면해야 했고 그 해결을 위해 아시아 종교들의 축적된 지혜가 필요했던 바, 어느 때보다 이들과 기독교와의 연대성에 집중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아르 선언은 다양한 종교 전통들과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적극 언급하고 있다. 종교다원성을 충족히 배려한 '적절한 종교 신학(adequate theology of religion)'을 공동 모험의 구체적 실상으로 제시코자 한 것이다. 이점에서 바아르 선언은 종래의 어느 입장보다 이웃 종교에 적극 다가선 WCC 문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물론 기독교 고유한 입장, 곧 창조주와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시각에서 이런 관계성을 언급했음에도 말이다. 즉 창조주는 만유 위, 아래 그리고 만유 그 자체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기에 모든 종교들 속에도 현존하시는 분이 틀림없다고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웃 종교들 역시 나름대로 긴 세월 동안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증언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교회 밖 구원 유무 논쟁으로 한국 교회가 한때 시끄러웠고 지금도 인정되지 않으나 바아르 선언은 하느님 구원 능력이 그들 속에서 현존했었기에 제한될 수 없음을 공식화 한 것이다. 오히려 종교 전통들의 다원(양)성을 영이신 하느님의 은사로 이해할 것을 적극 권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도처에 자신에 대한 증거를 남겨놓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들의 역기능 역시 좌시할 수 없을 만큼 크기에,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일체를 기독론 면전에 세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현상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즉 여타 종교들만이 아니라 현실 기독교 역시 비기독론적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신학적 판단이다. 주지하듯 기독론은 보편적 하느님 구원 활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하게 조우한 것으로서 특별 계시라 불릴 만큼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모든 것의 시금석이다. 하지만 기독론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신학 안에서 복잡한 문제이다. 기독론 해석 폭에 따라 이웃 종교를 바라보는 편차 역시 달라질 것이다.

 

 

다행히도 바아르 선언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인격과 관계하는 개인적 차원의 신학을 넘어서 만유의 주이신 창조주 신앙에 합당한 '우주적 기독론'에로 신학의 폭을 확장시켰다. 하느님 현존은 어느 한 공동체나 문화에 국한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크다는 전제하에서다. 이런 우주적 그리스도는 바로 창조주 하느님의 보편성에 근거할 때 성립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우주적 기독론은 따라서 이웃 종교인들의 구원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하여 본 선언이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가장 선명하게 언표된 것을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는 마치 구원의 명시성과 암묵(익명)성을 구별했던 가톨릭 신학자 K. 라너의 견해와 견줄 수도 있을 법하다. 삼위일체의 또 다른 위격으로서 성령 역시 종교적 다원성을 설명하는 주요한 매체인 것을 바아르 선언이 공식화했다. 켄버라 대회가 성령을 생명의 영으로 언표했고 그를 통해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시키고자 한 것도 실상 성령을 강조한 바아르 선언의 덕일 것이다.

 

 

