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두셀라와 세례 요한
이영진 목사 (호서대학교 교수)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이다. 969년을 살았다. 실제로 969년을 살았을까? 최근 음바 고토라는 146세 인도네시아 남성이 최고령자로 소개된 적 있다. 작년에 죽었다. 리칭위안이란 사람은 1677년에 태어나 1933년까지 살았다는 중국발 보도도 있다. 256세를 산 셈이다. 므두셀라 나이를 허구라 할 수 없다. 실존 150-300살들을 목전에 두니 신화적 내음 물씬해질 뿐 아니라 이 신빙성 역시 보도에 의존하는 까닭이다. 성경도 기록인 것처럼. 몇 살까지 살았느냐는 본말이 아니다. 어떻게 뭘 하고 살았느냐가 천 년의 질을 결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 복지천국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므두셀라가 969년간을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이 고도로 압축된 기록물을 가장 잘 풀어낸 것은 저명한 주석서가 아니라 큰 논란을 야기시켰던 대중 영화 한 편이었다. 바로 ‘노아’(2014)라는 작품이다. 비록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교회를 통해 상상하던 착하고 유약한 이미지의 노아는 찾아볼 수 없지만, 노쇠한 므두셀라가 저 멀리서 들이닥치는 해일(海溢)의 물을 두 팔 벌려 맞이하며 장렬하게 숨을 거두는 장면은 그 압축된 행간과 잘 부합하기에 인상적이다. 대개의 기독교 독자들은 이러한 장면이 대체 성서 어디에 나오느냐는 일차원적 이해와 충돌하기 마련이지만서도.
므두셀라의 아버지 에녹은 단명한 인물이다. 구약의 계보 상에서 ‘죽었다’(무트. מוּת)고 표현된 대부분의 인물과 달리 유독 ‘데려갔다’고 기재된 에녹의 종말을 신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이라 주석하고 있는데, 에녹이 65세에 낳은 자기 아들의 이름에 마치 ‘무트’(죽음)가 연상되는 음가를 집어넣어준 것은 결코 공교로운 일이 아니다. 그 바람에 “man of the dart”(화살 인간)라는 뜻의 이름 므두셀라는 마치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또는 죽음을 보내버리는) 탄도처럼 연상되기 때문이다. 지구 종말의 조짐은 이미 에녹에서부터 인식이 되었던 셈이다.
아담의 8대손인 므두셀라가 죽은 해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와 들어맞는다. 홍수가 들이닥친 해에 실제 그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므두셀라가 아들 라멕을 먼저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난 뒤 5년이 흐른 시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 영화상에서 미처 홍수의 조짐을 완숙하게 인식해내지 못하고 있는 노아로 하여금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므두셀라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는 삽화는 결코 지나친 상상력이 아니다. 바로 이 대목이 땅에 강타하는 해일을 한 몸으로 맞은 므두셀라의 깊은 인상과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체 왜 노아의 방주에 함께 승선하지 않았을까. 자리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된 시대로 진입하여 만나는 므두셀라 같은 인물은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일 것이다. 그는 자기 이름에 부착된 표지 ‘세례’ 요한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세례를 고스란히 예수께 양도한다. 그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해일로 끌어 모아 땅을 강타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전 세대를 말끔히 소멸시키는 물과 함께 수장되고, 새로운 세대에 자신은 승선하지 않는다. 그의 이와 같은 독특한 사역은 ‘거듭남’의 세례라는 종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 물세례, 곧 성령세례가 땅으로 진입하는 길을 터 주고 예비하였다. 마치 므두셀라가 양 팔을 벌려 한 몸으로 홍수 해일을 맞이한 것처럼.
그는 대체 왜 하나님 나라에 함께 승선하지 않았을까. 자리가 모자라서?
이러한 물음은 므두셀라가 과연 969살까지 살았을까? 라는 궁금증만큼이나 무익한 질의이다. 그것은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이 죽은 나이가 하필이면 777세였다는 점, 그리고 조상 아담으로부터 므두셀라 자신은 7번째 후손인데 반하여 카인의 마지막 후손 두발가인은 최초의 살인자 조상 카인으로부터 6번째 후손이었다는 현란한 수비 속에서 그의 나이 969수란, 불완전 수 9 사이에서 종말의 수 6을 견인한다. 실로 므.투.셀.라.(מְתוּשֶׁלַח) 곧 “man of the dart”(인간 탄도)인 것이다. 이 도상아래 969수는 그의 종말론적 사명을 표지한다. 불로장생, 많이 살았다는 수비가 아니라.
자고로 홍수지말에는 물이 많되 마실 물이 없는 법이라고는 하나, 이 시대에는 므두셀라나 세례 요한 같이 자신을 수몰시켜 더러운 물의 시대를 끝장내려는 자들이 없기에 더욱 물이 탁하다. 도리어 그들은 방주 안으로 그 탁한 물을 끌어들여와 새 시대를 저지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다 같은 형국이다.
※ 이 글은 후배가 신문을 창간한다 하여 창간호용으로 작성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