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라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자는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향하든지 고통을 겪는다. 일이 자기 뜻대로 진전되지 않으면 곤혹스러워 한다. 야단법석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기는 다 마찬가지이다. 누구도 그럴 수 없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이면 그가 왕이든 교황이든 어려움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자청하는 사람은 인생사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다. 생각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저기 있지 않은가. 그에게는 많은 돈과 커다란 집과 높은 지위의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 부질없고 의지할 것이 없다. 또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이 특권이 아니라 짐이라는 사실을 안다.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 나그네의 삶을 꾸려갈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세상 것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이 땅의 삶은 고통과 무관할 수 없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이 사실을 한층 더 잘 깨닫는다. 인간이 타락한 결과를 분명하게 보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헌신적인 사람에게는 먹고 마시고,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쉬고, 그리고 인간이기에 요구되는 것들이 큰 문제가 아니다.
내면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육체의 욕구를 멀리한다. 시편 기자는 이 같은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했다.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시 25:17).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은 불쌍하다. 불행한 삶, 타락한 삶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도 불쌍하다. 간신히 육체적인 것만 채우는 것으로는 이 불행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고하고 구걸해야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기보다 여전히 세상에서 서성댄다. 지각 있는 사람이 드물다. 마음과 영혼이 올바르지 않다. 그러다보니 실제로는 진흙탕에 머물면서 천국에 있다고 착각한다.
마지막 때가 닥치면 이 불쌍한 자들은 지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비천하고 쓸모없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성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친구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현재의 영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영원한 즐거움만을 추구한다. 영원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좇는다. 더 깊은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눈에 보이는 것을 무시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진보를 포기하지 말라. 시간과 기회는 넉넉하다. 어찌 하루하루 결단을 미루는가? 지금 즉시 결단하고 기도하라. 지금이야말로 움직일 순간이다. 선한 싸움을 하고 진로를 바꾸기에 적합한 순간이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불안한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가? 그 때야말로 축복의 순간이다.
안식의 장소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물과 불을 통과해야 한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면 결코 죄악을 제압할 수 없다. 그토록 영적으로 허약한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죄를 피할 수 없다. 근심이나 슬픔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모든 불행을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우리는 죄를 범함으로써 순수함을 잃어버렸다. 진정한 행복까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희망이 남아 있는가?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려라. 얼마나 인내해야 하는가? 불행이 사라지고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될 때까지 기다려라.
우리의 성품은 정말 허약하다. 오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내일 또다시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바로 지금 더 나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하다가도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언제 그랬나 싶게 행동한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하라. 결코 교만하지 말라. 우리는 너무 약하고 변덕스럽다. 특히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상당한 수고로 마침내 가까스로 획득한 것까지도 태만 때문에 순식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
열의가 그토록 빨리 식으면 우리는 결국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대화에서 거룩한 모습을 전혀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미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것처럼 마음 편하게 지내지 않는가? 그렇다면 화를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장차 어느 정도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또 영적으로 더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믿음의 초보자처럼 선한 삶에 관해 배우라. 우리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Thomas a Kempis , De Imitatione Christi (1418–1427), Part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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