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과 보혜사
선교학 용어 “10/40창문”은 기독교 선교가 가장 안 된 지역을 가리킨다. 미국 선교신학자이며 선교전략가인 루이스 부시(Luis Bush)가 처음 사용했다.
북위 10도와 40도 사이의 지구는 북 아프리카에서 시작하여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해 있다.
이 지역은 세계 인구의 2/3인 50억이 살고 있고 짧은 평균수명에 유아사망률과 문맹률이 최고로 높다. 이곳에 분포된 종교들은 주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자연숭배 토속종교, 공산주의 무신론 등이다. 28개의 이슬람교 국가들(총 인구 18억), 2개의 힌두교 국가들(13억), 8개의 불교 국가들(5.3억)이 집결돼 있다.
이 곳의 특징은 국민 연소득 5백불 미만의 세계 최대의 극심한 빈곤 지역이다. 수년 전 필자는 동남아 태국에서 있은 세계선교지도자 컨퍼런스 강사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이 선교지역을 현장 답사하면서 빈곤을 직접 실감 할 수 있었다.
기독교 선교가 가장 안 된 세계 미전도 종족 65개 국가들 중 55개국이 ”10/40 창문” 지역에 속해 있다. 미전도 종족 인구의 95페센트가 이곳에 밀집돼 있다. 복음화율은 4퍼센트 미만이다.
루이스 부시가 “창문”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지역에 선교 기회의 창문이 열려있다는 희망적인 의미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지역 국가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고 반기독교적 규제가 대단히 엄격한 상태다.
그래서 “세계선교기도 정보”(Operation World)라는 책을 해마다 발행하는 패트릭 존스톤(Patrick Johnstone)은 이 지역을 기독교에 대한 완강한 “저항지대”(Resistant Belt)로 부르고 있다.
선교학에는 “두 측면 분석”(Two-Dimensional Analysis)이라는 선교 이론이 있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지역과 배척한 지역을 비교분석 해 본 결과, 기독교를 배척한 지역의 90퍼센트 이상이 빈곤과 재난을 훨씬 더 많이 겪고 있음을 조사 통계학적으로 밝힌 이론이다.
이 이론을 반대하는 일부 자유주의적 선교학자도 있지만, 이것은 그냥 반대하면서 가볍게 흘려버릴 일은 아니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 지역의 비참한 빈곤을 외면하며 방관하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이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잘 모른 채 자기들의 사랑 개념만을 적용시킨 데서 오는 무지한 오해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가장 정점에 있는 장엄한 속성은 거룩성(Holiness)이요 그 아래에 사랑(Love)과 공의(Justice)가 두 갈래로 펼쳐 있어서 하나님의 주요 속성의 삼각형을 이룬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공의와 상호 연결되어 있는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자, 불신자, 자유주의자들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성경적인 사랑 개념으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시험코자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질문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4-40).
반기독교주의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이 주신 계명의 순서를 자기들 임의대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는 크고 첫째 계명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무시하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둘째 계명인 이웃사랑을 더 내세우며 비참한 이웃을 방관하는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감히 하나님을 비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사랑의 순서는 첫째가 하나님이요 둘째가 이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는 마음에, 참된 이웃사랑이 있을 수 없다.
계명(Commandment)은 명령이라는 뜻이다. 자기 생각이나 취향에 근거하여 하나님 존재여부를 논하지 말고 예수님의 명령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교훈이다. 인간 생각이나 논리로 보자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불신할 이유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인간적인 생각과 논리들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먼저 믿고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는 무조건성과 절대성이 전제되어 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Absolute God)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임의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순서를 바꾸면 하나님이 교훈하신 사랑의 개념에 혼란이 온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때 진정한 이웃사랑이 뒤 따라 온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제쳐놓고 이웃사랑을 운운하면 필연코 그 사랑은 자기를 내세우는 “소리 나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사실상 세계 여러 종교가운데 가장 인도주의적 사랑의 구제와 자선 봉사활동을 많이 해 온 것이 기독교이다. 하나님이 빈곤과 재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는 비판대신에, 인간은 먼저 마음, 목숨,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만사를 처리하시는지 그분의 심오한 뜻과 계획을 믿음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그때 인류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심오한 사랑과 경륜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계명”이라고 해서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그 계명에 순종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영육 간에 사랑을 베풀라고 하신 선교명령을 지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계명”이기에 인간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님께 간구하고 그 분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말씀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간구를 들으시고 항상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The Paraclete; 파라크레이토스)이시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가장 어려운 계명”을 잘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바로 곁에서 돕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한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 9:23). 할렐루야!
황현조 박사
World Gospel Time 2022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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