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평양기생학교 그림엽서 (일제말기, 일본어 판)
최정철의 아래의 두 글은 기독교 신앙에서 크게 이탈된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보다 진화론과 우연성을 진리로 천명하며, 동성애반대와 차별금지법 반대를 노예제도폐지 반대와 동일시한다. 글쓴이는 자신을 캐나다연합교회 목사(은퇴)이며 전 지질학자로 소개한다. 기독교 안에 기독교 '신앙'이 아닌 신념을 가진 자들도 있으며,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캐나다연합교회(WCC 회원교회)의 현주소를 짐직하게 한다. 글 1은 <베리타스> (2021.2.15.)에, 글 2는 <향린교회 홈페이지>(2020.7.23.경)에 게재된 적이 있다. 글쓴이가 널리 알리려는 의도를 존중하고 기독교변증가, 신학연구자, 복음전도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게재한다.
글 1: 성서는 절대적인 권위가 아니다!
세계에는 다양한 인종들과 민족들이 살고 있다. 인류 집단은 얼굴 모양, 피부색, 체형, 골격 등 생물학적인 특성에 따라 인종으로 나누고, 언어, 종교, 생활양식 등 문화적인 특성에 따라 민족으로 구분한다. 인류의 언어는 오랜 세월 동안 한 민족의 역사, 문화, 정치에 매우 긴밀하고 복잡하게 작용했으며, 그 민족의 통일된 문화유산이다.
또한 언어는 인류의 문화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세계에는 약 6,500여 개의 크고 작은 언어공동체가 있다. 또한 특유의 관습이나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나누어진 민족이 전 세계적으로 약 3,0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민족들은 환경에 따라서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고유의 종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계의 문화권들과 종교들은 각자 자신들에게 가장 적절한 경전을 만들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발전시켰다. 이렇게 인류사회는 상호복합문화의 다원주의 세계를 이루고 있듯이,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세계는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개체들은 한 몸으로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
이 우주의 법칙에서 어느 한 개체가 전체를 대표하거나 다른 모든 개체들을 통제하고 조정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어느 특정 인종 또는 민족이 가장 우수하다든지, 어느 한 종교와 경전이 온 인류에게 절대적인 권위가 될 수 없다.
인류의 진화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2백60만 년 전에 최초의 인간 호모 하빌리스가 등장했으며, 20-30만 년 전 최초의 이성적인 인간 원시 호모 싸피엔스가 출현했다. 진화과정은 계속되어 7만 년 전 현대 호모 싸피엔스 인간은 처음으로 원시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처음으로 종교적 인식을 갖게 되었던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종교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증거는 아직 언어가 발명되기 이전 중기 구석기 시대(50-30만 년 전)부터 발견되고 있다. 1만8천 년 전, 아직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 인간은 그림과 상징으로 자신들의 체험과 인식을 표현함으로써 정보를 축적해왔다.
드디어 인류의 최초의 문자라고 할 수 있는 설형문자가 기원전 3500년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에서 탄생했고, 고전 문명의 시작과 함께 기원전 1800년에 최초의 창조신화 길가메쉬 서사시가 기록되었다. 고대인들은 신화에서 우주세계를 상중하 삼층천 즉 상층에는 신들이 살고, 중간층에는 인간이 살고, 하층에는 죄인들이 사는 것으로 상상했으며, 이때 신화들에서 신(god)이란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하느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구약성서 창세기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기록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중근동 지역에 보편화되어 있던 신화였다. 다시 말해 창조신화의 원조는 구약성서가 기록된 기원전 1500-400 년 보다 훨씬 이전에 기원전 3000-4000 년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창조신화였다. 결국 성서의 삼층 세계관적 창조론은 중근동 지역의 보편적인 창조론을 인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바벨론에 유배되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포로생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하느님을 바벨론의 창조주 보다 더 훌륭한 하느님으로 격상하는 창조론을 창작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다신론은 유일신론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신중하게 읽으면, 기존의 수메르 문명의 창조론과 유대인의 창조론은 그 내용들이 너무나 흡사하며 유대인들의 플래저리즘(plagiarism 베끼기)이 숨길 수 없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류사에서 성서는 인간 생물종의 260만 년의 진화 여정에서 출현했다. 다시 말해 4만 년 전 최초의 언어가 출현하고, 5천5백 년 전에 문자가 발명되면서, 장구한 인류역사의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인간의 작품이다. 성서와 하느님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먼저 인간과 인간의 언어가 있었으며, 나중에 인간의 의식과 인간성에서 성서와 하느님이 만들어졌다.
