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텐베르크 중심가, 루터가 설교하던 타운교회당
정통주의 해석학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8
1. 정통주의 신학자들
유럽 16세기말과 17세기는 정통주의 시대였다. 로마가톨릭정통주의, 프로테스탄트정통주의 곧 루터파 정통주의와 개혁파 정통주의가 풍미했다.
트렌트공의회(1545-1563)는 로마가톨릭 정통주의의 상징이다. 종교개혁운동의 신학적 강령에 응답하려고 회집했다. 칭의론과 함께, 성경과 기독교 전통을 모두 정통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위한 두 원천이라는 이론을 천명했다. 오직 성경만이 기독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하고 일관성 있고 충분한 안내 지침을 제공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트렌트공의회 신학에 따르면 교회의 전통은 기독교 신앙의 한 본질적인 원천을 형성한다. 교회의 최고 권위자 곧 교황은 성경 본문의 특정 해석이 정통인가 아닌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주석적, 교리적으로 정확한가, 교회전통에 일치하는가 등을 판단하는 궁극적 권위를 가진다고 했다.
‘오직 성경’은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 논박,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이 논쟁에 사용된 논증들은 매우 중요한 일련의 해석학적 확신들을 보여준다.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시기에 성경 전체의 축자영감교리가 발전했다. 이 시기의 종교개혁신학자 마티아스 일리리쿠스(1520-1575), 요하네스 큐엔스테트(1617-1688), 아브라함 칼로비우스(1612-1686) 등은 성경전체의 축자영감 교리와 성경무오성 원리를 발전시켰다. 성경의 실제 텍스트는 무오(infallible)하며 성령이 말씀하는 바를 받아 기록되었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신학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했다. 성경 본문의 어느 부분도 그 진실성을 의심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사상가들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이 무오한 텍스트에서 도출된 일련의 교리적 진술에 대한 지적인 수용을 뜻했다. 흥미롭게도 루터파와 개혁파 신자들은 모두 이 무오한 텍스트에서 그들의 교리에 도달하려고 동일한 이성적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투었다. 각자 자신들만이 정통신앙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려 하면서도 '오직 성경'을 천명하는 종교개혁의 본질적인 측면 하나를 배신했다. 교리주의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론을 정립한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성경 본문을 비평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신학자들에 따르면 성경은 인간 이성의 임무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비판을 방어하는 원칙이다. 이 과정에서 성경은 형식적인 권위의 한 원칙 역할을 하고, 성경해석은 교리적 이론 정립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원칙이므로 결코 잘못이 있을 수가 없다. 항상 옳다. 성경이 옳지 않다면 기독교 신앙은 확실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교리주의는 “모두 옳든지 아니면 모두 틀렸든지”라는 발상을 가진다. 이 같은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론은 개신교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이런 종류의 프로테스탄티즘의 대적들에게 대항하는 변증으로는 매우 유용했다.
정통주의자들, 성경주의 옹호자들은 자연과학의 진보를 공격했다. 자연과학이 성경에 대한 순수한 문자적 해석 가능성을 의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통주의 시대에 루터파 정통주의, 개혁파 정통주의, 로마가톨릭 정통주의자들은 연합하여 새로 등장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철저히 거부했다. 기독교적 연대기의 전통적인 내용과 아담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는 믿음에 대한 공격에만 반발한 것이 아니다.
