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를 찾음에 대하여
주여, 나는 영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않습니다. 삶의 즐거움이나 초조함 등 세상 것들이 주님께 대한 나의 신앙을 결코 흔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어떤 것에 얽매이면 자유롭게 날아 주님께로 갈 수 있을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날 수 있기를 소원하고 이를 노래한 시인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합니다.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 55:6).
주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보다 더 큰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이 세상의 것에 무심한 자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은 하나님과 겨룰 수 있는 그 무엇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야 나의 마음이 자유롭게 당신께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나는 피조물과 썩어 없어 질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능한 상태에 도달하려면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그것 자체를 뛰어넘을 수 있는 많은 은총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영혼이 모든 피조물에게서 자유로워져 하나님과 전적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무엇을 알든지 무엇을 소유하든지 간에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영원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선하신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작아지고 낮아질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김이 마땅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헌신적인 사람의 지혜와 배워서 익힌 학문적인 사람의 지혜는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에게서 전해지는 지식은 인간의 재주로 고통스럽게 익힌 지식보다 더 소중합니다. 묵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적지 않지만 필요한 것을 훈련하는 데 인색합니다. 묵상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징조나 감각적인 것을 의지하는 반면 금욕을 제대로 하는 것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잠시 집중하다가도 순식간에 주의를 놓아버린 채 우리가 한 일을 엄격하게 평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와 우리의 부정한 행위에 관해서는 슬퍼하는 법이 없습니다.
혈육 있는 자들의 행위가 부패하여 대홍수가 일어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생각이 그토록 타락했기에 행동 역시 타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적인 능력을 상실한 데 따른 결과입니다.
선한 삶이라는 열매는 투명한 마음에서만 맺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는가를 자랑합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덕을 베풀면서 살았는지에 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용감했는지, 부유했는지, 잘생겼는지 질문합니다. 얼마나 솜씨가 좋았는지, 글을 잘 썼는지, 대단한 일꾼이었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영적이었고, 얼마나 인내하고 온유했는지, 얼마나 헌신적이고 신앙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사람의 외적인 것을 존중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내적인 것으로 돌아서게 합니다. 전자는 낙심할 때가 많지만 후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속는 법이 없습니다.
Thomas a Kempis, De Imitatione Christi, Part 4.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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