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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의 역사관에 대하여
 
제목: 기독교인은 어떤 역사관을 가져야 할까?
부제: 이만열 교수의 말씀에 대한 나의 견해
 
한국사 이해로 한다면 애송이에 불과한 공헌배가 여기서 역사를 주제로 게시물을 올린다는 자체가 황송하옵고, 특히 국사편찬위원장까지 역임하신 이만열 교수님에게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이해될 수 없을 만한 일이지만 용기를 내어 글을 써 본다.^^
 
제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교회를 다녀보았다는 것과 신학을 공부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만열 교수님은 단재 신채호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신 분이며, 기독교 선교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를 번역하신 분이기도 하다.^^
 
이분께서 최근에 윤석열 정부의 역사관(?)에 대해 강하게 이의(異議)를 제기하시는 듯하여 어쩔 수 없이 나도 글을 올리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만열 장로님을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그분과 말을 섞을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하다.^^ 그러나 장로님께서 정부를 향한 비판을 강하게 하신 듯하여 목사인 저로서도 여기에 말씀을 올리게 되었다.^^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역사관을 가져야 할까? 특히 한국에서의 역사관 문제는 좀 복잡하고 어렵다. 여기는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일반 세속사를 교인들이 전공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이만열 장로님과 같은 분이 한마디 하시면 그대로 받아들여 버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신학적 입장이 고려된 성경의 관점과 세속사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 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일반 세속사를 다루기 때문에 기독교적 용어만을 쓸 수는 없다. 타 종교의 용어나 “가이아 이론”과 같은 것도 빌리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신학의 주특기 중 한 가지는 고백인데, 예를 들면 조상의 설화를 통한 고백, 시대의 심각한 고뇌를 겪은 뒤에 하는 역사서술, 고전을 재발견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고백 및 해석의 문제가 필수처럼 뒤따른다.
 
그런데 이걸 한국에서 실행하려면 한국사를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사회의 인종구성원들,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 밝혀진 문화의 층위 그리고 그 사회의 집단무의식 등이 필수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로 남는데, 이런 주제들은 신학 공부로 파악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신학자들은 공허한 소리들을 하거나 자신들이 힘들게 외국에서 배워온 서양 신학의 낙관론들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데, 여기에서 핵심적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들이 밟고 있는 토양을 잘 모른 채 겉돌아가는 소리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성경이 제시한 역사관이 무엇인가? 답: 바빌론 포로기의 트라우마가 강력하게 투영(投影)된 반성역사관(反省歷史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성역사관에 대해 길게 설명할 수는 없다. 간결하게 말씀드린다: 구약성경은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여론적 우위가 없는 듯하다. 예를 들면 예언자 예레미야는 남(南)유다를 멸망시킨 신(新)바빌로니아의 왕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제2세를 ‘하나님의 종’으로 여겼다(렘 43:10). 또한 이사야는 제국 아시리아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가는 것을 신의 뜻으로 알고 몸소 예언 행동을 했다(사 20:3-4). 이를 따를 때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신학이 굳이 ‘독립운동사’일지는 의문이다.
 
물론 외경에는 독립운동적 요소들도 있다(마카베오 상 참고). 그러나 정경의 두 예언서인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다수 민중의 여론적 통계에 의한 우위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닌 듯하다. 즉, 유다 사람들은 이집트를 다시 보게 된다. 다시 말해 반(反)이집트적 예언을 했던 예레미야의 신학이 구약성경에서는 강한 편으로 여길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신약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인으로 묘사했다(행 7:4). ‘갈대아’라는 단어는 보통 ‘바빌로니아인들’을 연상케 한다. 다시 말해 유다 사람들에게 친숙한 고유명사가 아닌 듯하다.
 
구약성경은 이집트에서의 고통과 바빌론 포로기에서의 고통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기들을 지나면서 자신들의 문제와 자기 조상들의 문제점들을 나름대로 찾은 듯 했다. 그러면서 과거사 다시보기 또는 과거사 반성하기 또는 과거사로의 투영(投影) 등을 실행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한국인들이 구약성경과 꼭 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사(史)를 구약성경처럼 쓸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사나 동양사 공부를 통해 무언가를 배워야 하거나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구약성경은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역사관을 제시할 수 있을 듯하다. 반성역사관(反省歷史觀)이라는 점에 있어서 그렇다.
 