케플러(Kepler)와 갈릴레이(Galilei)의 발견들은 이 신학 진영들이 천명하는 정통 신학을 뒤엎기 시작했다. 우주와 시간에 대한 전통적인 성경적 세계관이 벼랑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출현한 이후의 그리스-로마 세계의 모든 사상들과 신념들의 기초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자연과학의 도전을 피할 수 없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인간이성을 모든 사상과 믿음의 유일한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신학자들은 철학자들의 주장에 직면했다. 이로 말미암아 신학에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정통신학자들은 신학의 절대우위성이 종결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 신학자들은 새로운 철학과 자연과학이 제기한 문제들과 비평적으로 씨름하지 않고, 인간이성의 요구를 차단시켰다. 모든 종류의 과학적 진보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태도는 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으로 남았다. 다가올 수세기 동안에 때로는 기독교 전체의 특징이 되기도 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독일에서 새로운 세계관 주창자들과 비평적 대화를 하기보다는 인간이성을 여전히 신학의 시녀로 이해했다. 합리적 논증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관심사들을 방어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인간 이성이 비평적으로 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2. 중도파 신학자들
한편, 네델란드의 발다사 베커(1634-1698), 크리스토프 위티치(1625-1687)와 같은 신학자들은 신학에 대한 데카르트주의적 접근방법을 발전시켰다. 근대 이성의 요구와 전통적 신학 사이를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이 신학자들의 시도는 방법과 지식을 분리하는 4가지 가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1) 철학과 신학은 분리된다. 이 둘은 인식의 방식이 다르고, 상이한 주제와 상이한 자료를 다루며, 관심도 다르다. (2) 성경이 명확하고도 확실하게 진술하는 한 신학의 영역에서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3) 인식(knowing)의 철학적 방식(mode)은 자연 사물의 영역에 있어서 자유롭고 비평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당한 방법이다. (4) 위 두 방법의 진술들은 상호모순이 없다.
이 강령은 최초로 성경에 대한 잘 정의된 신학적 비평이었다. 성경은 인간지식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성경이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지 않은 영역들이 있다. 자연과 역사에 대한 성경과 과학의 진술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이 주장은 수용이론의 도움을 받았다.
수용이론에 따르면, 성령은 성경 저자들을 통해 자연에 관해 그 당시 사람들의 ‘편견’에 적합한 방식으로 말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론은 성경의 일반적 권위 유지를 의미했지만 동시에 비평에 대한 계속된 발전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다가오는 계몽주의 시대가 문제 삼고 거부한 것은 다름 아닌 이 고대의 ‘편견’이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이 온건한 견해를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의 대화를 증진시키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동료 정통 신학자들로부터 기독교 신학의 정통적 입장을 배신했다고 공격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자들로부터 자연과 사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갖기에는 미흡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온건파 신학자들은 최소한 신학 영역에서 새로운 해석학적 상황을 인식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리고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성경 본문의 권위와 타당성에 대한 비판에 어떻게 기독인들이 자기주장의 기본적 토대인 이 텍스트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가?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 성경에 대한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해석학적인 접근방법은 이데올로기적인 성격 때문에 해석학 발전에 이바지하지 못했다. 이들의 접근방법은 권위의 객체인 텍스트와 비평적으로 사고하는 주체인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합리적으로 초월할 수 있다는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과 같았다.
18세기 후기의 신학자들이 증명했듯이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해석학적 업적도, 전체적인 성경적 세계관과 전통적인 신학의 보편주의적 주장에 대한 당시의 조직적인 비평도, 교리주의와 도피주의의 새로운 형태에 의해서 완전히 제거될 수 없었다.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을 형식주의적이고, 교리주의적으로 다루는 입장에 대항하는 사조였다. 경건주의는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것으로 여겼다. 경건주의자들의 개인적 체험은 신학적 통찰과 성경연구에 기초를 제공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같은 강령은 성경을 소홀하게 다루는 길로 인도했다. 어쨌든, 성경은 신앙의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위한 하나의 자료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신앙 체험이 역사 속에서 현현한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진술보다 앞서는가? 기독교 신앙은 사적인 신앙의 영역에서만 발견, 표현되며 더 이상 공적인 에클레시아(교회)에서는 발견되거나 표현되지 않는가?