여하튼 창조주, 그리스도에 이어 생명의 영으로서 성령은 종교적 다원성을 설명하는 WCC 종교 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생명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 영의 현존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된 까닭이다. 이로써 기독교 역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홀대받았던 성령의 위상은 옳게 복원될 수 있었다. 이렇듯 삼위일체 신론에 입각하여 바아르 선언은 이웃 종교들과의 관계를 다음처럼 정리하고 있다. "… 다양한 (이웃) 종교적 증거를 진지하게 수용치 못하는 것은 만유의 창조주와 인류의 아버지인 하느님에 대한 성서적 증언을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1998년 남아공 하라레에서 열린 WCC 대회는 새로운 선교적 상황으로서 '지구화' 문제를 집중 거론하였다.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단일 문화의 현상으로서 지구화가 탈현대주의의 이름하에 확산되고 있음을 주목한 것이다. 민족 개념을 비롯한 문화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종교조차 私事化된 개인적 관심사로 치부되며 미래는 없고 현재만 강조되는 탈현대주의적 가치들에 직면하여 기존 선교의 패러다임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이웃 종교와의 관계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지금껏 증언과 대화의 양면 중에서 증언에 초점을 두었다면 하라레에서는 종교적 다원성 현실 자체를 대화를 위한 토대로서 더한층 강화시킨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뿐 아니라 유럽 및 서구 한 가운데서도 자리를 점한 이웃 종교와 문화들의 현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들 이웃 종교인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야말로 복음의 성실성-이웃 사랑-과 다른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이웃 종교인들의 구원에 관한 물음이 이전보다 더욱 진지해졌다.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구원을 말할 수 없음과 기독교적 상상력을 초월할 만큼 무제한한 구원능력 간의 긴장 자체를 논의의 토대로 삼은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교회 밖, 곧 이웃 종교인들 속에서 감지되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힘껏 무게중심을 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증언과 대화 둘 중에서 인류 공동체를 위해 대화적 삶이 점차 중요해진 상황을 수용한 것이라 하겠다. "… 대화란 예수님의 이웃 사랑 명령에 대한 증언의 한 형태이다…"이로부터 2004년에는 '종교적 다원성과 기독교의 자기 이해'란 문서가 수년에 걸쳐 준비되었다. 비록 WCC에 최종 상정되지는 않았으나 종교 다원성이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지구화 흐름 속에서 종교적 장벽을 넘어 세계적인 재난(JPIC)에 공동 대처할 책무를 온 몸으로 느껴야 할 상황 탓이었다. 따라서 본 문서는 이웃 종교와의 대화가 정작 '복음'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며 동시에 기독교적 선교의 요체인 것을 강력히 시사했다. 오히려 이웃 종교인들과 관계할수록 기독교적 정체성이 더욱 완전하고 풍부해진다는 말도 덧붙일 정도였다.

 

 

또한 하느님의 성육(Incarnation)이 자신을 인간의 제 조건과 전적으로 동일화시킨 神秘인 경우 그것은 자신과 이질적인 타자들을 전적으로 환대하는 일과의 유비 내지 관계성을 띨 수밖에 없다고 볼 것이다. 이미 성서가 말했듯 타자들에 대한 예수의 개방성은 당시 기준으로 허용될 수 없는 자들, 즉 로마인, 사마리아인, 창기 등에까지 이르렀고 그리고 마태가 전한 예수의 족보 속에 이런 타자들이 공공연하게 언급된 정황에서 기독교는 자기 동일성을 넘어 타자성의 철학 곧 이웃 종교인에게로 구원을 확장시킬 수 있어야 옳다는 것이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 자신의 일로서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인류에게 허락하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제약할 수 없다는 앞선 논의를 좀 더 구체화 내지 명시화 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2005년도 그리스 아덴에서 발표된 문서 '성령이여 오소서! 성령은 누구시고 왜 오시며 어떻게 오시고 무엇을 하시는가?'는 희랍 사람들 영성과의 접촉점을 강조한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환기시키고 있다. 사실 접촉점의 문제는 개신교에서 진일보된 신학의 결과물이다. 오직 위로부터의 하느님 은총만을 강조한 나머지 E. 브룬너의 자연신학에게 신학적 사형선고를 내렸던 정통 개신교의 시각에서 그리스의 영과 하느님 간의 접촉점을 인정했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삼위일체론 시각에서 성령론의 입지를 강조함으로써 정작 가톨릭의 자연신학과는 다른 맥락 속에 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한 성령 그리고 전 창조 속에 내주하는 성령이 다른 것이 아닌 까닭에 가톨릭의 존재 유비가 아닌 '신앙 유비'의 차원에서도 이웃 종교를 소위 영기독론(Spirit-Christology)의 관점에서 관계지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별히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과 같은 이미지를 하고 있는 바, 인간이 만든 벽을 쉽게 허무시는 분이기에 현실 교회가 아성을 쌓고 교회 밖 구원을 원치 않더라도 얼마든지 그들과 접촉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접촉점은 창조 세계와 구속 사이의 가교일 뿐 기독교와 이웃 종교들 간의 본질적 유사성을 적시하지 않는다. 이웃 종교들 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덕목들, 즉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존 등은 항시 그리스도를 닮은 방식으로만 생기(生起)한다고 보았던 까닭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웃 종교들을 분별하는 핵심 기준이란 것이다. 이점에서 유럽의 에큐메니컬 신학자 J. 몰트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창조의 세계는 범(pan)허무주의에 빠져 버린다'고 한 것은 참으로 이런 정서에 부합한다.