기독교와 그 모태인 유대교의 하느님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성서의 형성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원전 1500년경에 유대인들은 인간의 삶에 대해 당시의 보편적인 신화들을 인용하여 구약성서 일부를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600-400년에 하느님의 의미를 확장해서 구약성서 전체를 집대성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구약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읽으면 마치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는듯하다. 물론 창세기뿐만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가 신화를 배제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서는 신화들의 모음집이다.
한편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기원 후 100-200년 사이에 예수의 전승에 대한 수많은 사본들이 필사가들에 의해 복사되었으며, 이것들도 당시의 보편적인 신화들을 인용했다. 또한 신구약성서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오늘의 성서는 수많은 사본들 중 극히 일부를 수집하여 주관적인 수정첨삭으로 편집한 사본들의 모음집이다. 필사가들에 의해 무수한 사본들이 복사되면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퇴색했다.
설상가상으로 참 사람 예수의 우주적인 하느님은 실종되고, 예수가 부족적인 하느님으로 둔갑했다. 결국 사본들의 모음집인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이 탄생했다. 한편 수많은 사본들이 난잡하게 베껴질 때, 어떤 필사가는 자신의 사본의 권위를 보호하고 혼잡스런 변개를 막기 위해 자신의 사본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가감할 수 없다는 개인적인 경고를 삽입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원초적으로 고대인들이 경전과 신을 만들게 된 종교적 인식은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보호장치와 안전분리대를 구축하려는 심리적인 불안감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경험을 문자의 형태로 보관할 수 없었던 원시시대에 지진, 천둥번개, 화산폭발,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현상은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에 있었다. 또한 주변의 강한 외적의 침략도 한정된 정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는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종교적 인식에 대해서 뇌 과학과 진화 심리학에 따르면 종교는 인류 역사의 초기에 인간뇌의 구조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으며, 주목해야 할 것은 태초로부터 완성된 종교가 출현하지 않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환경에 가장 적절하게 적응하는 종교로 진화하는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종교의 진화과정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인식은 뇌의 진화의 결과의 하나이며, 거기에 따라 종교적, 철학적 사고가 가능하게 되었다. 종교는 인간뇌의 인지기능과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다. 즉 종교는 하느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뇌에서 탄생했다.
종교는 문자와 성서 기록과 하느님이 등장하기보다 수만 년 전에 먼저 인간 조상들 사이에 있었다. 원시적인 종교의식은 일반적으로 매우 구두적인 음악이나 춤을 포함하며, 종교적 인식을 표현했다. 인간 뇌의 작용인 언어가 먼저 있었으며, 언어에서 종교가 생겨났다.
결국 성서문자근본주의 신자들이 주장하는 빅뱅 이전의 지적설계의 하느님 말씀은 인간의 체험과 언어와 지식과 정보가 등장한지 적어도 20-30만 년 후에 만들어졌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와 138억 년 전 빅뱅 이전에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창조론은 원시적이고 비상식적인 망상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출판된 서적은 대략 1억 3천만 권이다. 기독교 성서는 그 중에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책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서를 포함해서 모든 서적들은 인간의 체험과 자율적인 의식과 인간성에서 만들어진 언어적인 창작품이다.
물론 기독교를 포함해서 지구상의 모든 부족적인 종교체제들은 자신들의 경전은 하늘 위에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내려준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경전이 자신들에게는 가장 소중하다는 은유적인 고백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출현과 인류 문명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의식과 인간성으로부터 탄생한 언어적 표현이다. 인간의 언어가 세계관과 가치관과 신들을 만들었듯이 인간의 창작품이다.