여기서 기독교 신앙에서 성경에 대한 사적인 사용과 공적인 사용 사이의 균형 곧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관주의적 이해와 공동체적 이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인간 이성은 성경이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개신교 정통주의 대변인들이 주장하듯이 이성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적인가? 아니면 17세기의 온건한 신학적 데카르트주의의 옹호자들과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이성은 모든 성경이해 활동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인가? 계몽주의 시대의 흐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3. 계몽주의 해석학
독일 할레대학교는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크리스천 볼프(1679-1754), 지그문트 야곱 바움가르텐(1706-1757), 요한 잘로모 제물러(1725-1791)와 같은 수많은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강연과 저술에서 인간 이성을 재평가하고 비이성적인 권위의 출현에 대항하는 데 이바지했다.
볼프와 바움가르텐은 신앙과 교회의 전통적인 개신교적 이해의 수호를 위해 보다 이성적인 기준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두었다. 제물러는 신학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해석학적 출발을 시도했다. 합리적인 신학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그는 물론 울프와 바움가르텐의 영향을 받았지만, 성경과 교리사에 대한 그의 역사적-비평적 연구 그리고 해석학적 강령은 개신교 신학의 신기원을 열었다.
제물러는 비평적 역사 탐구자의 눈과 종교사가의 눈으로 성경에 접근한 최초의 독일 개신교 신학자이다. 제물러는 텍스트 해석의 방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지 않았다. 신학적 해석학의 기초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제안했다. 성경해석이 더 이상 특별한 일련의 교리를 증명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텍스트에 대한 교리적 독해를 끝내고 참된 비평적 독해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물러의 해석학은 매우 넓은 영역을 지녔다. 문법, 수사학, 논리학, 본문전승사, 번역, 사본비평, 올바른 석의의 문제 등을 다 다루었다. 해석학의 주 임무가 텍스트를 성경 저자들이 이해했던 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물러는 개신교 정통주의의 공시적(synchronistic) 텍스트 이해에 대항하여 성경 본문의 통시적(diachronic) 독해를 주장했다. 해석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의 문법적-역사적 의미(sensus litteralis historicus)를 밝히는 것이다.
제물러에 따르면, 비평적 이해 이론에는 두 규칙이 필수적이다. (1) 성경 해석자는 자신과 성경 본문 사이의 역사적인 거리를 알아야 한다. (2) 성경 해석학은 텍스트 해석의 보편적인 규칙을 존중해야 하지만 본문의 특별한 성격과 내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두 번째 주장은 제물러가 텍스트 이해에서 영적인 특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 텍스트와 하나님의 말씀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성경 텍스트가 모든 경건한 것들을 그 속에 이입시키는 독해를 통해 해석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성경 텍스트는 그 자체가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것들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역사적-비평적 방법으로 해석자에 의해 복구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역사적-비평적 해석방법을 구약에 적용한 제물러는 마르틴 루터를 포함한 이전 해석학자들과 중요한 차이를 보였다. 제물러는 구약성경을 예표론 혹은 모형론 관점으로 읽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성경 본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구약성경의 어떤 책들, 예컨대 역사서들이나 「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고 했다.
제물러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본문을 교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경고 없이 재해석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자유가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점은 루터를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신학에서도 논리의 규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지적함으로써 저 위대한 종교개혁자를 뛰어넘었다.
제물러는 영감 받은 분야로 간주된 신학의 특별한 지위를 거부했다. 인간 이성의 가치를 하락시켰다는 이유로 루터를 비난했으며, 개인적인 계시를 인간 이성의 능력에 첨가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경건주의의 주장도 거부했다.
제물러는 종교개혁적 성경원칙 곧 ‘오직성경’(sola scriptura)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의 형식적인 권위로부터 성경 해석자들을 해방시켜 성경 본문의 자료적인 권위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게 했다. 이 의미에서 제물러는 안디옥 학파와 루터의 해석학적 전통에 굳건히 서 있었다.
제물러는 로마가톨릭 신학자 리차드 시몬(1638-1712)을 존경했다. 성경의 비평적 이해에 관한 시몬의 저서들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직접 편집하고 소개했다.