 

 

이상에서 보듯 WCC 공식 문건들은 기독교와 이웃 종교의 관계를 존재 유비를 설(說)한 가톨릭의 자연신학 전통과는 언제나 다르게 설정했다. 물론 초창기의 배타주의적 관점을 지양시켰으나 그렇다고 하여 양자 간의 존재론적 접촉이나 신(神)중심적 동일성까지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혹은 슐라이에르마허나 R. 오토가 주장하듯 종교 속에 '절대 의존의 감정', '두렵고 떨림의 감정' 같은 공통의 속성(종교적 선험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이웃 종교들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 문화적 다양성을 오히려 획일화 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WCC 문건들은 각 종교들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기독교가 그들과도 얼마나 다른가를 여실하게 들어내고자 했다.

 

 

본 문서들이 시종일관 삼위일체 신론, 우주적 기독론, 그리고 성령론의 시각 하에서 이웃 종교를 바라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아시아 지역 등에서 일어나는 종교 혼합 주의 현상과의 결별을 의도할 수 있었다. 이웃 종교의 언어로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가 '과도하게' 해석될 경우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이웃 종교와 타협될 여지가 생겨남을 처음부터 방지코자 한 것이다. 즉 일본 교토학파에서 시도되듯 기독교의 하느님이 불교적 空(Sunjata)과 등가로 이해되거나 '임마누엘'이 불성(佛性)과 동일하게 해석되는 것에 대한 거부가 구체적 사례일 듯싶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텍스트들 간의 해석학적 순환 가능성을 부정하는 反학문성의 산물로 비판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제3세계에서 발생한 간(間)주관적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은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예컨대 한국적 유교 토양에서 효(孝)를 기독교적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했던 윤성범의 유교적 기독교나 십자가의 도(道)를 '一座食一言仁'의 지난한 과정으로 풀었던 多夕의 '스승 기독론' 그리고 '예수 보살론'을 주장한 길희성의 불교적 신학 등은 서구적 기독교로부터 탈주한 구체적 모습들이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결국 아시아 각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뭇 토착화 내지 민중 신학의 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WCC 문서는 오히려 당당하게 기독교가 자신의 정체성-삼위일체 신론-을 통해 이웃 종교들과의 관계를 이만큼 정립하였듯이 불교를 비롯한 이웃 종교들 역시도 그들 자신의 고유시각에서 논리를 세워 기독교를 바라볼 것을 주문하였다. 이웃 종교들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지닌 이야기(담론)를 갖고 기독교와 자신들을 함께 엮어내 볼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는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상대방을 향해 포괄 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많은 구원들(Salvations)'의 저자 칼 하임을 상기시킨다. 기독교 전통이 삼위일체 신비와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할 수 없듯이 불교 및 유교 공동체 역시도 포기될 수 없는 고유 진리를 갖고 자신과 이웃 종교들을 조망하고 그를 통섭해 보라는 것이다. 만약 이런 입장이 진정성을 지닌 것이라면 이웃 종교인들 역시 기독교의 배타성에 항변만 할 것이 아니라 본 제안을 성심껏 수용해야만 한다. 그간 기독교 신학에 견줄 때 종교간 대화를 위한 아시아 종교들의 해석학적 노력은 상대적으로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불교를 아는 것 이상으로 불교학자 역시 기독교 신학에 정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가 자신을 향한 이웃 종교들의 이런 정체성 표현-포괄주의-을 얼마나 긍정할지 의문이다. 마치 힌두교인을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인정했으되 기독교인을 '익명의 힌두교인'으로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서로에게 '포괄주의'를 요구하는 WCC의 이웃 종교관은 현실 교회와는 달리 배타주의를 벗긴 했으되 이렇듯 충분히 다원적 색조를 지녔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WCC 공식 입장은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제한할 수 없다는 산 안토니오 선언 이후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기에 이웃 종교는 '이해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 필요한 도구이자 자료일 뿐 한순간도 온전한 타자로서 인정된 적이 없었다. 이웃 종교들의 영어 이름 끝자리가 예외 없이 '… ism' 으로 언표되는 한 기독교 중심적 발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WCC 입장을 넘어선 새로운 시각 - '다양성의 신학'에서 보는 이웃 종교관