하느님은 4만 년 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인식혁명 이래, 인간의 체험과 깨달음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진리로써의 하느님은 인간의 온전한 삶에 대한 요청이며, 삶의 방식이며 표현이다.
우리 인간은 이 우주세계에서 우연히 자연적으로 출현했다. 그러나 인간은 장구한 진화과정에서 다른 생물종과는 달리 의식이 생겨났으며 인간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왜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율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차별적이고 우월적인 종교적 믿음 보다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습에서 탐구할 수 있으며,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살아낼 수 있다.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과학이 발견한 138억 년의 우주진화 이야기 즉 공개적 계시에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부족적이고 이기적인 종교적 사심을 내려놓으면 가정과 사회가 안정되고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행복할 수 있다. 또한 성서라는 작은 그림 속에 감금되기 보다는 큰 그림의 우주세계에서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가면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이 생기가 넘치고,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고, 더욱 너그러워지며 새로운 용기와 희망과 기쁨이 생기고, 심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원초적으로 기독교는 믿음체계가 만든 하느님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그런 하느님을 믿는 종교체제와 믿음체계의 탄압과 착취 아래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수동적으로 비굴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시작한 '삶의 종교'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성전종교의 하느님을 거부하고 광야에서 가르쳤던 참 사람 예수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에서 탄생한 생명의 종교이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유일한 목적은 오직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세상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보고, 새로운 귀로 새롭게 들으며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을 고양하기 위해서이다.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절대적인 권위로 맹신하고, 다른 종교인들과 무종교인들을 폄하하고 차별하는 유치한 짓을 중단해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살아내는 삶이 경건한 예배와 문자적인 성서와 하늘 문을 두드리는 기도 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종교는 인간의 온전한 삶을 위한 보조수단이며, 최종목표가 아니다. 하느님과 성서와 종교 보다 가장 먼저 인간의 의식과 인간성이 있었으며, 인간은 하느님과 종교 보다 더 소중하다.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는 설득력이 없는 비상식적인 주장이다. 또한 성서는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다. 참 사람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아내었던 "하느님의 말씀"은 문자적인 성경책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인간성에서 인식될 수 있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과 비전이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 필자의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베리타스> (2021.2.15.),
글 2: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된다는 구약성서는 현대시대에 와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차별금지법”을 신경질적으로 반대하는 보수적인 신자들은 구약성서 레위기의 2개의 구절을 인용한다. 즉 레위기(18:22, 20:13)에 동성애자를 죄 값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말이 있다. 이것이 어떻게 21세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레위기는 기원전 6세기 후반 바벨론 포로기에 주로 제사문서 기자들(the priestly writers)이라고 알려진 유대 종교 지도자 집단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 문서는 당시에 온 유대인들이 강제적으로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할 때에 민족의 생존이 절벽 끝에 선 것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기록되었다. 레위기는 나라를 잃고 먼 이국땅에서 고향땅을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그들의 존재감을 지탱할 수 있는 강렬한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레위기의 중심에 소위 성결법전이라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벨론에 유배된 유대인들은 비굴한 포로생활에서 민족의 주체성과 단결과 생존을 위해 자신들은 바벨론 민족 보다 더 우수하다는 차별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런 차별성은 약소한 유대 민족의 전체 역사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방식이었다. 즉 자기 자신들을 다른 민족들과 차별하여 성별(聖別)되게 규정하는 성결법전은 포로민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유일한 선택이었다.
유대인들은 성결법전을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시켰는데, (1) 첫째로, 매주 제7일을 안식일로 정하고 노동을 금할 뿐만 아니라 회당에 참석함으로써 그 날을 엄수하도록 명했다. 포로생활 하던 그들은 이 전통을 유대교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성서의 가장 서두에 기록된 6일 동안의 창조 이야기를 창작했고, 또한 하느님은 창조 제7일에 휴식을 취함으로써 태초에 이 안식일 전통을 인준했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 하느님은 제7일을 축복하고 유대 민족의 성별(聖別)을 선포하는 수단으로서 안식일을 영원히 지키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2) 둘째로, 포로생활 하던 유대인들은 정결음식법을 채택했다. 종교 체계가 그 구성원들에게 엄격한 식단을 강요하면 그 체계의 신봉자들은 신앙 공동체 밖에서 먹지 않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것은 인간관계가 정상적으로 맺어지는 데 기본이므로 유대교 율법에 따라 요리된 정결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차별성을 장려하고 식사 때마다 성별(聖別)의 요청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3) 셋째로,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할례를 유대교의 표징으로 격상시켰다. 유대 남성들의 몸에 그들의 종교 및 민족 주체성의 징표를 붙이는 효과를 낳았으며 부정할 수 없는 차별성을 창안한 것이었다.
