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
진정으로 영적 진보를 갈망하는가? 그렇다면 두 가지를 조심하라.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삶이다. 오감을 훈련하고, 위험을 자처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
마음이 항상 불편한가? 후회되는 일을 털어 놓아야 편할 수 있다. 진정한 회개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활짝 열어주지만, 방탕함은 언제나 순식간 문을 닫아버린다. 어쩌다 행복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과 세상에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의 그릇됨을 비웃으면서도 자신의 영적인 결점에는 관대하다. 그 결점 때문에 고통 받음에도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반드시 크게 울어야 할 상황에도 그저 웃어넘긴다. 어디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을 찾아볼 수 없다.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데 따르는 고통을 감수하라. 그렇지 않으면 참된 기쁨과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양심을 더럽히는 모든 것과 맞서라. 당당하게 맞서라. 자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라. 양심에 따라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회개하는 습관은 나쁜 행동을 사라지게 한다. 우리가 세상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세상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아랫사람의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 윗사람이 하는 일에 참견 말라. 자신이 영적인 진보를 위해 헌신한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임을 기억하라. 스스로를 엄격하게 살펴보라. 필요하면 자신을 책망하라.
세상의 호감을 사지 못해도 속상하지 말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만약 호감을 산다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지 않거나 경건한 삶을 살지 않는 탓일 수 있다. 세상의 위로는 무익하다. 육체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랜 경험이 이를 증명한다.
세상의 호감은 우리 영혼에 유익한 하나님의 위로를 방해한다. 그 이유는 죄악 때문이다. 진심으로 회개하라. 가장 작은 일은 교만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일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에 합당한가? 전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음을 알라. 진정으로 회개하면, 세상은 즐겁기 보다는 항상 불편할 뿐이다. 선한 사람이 슬퍼하고 눈물 흘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상태를 철저히 살피면 살필수록 슬픔은 더 커진다.
죄를 범하도록 만드는 우리의 나쁜 습관이 슬픔과 내적인 성찰을 가져온다. 거룩한 묵상에 힘쓸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함은 우리가 세상의 것과 씨름하느라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진행 속도는 삶의 속도보다 더 빠르다. 지금부터라도 죽음을 염두에 두라. 그리하면 삶을 바로잡는 데 더욱 힘쓰게 된다. 당장은 죽음이 가깝지만 그 너머에는 지옥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먼저 마음을 살피라.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는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을 소용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어찌 우리는 자신을 감언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에 그토록 둔감한가? 어찌 우리는 이토록 게으르고 천박한가? 도대체 우리의 무익한 몸에 남아 있는 정신은 무엇인가? 즐거움, 슬픔, 수군거림인가?
주님께 회개의 영을 부어달라고 겸손히 기도하라.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시 80:5).
Thomas a Kempis , De Imitatione Christi (1418–1427), Part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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