 

 

그럼에도 이런 WCC의 이웃 종교관은 기독교 내의 또 다른 파트너인 세계복음주의연맹(WEA)으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보았듯이 WCC의 이웃 종교관이 진보적이긴 했으나 여전히 기독교 중심성을 벗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WEA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적 기조를 자유주의적이라 비판했던 것이다. WCC 부산 대회를 앞두고 한국기독교총연맹 측의 반대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와 달리 WCC는 점차 WEA는 물론 가톨릭과도 공조하여 2011년 "다원 사회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증언"이란 문서를 채택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WEA에 가맹된 한기총 소속 교회들은 세계교회들의 열린 태도에 크게 고무될 필요가 있다. 본 문서는 그리스도 증언을 위한 7개의 초석을 제시하는 바, 4번째 항에서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다종교 사회에서 필히 이웃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고 밝혀 놓았다.

 

 

이는 '예수 천당, 붓다 지옥'을 외치는 국내의 근본적 기독교인들에게 충격적인 내용일 것이다. 이를 위한 12개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핵심은 이웃 종교의 경전이나 상징물을 함부로 파괴하고 종교 권력을 이용하여 차별을 부추기는 일체 폭력에 대한 거부였다. 아울러 이웃 종교를 비방하고 훼손시키는 것이야 말로 성서가 금하는 거짓 증거인 것을 명백히 선언하였다. 한국적 상황에서 이해하자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라도 신앙을 개인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봉은사의 땅 밟기에서 보여지 듯 이웃 종교들을 경청하기는커녕 훼방하는 것은 폭력이자 거짓인 것을 옳게 적시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서 종교, 이념의 차를 막론하고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다. 이처럼 본 문건은 WCC를 비롯한 세 단체에서 협업한 것으로서 기독교 신앙 가족들 모두가 함께하는 에큐메니컬 정신을 담아내었다.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개 교회는 어느 교파에 속해 있든지 종교 간 대화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의 한 표현으로 감당하라는 것이다. 이웃 종교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항시 너를 통해서만 나일 수 있다는 말이자 내 종교만 알면 실상 내 종교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한계를 설정하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할 듯싶다.

 

 

결론적으로 본 문서는 자신뿐 아니라 이웃 종교의 자유가 옳게 행사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이웃 종교인들에 대한 악의적 언행을 삼가며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 가치를 위해 상호 협력할 것을 강변하고 있다. 2011년 발표된 본 문서의 정신이 한국 교회에 뿌리내린다면 2013년 부산 대회는 한국교회의 축복과 협력 속에 치러져야 마땅할 일이다. 유불선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세계 유일의 장소인 한국에서 기독교인들 모두가 함께한다는 것은 그간 발표된 WCC 문서들의 정신을 옳게 실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더구나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자 JPIC 대회가 열렸던 곳인 이 땅에서의 기독교인의 잔치가 열림으로써 민족 통일이 앞당겨지고 생명 평화가 신자유주의 그늘을 거둬들일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할 시점에 이르렀다. 앞서 필자는 WCC가 표방한 종교 간 대화 이론의 한계와 아쉬움에 대해 아시아 신학자이자 토착화 신학자로서 의견을 짧게 개진하였다. 본고의 마지막 장에서 필자는 구성 신학(Constructive Theology)의 한 형태로서 최근 다양성 신학의 한 흐름을 언급하고 싶다. 상술한 WCC의 대화 이론이 현대 신학 사조에 비해 다소 뒤쳐져 있음을 각인시킬 목적에서이다. 주지하듯 필자는 앞서 '다양성의 신학(A Theology of Multiplicity)'이란 부제가 공통적으로 붙어 있던 '복수적 교리(Polydoxy)'와 '유일신론을 넘어서(Beyond Monotheism)' 란 두 책을 소개한 바 있다. 이 책들은 모두 차이에 근간한 종교 간 대화를 위해선 의당 일자(一者)의 논리,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유일신 사상의 포기가 전제되어야 함을 공히 역설하였다.