레위기의 성결법전은 유대인들이 강대국에 의해 피정복 백성으로 유배당한 신세가 되었지만 바벨론인과는 구별되어야 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사문서 기자들은 자신들을 정복한 민족들 속에 다양한 성적(姓的)행태가 있음을 감지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한계적인 지식과 당시 부족적 편견에 근거하여 기원전 6세기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한 엄격한 도덕법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21세기 현대의학의 성적본능에 대한 발견을 알 수 없었던 성서 저자들은 동성애 혐오증적인 구절들 (18:22, 20:13)을 삽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부족주의적 생존의 두려움을 드러내면서, 유대민족을 바벨론인으로부터 차별화하고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레위기는 유대인 생활의 핵심인 성서의 처음 다섯 권 가운데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율법”(Torah)이라고 하는 이 다섯 권은 모세의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시간이 흘러 율법은 초기 및 후기 예언자들의 문서와 기타 문서들이 보충되어 히브리 성서(구약성서)를 집대성하게 되었다. 그 후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히브리 성서에 소위 신약성서라는 것을 첨부하여 기독교 성서를 만들었으며, 마침내 이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당시의 편견들이 이 책들 속에 궁극적으로 자리를 잡고, 당시 유대인들이 규정한 정의에 따라 자칭 성역(聖域) 밖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비인간화 과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상 성서를 기록한 고대인들은 자신들의지식의 한계와 역사적 환경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과학적인 학문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사상이 낡은 관행에 도전하면,과거의 태도, 편견 과 차별과 혐오와 특히 무지는 사라지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이처럼 매우 자연적이며 정상적이고 지속적인 진화과정에 큰 걸림돌과 장애물이 있는 데, 성서문자근본주의 광신자들이 주장하기를 성서의 저자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21세기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을 멋대로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이 문서들을 절대적으로 신성한 경전으로 착각하는 신자들은 3000년 전 고대 성서 저자들의 한계와 무지를 문자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고대의 편견을 영속시켰다. 오늘날 이러한 행태는 폐쇄적인 집단의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의 부산물이다. 지금 동성애를 혐오하고 저주하는 자들이 이용하는 최대의 방어선은 오직 고대 성서와 교회가 만든 이분법적 교리이다. 사실상 우리의 사회에서 게이 남성와 레즈비안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가장 추악하게 드러내고 있는 집단이 바로 개신교 보수진영과 가톨릭교회이다.
성서근본주의 신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해서 무작정 믿기 때문에 성서의 전체적인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성서의 좁고 어두운 한 쪽 구석만을 바라보면서, 성서는 확실히 동성애를 저주하고 있으며, 만일 동성애자들이 용납되면 성서의 삶의 어떤 영역에서나 도덕적 권위를 잃게 될 것이라는 편견과 혐오와 무지에 빠져있다.