그러면 한국인들에게 있어서의 반성사관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는 ‘고대사(古代史) 다시보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이 자신들의 과거사를 회상(回想)했기 때문이다. 즉, 조상들의 이야기들을 다시 봤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는데, 현대한국인들이 해왔던 방식의 독립운동사나 민중운동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한국사는 독립운동사 중심의 특성을 갖는다. 즉, 항일운동사(抗日運動史)에 쏠려 있다. 그러나 이는 구약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구약은 반(反)이집트적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 ‘반(反)아시리아 사관’이나 ‘반(反)바빌로니아 식 사관’이 아니라 ‘반(反)이집트 식 사관’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왕조의 조상들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종족’이라고 스스로 고백했다. 한국인들은 이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관점에서 조명해 보자: 한국인들은 고대 때부터 ‘문명지향성’을 가졌다. 쉽게 말해, 흉노나 선비와 같은 문물들의 단편이 경주의 고분에서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반도 전체를 두고 볼 때는 ‘중화문명과의 연관성’이 깊다.
 
고조선 토기가 중국토기와 무관하지 않으며, 위만조선(고조선 중 하나)에서 위만의 관직명이 중국에도 있었던 박사(博士)라고 여겼던 점이나 고조선의 주요 동검으로 여겨지는 비파형동검은 ‘오르도스 계(일명 북방 유목민 계) 동검’과는 달리 중국계 비파형 동검과 닮았다. 물론 제작기법의 차이는 있지만 고조선의 주요 유물로 여겨왔던 ‘비파형 동검’은 확실히 중국형 비파형동검과 많이 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요동식 청동검의 기원이 중국이라는 뜻은 아니다.
 
고구려, 백제의 유물들도 중국과 무관하지 않다. 뿐만아니라 한(漢)의 군현으로 존재했던 ‘낙랑유적지구’의 유물들이 중국문물과의 연관성이 깊을 만하다는 것은 고고학계의 상식일 수도 있다. 유물에 대한 학설들을 여기서 길게 말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는 문헌으로 들어가 보자:
 
문헌은 워낙 방대하여 역시 길게 말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최치원의 ‘난랑비 서’나 최치원의 문집에서도 어느 정도는 설명했다고 여기는데, 고대 한국인들의 종교는 ‘도교, 불교, 유교’였다. 고대적 샤머니즘과 더불어 ‘유·불·선’은 한국인들의 종교 무의식에 깊게 각인되었을 만한 그 무엇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늦게 들어온 종교로서 위와 같은 ‘선행(先行)종교’ 및 ‘선행(先行)문명’을 공격하면서 정착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그들의 교리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왜 그 종교가 정착했으며, ‘그 종교가 정착했을 때 한국인들이 해석해야 할 역사적 업보(業報)가 무엇인가?’이다.
 
언젠가 필자는 모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어쩌면 그 목사는 그 질문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질문: 당신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와 고조선이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주장을 하는 데 대해 어떻게 여기십니까? 그의 답: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나의 질문: 그럼 당신은 중국인들이 동북쪽의 여진족이나 소위 야만인들(오랑캐들)의 지역으로 침공하는 것을 반대(反對)하십니까? 그의 답: 네^^ 나의 질문: 그렇다면 ‘중국’이라는 국가는 아니지만 중화문명으로 무장한 인종들이, 여진족이나 소위 오랑캐들의 지역으로 침투하여 오랑캐들의 지역을 점령하거나 그 오랑캐들에 비해 문명적 우월감을 가지면서 왕정(王政)을 실행하고, 오랑캐들을 중화문명의 아류작으로 개종시키려 한다면 동의하시겠습니까? 그의 답: 저는 반대합니다. 나의 코멘트: 바로 그 중화문명의 전도사들이 고조선과 고구려입니다!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한반도는 중화문명과 결별되지 못했다. 한반도에도 적지 않은 북방인들이 정착했을 테지만 ‘한반도의 주 문명은 농경사회’였다. 고구려와 발해가 망한 뒤에도 한반도에서의 정책은 제법 꾸준하게 북진정책(만주대륙으로의 개척)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으며, 북쪽의 오랑캐들(여진족들)과의 잦은 충돌이 있었다.
 
북방 유목민들이나 여진족의 입장에서 살피면, 만리장성 아래의 중화민족(漢族)이 심각한 적(敵)이지만 농경문화에 길들여진 한반도의 사람들도 적(敵)으로 간주될 만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인구는 중화민족이나 한반도의 사람들이 북방의 오랑캐들보다 월등하게 더 많았다. 그 인구의 수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차이났다.
 