 

 

한마디로 WCC가 표방했던 구원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절대적이며 그의 능력과 범위는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기독교 중심적 시각과 시대가 요구하는 '차이'에 근거한 다양성(Multiplicity)이 현실적으로 상호 공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삼위일체론이 신학의 탈출구로서 호평을 받는 시대가 되었으나 그 역시 결국에는 한 분 하느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기독교적 신뢰의 표현인 한에서 一者의 논리와 다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책들은 脫식민주의적 관점을 지녔기에 一者의 논리 속에 함의된 일체의 윤리적 관점을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WCC 부산 대회가 지향하는 목표, '정의를 통한 생명 평화' 역시 본의와 달리 이웃 종교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유불선 종교들의 존재가 더불어 인정되지 못할 경우 기독교가 내건 생명, 정의 그리고 평화는 그들만의 잔치로서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다양성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 자체가 一者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에 토대를 둘 수 있고, 두어야 하되 그 빛에서 종교들 간 차이를 긍정하고 그들 사이의 정의로운 관계에 주목하는 脫식민적 신학을 정초할 것을 요구했다.

 

 

주지하듯 WCC는 지금껏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내지 '관계 유비'의 기독교적 관점을 갖고 이웃 종교를 접해 왔었다. 이를 위해 삼위일체 즉 창조주, 구속주 그리고 성령이신 하느님의 보편성이 늘상 강조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웃 종교 역시 하느님 창조 영역 속에 있으며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또한 삼라만상에 내주하는 성령의 활동으로 인해 일체의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하에 있다는 논리는 기독교만의 논거로서 이웃종교인들이 수용키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해를 추구하는 한 방식이겠으나 이웃 종교들 시각에선 기독교 측의 논리에 자신들의 존재가 꿰맞추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듯 여겨지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다양성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을 전혀 다른 시각, 즉 전통적 기독교를 넘어선 차원에서 재구성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一者적 속성을 제거하는 중에 부정신학의 언표 방식을 빌려 온 것이 그 한 특징이다. 하느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Unknown)'인 바, 그의 육화는 다양성(Multiplicity)으로 나타나며 성령은 이들 다양성을 상호 '관계시키는 존재(Relationality)'라는 것이 '다양성 신학'의 골격이다. 여기서 다양성이 성육신 그 자체를 적시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새롭다. 신적 현실 자체가 어떤 형식이든지 간에 단순한 一者(Unity)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양하다는 것이 본래 성육신이 적시하는 근본 뜻이란 것이다.

 

 