성서 66권은 33,039절(구약23,090절, 신약 7,949절)로 구성되었으며, 동성애 혐오에 대한 구절은 오직 9개(구약 5개, 신약 4개: 성서에 동성애에 대한 언급들이 선명하지 않다.) 뿐이다. 만일 동성애 문제가 성서 전체의 핵심 사상이고, 기독교의 운명을 결절짓는 것이라면 적어도 수백개의 구절로 더욱 분명한 지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은 말문이 막히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를, “그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식의 낡고 설득력이 없는 억지주장을 맴돌고 있다. 2천-3천 년 전에 기록된 고대 성서 한 권의 책으로 138억 년의 우주 역사와 260만-30만 년의 인간 생물종의 진화역사와 4만 년의 인류사회의 문명발달사와 지난 수세기 동안의 현대과학의 발달과 인간의자아의식의 진화과정에 대한 문제들에 답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에 대한 성서 전체에서 단지 9개 구절의 논거는 너무나 미미하고 위약하며 가련해 보인다. 아마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신자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병적인 히스테리 차원에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는 레스비안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고대 성서 저자들은 그런 것이 있는 줄 미쳐 몰랐던 모양이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글자 하나하나를 직역해서 믿어야 한다면 신자들은 레스비안은 용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자들이 레스비안을 혐오하는 것은 비성서적이고 불신앙이다. 이렇게 문자적인 직역주의 믿음의 모순이 성서 전체에 수없이 많이 깔려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너희 가축 가운데서 서로 다른 종류끼리 교미시켜서는 안 된다.”(레위기 19:19)는 레위기 금지법을 따른다면 현대 과학자들은 가축들을 개량하기 위해 낙농업 분야에서 놀라운 일들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인류사회의 식량문제는 더욱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의식이 끊이 없이 진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의식이란, 동성애는 부족적이고 이분법적 종교체계의 낡음 믿은이 주장하듯이 “죄”가 아니며, 치료해야하는 질병도 아니다. 다만 동성애자들은 대다수 사람들과는 다른 성적본능을 지니고 태어났을 뿐이며, 이것은 질병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21세기의 사회는 동성애라는 성적본능을 완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왼손잡이와 빨간 머리와 같이, 인간 가족 내의 다른 소수자 입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불안하게 되고 공포 속에 빠져들어가서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때로는 살해함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죄악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호소로 정당화될 때, 그 죄악은 악마적 차원으로 악화된다. 이것이 현재 종교 제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현주소이다. 성서문자근본주의 신자들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공포가 있다. 그 공포는 성서가 문자적으로 추행이라고 한 것을 허용하다면, 기독교인들의 차별화는 소멸될 것이고 성서의 “절대적인 하느님의 말씀”은 붕괴될 것이며, 신자들의 정체성은 애매모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찬반의 싸움은 격렬해지고 최종적으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인용하는 신자들은 패배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의 교회 기독교는 변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사멸할 것이다.
21세기의 압도적인 과학 및 의학 지식은 불가피한 결론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성적 본능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다. 성적 본능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에 대해 눈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도덕적 과오도 아니고 종교적 죄도 아니다. 구약성서 레위기 18장과 20장(“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20:13))에 기록된 동성애 혐오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무지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부적절하다. 그것들은 레위기 및 율법의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발달의 단계들로서, 우리는 이미 그 단계들을 넘어섰으며, 그 단계들 이상으로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폐기해버린 낡은 단계일 뿐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우리의 편견과 심지어는 우리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성서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느님 신앙의 본질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정체성과 기독교인의 삶과 신앙의 핵심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의 의미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면서 가르친 조건 없는 사랑은 공중에 떠도는 공허한 말이 된다.
이제 모든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동성애 혐오증적 편견을 고수할 것인지 결단해야 할 때가 왔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두 가지 태도를 동시에 병립하는 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며 더욱이 불가능하다. 또한 참 사람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을 따르든지 아니면 만들어진 예수의 편견을 고집할 것인지에 타협의 길은 없다.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나의 선택에 다른 사람이 개입해서 나의 자율성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성서의 동성애 혐오 구절들이 기독교인의 행동 지침에 계속 악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당장 폐기처분해야 한다.
오늘날 파괴적인 동성애 혐오증을 옹호하는 교회는 우리의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편견과 혐오와 폭력으로 이룩된 교회는 절대로 예수의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도 아니다. 100여년전에 성서를 인용하여 노예제도를 옹호하던 교회가 죽었듯이, 오늘 동성애 혐오와 여성차별과 인종차별과 종교차별과 빈부차별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는 교회도 죽어야 할 때가 되었다. 동성애 혐오와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구절을 인용하는 거짓과 위선을 교회와 우리의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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