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왈도파에 사죄하다
가톨릭교회는 발도파를 왜 미워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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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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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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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교황, 발도파에 사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 교황께서 발도파 박해에 대한 사과를 공식적으로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내에서 행해졌던 불의한 박해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살아남은 신자들을 격려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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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가 복음적인 가난을 살려고 했던 이들을 왜 박해했을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교회사적, 사회적 배경 등을 함께 연구해 봐야할 듯 합니다. 기사에는 베드로 발도라고 적혀 있지만, 피에르 발도(Pierre Valdo, 1140-1206 경)라고 불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가 프랑스 남동부 리옹의 부자 상인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지요. 프랑스어권에서는 오히려 보데스(Vaudès)로 더 알려져 있고, 피에르 발데스(Pierre Valdès)라고도 불립니다. 그가 여러 가지로 불리는 까닭은 그 이름이 남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에 걸친 지역의 언어, 즉 로망스어에 기원을 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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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도파의 목사 에우제니오 베르나르디니를 발도파 교회에서 포옹하고 있다.(사진 출처 = C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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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발도파에 대해, "12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리옹에 살던 부자인 베드로 발도가 성경의 복음적 가난을 따라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며 시작된 일종의 복음주의 교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교회는 제3차 라테라노공의회(1179)에서 이들의 청빈 서원은 인정했으나 평신도가 사제의 초청 없이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결국 1184년에 베로나 시노드에서 이단으로 규정됐다. 그 뒤 17세기까지 많은 발도파 신자가 처형됐다”고 언급합니다.
이 기사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데, 발도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중시해온 교계제도를 건드린 것에 대해 괘씸죄를 얻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발도파의 교회에서는 사제가 평신도에게 설교를 청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분위기였나 봅니다. 본래 전례지침상 강론은 사제나 부제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강론보다는 좀 더 폭넓은 개념인 설교도 미사 중에는, 사제가 설교자를 초대할 때 가능합니다(강론과 설교에 대해서는, “강론과 설교는 다른 것이라고요?”를 함께 읽어보세요). 따라서 주례 사제가 초대하지 않으면 아무나 설교를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아마도 발도파 교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모든 이들이 세례를 통해 받게 되는 예언직, (보편) 사제직, 왕직에 대한 의미를 더욱 적극적으로 본 듯합니다.
게다가 발도는 자신의 돈으로 로망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 전부를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고자 희사했고, 리옹의 가난한 이들의 형제회(La Fraternité des Pauvres de Lyon)라는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부자 청년의 비유”(마태 19,16-30)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결과였습니다. 이 단체가 발도파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운동이 1184년의 결정으로 이단시되고 발도는 결국 파문당합니다.
간단히 정리해 보면, 발도파는 매우 매력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179년 발도와 그 제자들은 함께 로마로 가서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보편 사제직, 라틴어가 아닌 서민 언어로 쓰여진 복음의 필요성, 그리고 교회제도의 가난함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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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도파의 상징.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
하지만, 교회는 그들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견고한 교계제도가 있는데, 보편 사도직 운운하며 아무나 설교를 한다는 게 말할 가치고 없다고 여겨졌는지도 모르겠급니다. 아무튼 그 결과, 발도파는 자신들의 신학이 위험한 것으로 단죄당하긴 했지만, 파문은 받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파문은 그러니까 1184년에 이루어집니다.
단죄당하고 파문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발도파는 리옹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몬테 지방(그 중심 도시는 토리노입니다. 이 도시의 발도파 교회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신 것이고요)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남부, 뤼브롱 지역에서는 발도파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이 개혁교회가 파문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마르틴 루터(1483-1546)를 시작으로 개신교회가 생겨난 것을 볼 때, 발도파가 제시한 내용이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 놀랍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해도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려 했던 것은 교회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약간 나중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이 가난을 실천하고자 모였던 것을 보면, 가난한 교회는 오래동안 권력을 쥐어 오면서 부패해 가던 교회에 희망과 대안을 되찾아 준 생활양식이었습니다.
어쩌면 교황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에게 필요한 가난이란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교회가 쇄신하기 위해 실제로 다시 필요한 것임을 보여 주시려고, 오래 전부터 복음적 가난을 살고자 했던 갈라진 형제를 찾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듯, 두 교회는 신음하는 인류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병고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이주민들에게, 사회로부터 밀려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서로 배척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중심으로 연대함으로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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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