시몬은 인류의 단일 조상 신앙에 대한 전통적인 신념을 비판했다. 오경의 저자가 여러 명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견해는 성경에 대한 정통적 교리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제물러는 자신이 이 새로운 비평 전통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텍스트 자체를 자세히 연구하기보다 자기들의 교리를 텍스트에 강요하면서 성경 본문을 침묵하게 만드는 신학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제물러의 비평적 접근은 ‘적응’(accommodation) 이론에 담겨 있다. 제물러의 적응이론의 핵심은 예수와 성경 저자들은 그들과 대화하고 있는 민중의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함으로서 청중들을 ‘적응’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제물러에 따르면. 이 적응이론으로 신약성경의 다양한 텍스트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언어적 차이점들만이 아니라 성경 안에 나타나는 교리적인 차이들도 설명할 수 있다. 이 이론은 비평적 성경 연구방법의 등장에 기여했다.
제물러의 적응이론과 다른 두 개의 적응이론이 있다. 루터파 정통주의의 대변자들은 성령이 성경 본문을 받아쓰는 저자들의 스타일에 자신을 적응시켰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은 축자 영감이론을 수호하려는 변증적인 노력이었다.
또 다른 적응이론은 제물러의 스승 바움가르텐이 제시한 것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성경의 설명과 근대 과학자들의 설명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성경 저자들이 자연법칙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 동시대인들의 무지를 고려하여 그것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기술했다고 주장했다.
제물러의 적응이론은 성경적 전통 안에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함으로써 성경학을 발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적응이론은 그 성격상 복귀적이고 변증적이었다. 제물러의 이론은 교리적인 금기를 과감히 깨뜨리면서까지 성경 본문을 읽으려 한다.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제물러의 공헌은 크다. 정통주의적 교리주의와 성경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 진정한 과학적 신학은 참으로 학문적인 곧 합리적이고 비평적인 성경해석 방법을 발달시켜야 함을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학이 하나의 종교적 실천이 아니라 공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론에 따라 움직이는 기독교 종교에 대한 하나의 합리적 강화(講話)라고 주장했다.
제물러는 이 방법론의 해석학적인 면을 발전시켰다. 그의 해석학은 4권의 책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신학적 해석학을 위한 하나의 준비」(Preparation for Theological Hermeneutics, 1760-1769)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전통적 해석학에 대한 도전을 비평적으로 분석했다.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비평적 논의의 필요성을 재촉했다.
5.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권위
요컨대, 신약시대로부터 계몽주의시대까지의 신학적 해석학의 발전은 모든 해석학적 가르침의 역사가 기독교 해석학의 역사와 동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모든 해석학은 두 양극 사이에서 움직여 왔다. 안디옥 학파가 처음으로 주창한 문자적-문법적 방법을 선호하든지, 아니면 보다 강력한 교리적인 관심사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풍유적인 경향을 지녀 왔다. 대체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방법이 우세였다.
모든 형태의 신학적 해석학은 이 두 양극의 변형이다. 모든 해석자들은 그들이 텍스트 그 자체를 가능한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특정 독해 전통에 따라 텍스트를 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성경 본문을 교리적으로 읽는 방법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도 신학적 논의의 하나의 중요한 쟁점이다. 이것은 권위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교회, 지역 공동체, 또는 독자 개인이 특정 성경독해가 신임할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 누가 또는 무엇이 이를 결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가?
안디옥 전통을 따랐던 해석학자들은 새로운 신학적 발견과 신학적 개혁에 개방적이었다. 알렉산드리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해석학자들은 어떤 신학적인 진술의 원상태(status quo)를 옹호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제물러의 신학적 해석학은 안디옥 학파적인 특징을 채택한다. 안디옥 해석학의 대부(代父)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적인 철학 원칙에 기초를 둔 신학적 해석학의 방법은 18세기 말에 비로소 논의가 시작되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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