당시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과 희랍의 一者 철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예수가 하느님이란 고백은 신적 현실의 다양성을 말하지 않고서는 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육신은 실로 유대주의와 헬라 사상과는 짝할 수 없는 기독교 고유한 것으로서 다양성이 바로 그 본질이란 것이다. 이 경우 다양성(Multiplicity)은 소위 종교다원주의에서 말해온 다원성(Plurality)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후자가 脫현대적 정조 속에서 각각의 분리된 개체들 간의 차이(다름)를 강조했다면 전자는 오히려 그들의 관계 맺음, 함께하는 결속에 무게중심을 둔 개념인 까닭이다. 따라서 수많은 분리된 것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다양하게 뒤얽혀진 특이한 것(Singularity)들 간의 관계가 여기서 핵심이다. '다양성의 신학'이 리좀(rhyzome)적 사유에 주목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처럼 다양성이 알려지지 않는 신적 깊이로서 그의 육화된 표현이고 그것들을 상호 결속시키는 것이 성령인 한에서 기독교는 이제 전체성을 띠기보다는 오히려 신적 다양성 그 자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경우 이웃 종교 역시 WCC가 근간으로 삼았던 기독교(삼위일체)적 시각으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로울 수 있다. 기독교 안팎을 통해 생기하는 다양성 자체가 신적 익명성이자 그의 육화로서 이해될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WCC가 삼위일체적 신론에 근거, 인류 미래를 낙관한 것에 반해 다양성의 신학은 단순화(일자)에 대한 저항으로서 오히려 불확실성을 자신의 본질로 삼는다. 관계적 다양성은 전체성과 짝할 수 없는 바, 불확실성이 오히려 신적 신비의 표현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웃 종교와의 관계에 있어 크게 달라진 것은 이들 간의 상호 영향력, 관계성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신적 신비의 본질이란 사실이다. 물론 이점은 하느님의 구원 능력이 기독교 내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WCC의 근본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보겠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확정 짓지 않았기에 결코 동일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양성의 신학'을 선호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이런 시각을 보다 진일보시킨 이들도 있다. 인도출신의 아시아 신학자 J. 타타마닐 같은 이가 그런 경우로서, 종교적 다양성을 삼위일체적 다원 교리(trinitarian polydoxy)와 연관시켜 긍정적으로 재조망한 것이다. 삼위 일체적 다원교리란 WCC가 그랬듯 삼위일체론을 종교간 대화를 위한 장(locus)으로 사용하되 도그마(기독교)적 접근을 지양하고 각 종교 속에 함축된 삼위일체 형식을 비교 신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뜻한다. 타타마닐이 비교 신학적 시각에서 힌두교, 기독교 그리고 불교로부터 추출한 삼위일체 형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힌두교로부터는 근거(Ground)로서의 궁극적 실재를, 기독교로부터는 우발성(Contingency)으로서의 궁극적 실재 그리고 불교로부터는 관계성(Relationality)으로서의 궁극적 실재를 택하여 근거, 우발성, 관계성 간의 삼위일체적 관계를 새롭게 모색한 것이다. 여기서 이들 각각은 기독교 내부의 교리로서 삼위일체, 즉 하느님, 아들 그리고 성령과 정확히 견줄 수 있다. 이로부터 삼위일체적 복수 교리(Polydoxy), 즉 기독교에게 있어 이웃 종교의 의미가 비로소 하나와 셋의 관계 속에서 복수 교리(Polydoxy)로서 적시되는 까닭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웃 종교들이 오히려 기독교 신학이 말했던 삼위일체 의미를 심화, 증대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힌두교의 근거(Ground)는 어떤 것이 無가 아니라 존재한다는 '있음(isness)'의 경이로움으로서 존재 신비를 강화시킬 수 있고 기독교가 제시하는 우발성은 예수의 육화 사건을 지시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들은 저마다 유일하며 독특(Singular)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개체의 환원 불가능한 사실(역사성)을 강조하며 불교의 관계성은 이렇듯 저마다 독특한 단일적인 것들이라도 결코 고립적, 자족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어느 종교들보다 역설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근거만을 강조할 경우 세상을 잃을 수 있고 우발성에 경도될 경우 신을 인격으로 제한시킬 우려가 있으며 관계성에 무게중심을 둘 때 개체성(특별함)을 상실할 염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근거, 우발성, 관계성 이 셋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이 신적 삶을 표현함에 있어서 저마다 강조점이 다른 것으로 상호간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점에서 향후 종교간 대화는 이들 셋의 통합적 비전을 위해 차이를 수렴하는 역할 역시 옳게 감당할 책무가 있다. 결국 타타마닐이 말하고자 한 바는 이웃종교들과의 대화(사귐)가 없다면 기독교 홀로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를 흡족하게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이웃(종교)들을 향한 운동 없이는 단 한치도 신적 삶의 깊이에 접근 할 수 없다."

 

 

이렇듯 다양성의 신학은 WCC가 삼위일체 신론의 시각에서 이웃 종교들을 이해하려 했던 것의 한계를 잘 드러내 보여 준다. 따라서 종교적 다양성이 인간 공동체의 삶을 위한 심오한 약속의 토대이자 근원인 것을 명심할 일이다. 지난 시절에 비해 WCC는 최근 종교 간 대화 이론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종교간 대화국의 위상을 격하시켰고 그 책임자 역시 아시아인을 기피한다는 소리도 얼마 전부터 들리고 있다. 이는 WCC의 재정 탓이기도 하겠고 아시아적 종교성의 풍부한 발현에 대한 서구 기독교인들의 움츠림의 결과일 수도 있을 듯 싶다.