일단 한반도의 입장에서 조명해 보자: 한반도의 국가들(고려와 조선)은 치열할 정도로 북방의 오랑캐들(거란, 몽고, 여진족들)과 투쟁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상투를 틀어 올려야 했으며, 비녀를 꽂아야 했다. 즉, 북방인 식 문화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북방인들이 승리했다. 한반도를 놓고 볼 때, 고려는 많은 수의 남·녀 노예들을 몽고에 상납해야 했고, 조선 시대에는 대략 50-60만 명의 남·녀 노예들이 청나라(여진족의 국가)에 상납되었다고 한다. 물론 고려에서는 왕자를 몽고에 인질로 보내야 했고, 조선에서도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이를 농경민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이요, 패배이지만 북방 유목민이나 오랑캐의 입장에서는 생존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즉, 중화문명 및 한반도 문명과 오랑캐들과의 심각한 투쟁의 결과이지, 윤리적 세뇌에 의한 도덕적 당위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이체에게 영향 받은 역사철학자로 오스발트 슈팽글러가 있는데 그의 주저 <서구의 몰락>에서의 주 논지는 문명사회는 몰락한다는 것이다. 즉, 수많은 국가사회들은 마치 생명처럼 유기적인데, 그 사회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기재는 문명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문명의 발전은 국가사회를 보다 더 빨리 몰락시키는 기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가이아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자: 지구 유기체는 한반도 식 농경문명이 북쪽의 여진족들을 중국 식 문명으로 개종시킴에 대해 반대(反對)한다. 한반도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이 반영된 선교(宣敎)적 투영(投影)은 북쪽의 오랑캐들을 점령하여 한반도식 농경문화로 개종시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 가이아는 이를 철저하게 반대한다. 한반도의 인구가 여진족들보다 월등하게 더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사회는 번번이 실패했다. 한반도 사회의 집단무의식이 고통스러웠을 시기의 세계사는 오랑캐적 질서였다.
 
즉, 문명을 꽃 피웠던 인도(India)는 영국에게 200년 동안 지배받았다. 문명을 자랑하던 중국은 한줌도 안되는 여진족에게 200년 넘게 지배 받았다. 그리고 문명에 동승(同乘)하여 아주 끈질기게 상투를 틀어 올렸던 그 한반도도 마침내 일본에게 망했다. 물론 일본을 유목민 국가로 여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는 일본을 오랑캐처럼 간주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양의 기독교는 조선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오랑캐의 종교였다. 이 서양종교는 조선의 오래된 전통인 조상제사 의례를 박살냈다. 조선에서는 서학(西學)에 반대하여 동학(東學)운동을 펼쳤지만 실패였다. 그렇다면 이 가이아가 알려줄 만한 특성은 무엇인가? 농경문명의 확산에 의한 오랑캐들에게로의 침공을 반대한 데 있다. 즉, 인구가 적은 오랑캐들도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아놀드 죠셉 토인비(Toynbee)의 주장에 의하면, ‘어버이 문명권과 아들 문명권’이다. 이 이론 대로 한다면 아마도 ‘한반도 문명은 중화문명의 아들문명권’으로 분류될 만할 수도 있다. 바로 이 문명권을 가졌을 만한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침투해 온 종교가 있는데, 기독교이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가졌던 입장은 자국민 중심으로서, 소수종족인 여진족들이 한반도의 농경민들로부터 받았던 위협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일방성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화민족이 여자의 자궁으로 번식에 의해 소수종족들을 흡수하려는 그 위협에 대해 한반도의 사람들은 별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가능성도 보인다. 즉, 한반도 사람들의 무의식은 소수종족인 북방인들의 정체에 대해 애정(愛情) 및 존중심을 갖지 않았다. 지구 가이아는 이와 같은 한반도의 사람들과 중화민족들에게 체벌(體罰)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이를 한국의 역사에 견줄 때, 기독교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단초는 무엇인가?그것은 ‘서양의 기독교는 격동의 시대에 한반도의 사람들을 개종시켰던 중요한 동인 중 하나’였다^^ 이 종교가 갖는 특성은 오랑캐를 짓밟고 싶어하던 한반도의 사람들을 개종시킴에 있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북방의 오랑캐들에 대해 무언가 아주 무거운 업보(業報)를 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업보의 결과로 주어진 강력한 페널티 가운데 하나가 어쩌면 기독교이다! 성경은 점령당한 이스라엘을 편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점령했던 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가 신의 종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공자(孔子)의 후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조선 시대의 유교이념이 나의 가문에게는 영광이요, 유리한 통치이념으로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배우는가? 우리에게 내재된 집단무의식적 소원에 충실하려고 교회에 다닌다면 그것이 진정 회개(悔改)와 반성(反省)이 맞겠는가!
 
공헌배 박사 페이스북 글 (2023.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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