 

그러나 부산에서 열리는 10차 대회를 통해 WCC에 속한 서구 기독교인들은 유불선의 바탕하에 복음을 수용했고 민족 독립을 위해 하나되었던 한국 기독교의 경우를 여실히 배울 필요가 있다. 공룡처럼 커버린 몇몇 초대형 교회의 실상에만 눈을 크게 뜰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두 번째 차축 시대가 회자되는 현실에서 적어도 제2의 종교개혁은 아시아, 좁게는 한국에서 일어날 것이란 기대를 갖는 것도 과하지 않다. 더구나 문명사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유교 문화권이 크게 부상하는 현실에서 그 독특함과 잔류량을 가장 많이 지닌 한국 역시 주목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이 몇 년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제는 아시아적 종교성 속에서 기독교가 새롭게 표현되는 길을 세계 교회는 기대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인류의 구원이 아시아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5. 짧은 마무리

 

 

이상으로 WCC 이웃 종교관의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증언과 대화의 양자택일을 피하려 애써 온 WCC 측의 노고에 감사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되 그것을 절대화 하지 않고자 신학적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다. 신앙적 편차가 크고 넓은 회원 교단의 입장을 두루 만족시키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 상상해 본다. 그러나 산 안토니오 문서가 말하듯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제한하는 일은 앞으로도 삼갈 일이다. 금번 공동선언문이 쓰레기 같다고 평가된 핵심 이유 중 하나는 소수 교회 권력자들에 의해 하느님 자유가 훼손된 탓이다. 아마도 이들은 성서 무오설을 넘어 교회, 나아가 목사 무오설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가불가, 호불호를 두려움 없이 선포했던 것이다.

 

 

한 목회자는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석학적 투쟁이라 말하고 있다. 같은 성서를 이렇듯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상황을 적실하게 판단하여 새로운 에큐메니컬 진영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과거 몸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경험이 있었기에 또 다시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쉽지도, 권장할 만한 일도 아닐 것이다. 기독교 초기부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이는 항존해 왔었다. 그렇기에 차이는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존중으로부터 야기된 긴장은 서로 감내하는 것이 옳다. 또한 신학적으로 정당해도 목회적으로 당장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 있고 목회적으로 옳다 여겨져도 신학적으로 틀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목회와 신학 사이에도 긴장은 여전하며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메가 처치의 힘으로 신학을 무화시켜 긴장을 실종시키려 한다면 신학과 교회(목회)는 함께 죽어 기독교의 앞날을 어둡게 할 뿐이다.

 

 

본고 4장은 이웃 종교를 향한 WCC 측의 요구에 답하기 위해 최근 저서를 원용하여 구성되었다. 이웃 종교를 기독교 고유한 논리와 시각에서 바라보았듯이 이웃 종교 역시 기독교와의 해석학적 접목을 시도하라는 요구를 WCC 측이 용기 있게 제안한 것이다. 물론 이런 제안이 아직도 유효한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인도 신학자의 생각을 빌어 짧게나마 그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다. 이웃 종교들을 향한 이해 (운동) 없이는 신적 깊이를 온전히 깨칠 수 없다는 타타마닐의 견해가 全理는 아니겠으나 一理있는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시각에 대해 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속출할 것이다. 하지만 이웃 종교의 시각에서 보여 진 기독교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는 충분히 있다. 더구나 축(軸)의 종교들 모두가 살아 숨 쉬는 이 땅에서 소위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축제가 열린다면 그들에 대한 존중과 그들로부터의 배움의 여지를 갖는 것이 예의라 생각한다. 지구적 차원의 생명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논한다 하면서 이들의 생각과 존재에 제대로 주목치 못한다면 기독교는 생각보다 빨리 소수자의 종교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정배 / 감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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