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복음주의 신학동향
박용규 박사(총신대학교 교회사)
들어가면서
20세기 초 현대주의대 근본주의 논쟁 후 영향력을 상실했던 복음주의 신학이 1960년대부터 생명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 신학이 회복되는 일련의 과정은 복음주의 운동과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진행되었다. 1942년에 국제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가 설립되면서 복음주의 운동은 복음주의 신학의 본질을 규명하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현대적인 상황속에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복음주의 운동의 구체적인 진행을 위하여 복음주의 신학회(ETS)가 조직되었고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유산을 재평가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소수의 목소리였던 복음주의자들이 1970년대는 미국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1976년에 뉴스위크지는 그해를 복음주의 해로 규정할 만큼 복음주의자들은 소수의 집단에서 다수의 집단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복음주의 운동의 발흥과함께 복음주의 신학을 규명하고 재조명하려는 일련의 작품들이 계속하여 등장하였다. 때문에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은 미국에서 발흥한 소위 복음주의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면서 본 논문은 1950년대 이후의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동향을 소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미국 복음주의 신학동향에 초점을 맞추기는 하지만 유럽과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의 동향을 충실히 고려하면서 기술하려고 한다.
II. 최근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동향
1.복음주의 신학의 회복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근본주의대 현대주의 논쟁이후 쇄퇴해진 복음주의 신학의 발흥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 신학의 발흥을 촉진시킨 요인은 다음 세가지 방향에서 살펴찾아 볼 수 있다. 첫째는 1930년대의 현대주의대 근본주의 논쟁의 후속타로 발생한 신정통주의이다. 둘째는 복음주의 운동의 발흥이다. NAE의 설립과 크리스차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의 창간, 풀러 신학교의 설립등 일련의 복음주의 운동은 복음주의 신학을 촉진하는 계기를 제공하여주었다. 셋째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교회연합운동과 토착화 신학이다.
1930년대 근본주의대 현대주의 논쟁이 시들기 시작하면서 근본주의 현대주의 모두는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없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반문화주의 반지성주의 분리주의로 낙인이 찍히면서 세인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았다. 현대주의는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 공백을 메꾸어 준것이 바로 신정통주의이다. 신정통주의는 1930년대부터 미국의 기독교를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라인홀드 니버와 리차드 니버이다. 이 두 형제는 미국의 자유주의 현대주의의 거대한 물결을 신정통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신정통주의가 복음주의자들에게 항상 부정적으로 비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복음주의자들이 바르트와 브루너의 신정통주의의 밑바닥에 깔린 실존주의 철학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리고 성경과 구원의 정확한 본질에 관한 두 신학자의 말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동의할 수 없었지만, 두 신학자의 자유주의 비평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낙관주의적 견해와 사회복음의 환상적 미망을 공격”함으로써 신정통주의자들이 “현대주의적 인본주의 잡초”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한 역사신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바르트주의의 하나의 미국적 변형으로 1930년대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신정통주의는 미국 기독교에 “알찬 복음주의의 씨앗을 파종”할 수 있는 신학적 토양을 제공하여 주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속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발흥과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국의 복음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신학교들이다. 벧엘신학교, 칼빈신학교, 콘코디아 신학교, 달라스 신학교, 풀러신학교, 고든-콘웰신학교, 리폼드신학교,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등은 그 중에 대표적인 신학교들이다. 이들 신학교 교수들은 저술과 후진 양육을 통하여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의 계승발전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여왔다. 특별히 이들 신학교에서 발간되는 신학지는 대중들에게 복음주의 신학을 전수키켜주는 중요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왔다. 1939년에 창간된 웨스트민스터 신학지(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와 1939년에 창간된 콘코디아 신학지(Concordia Theological Monthly) 대표적인 실례이다. 이와 함께,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와 같은 일련의 대중적인 종교잡지 역시 복음주의 신학을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근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 칼 헨리는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초대 편집인으로 사역하면서 그 잡지를 복음주의 신학의 대변지로 부상시켜 놓았다. 이런 모든 노력의 결과로 말미암아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1920년대의 혹독한 종교적 싸움과 1930년대의 절망적 사회 상황 충격”을 극복하고 “기울어진 복음주의 신학의 배를 바로 세우기 시작하였다.”
2. 역사적 복음주의 신학의 재발견
이런 상황속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주의 유산의 재평가, 복음주의 변증학, 복음주의 신학과 삶과의 관계 규명, 그리고 신정통주의 반영등 네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첫번째 복음주의 신학의 동향은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우리의 상황속에서 재정립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에드워드 카넬(Edward Carnell; 1919-1967), 버나드 램(Bernard Ramm; 1916-), 칼 헨리(Carl F. Henry; 1913)등을 꼽을 수 있다. 에드워드 카넬은 하바드 대학 신학부와 보스톤 대학을 졸업하고 고든신학교와 풀러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하였다. 그는 폭넓은 복음주의 유산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의 시대적 상황에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카넬은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연구영역을 단순히 복음주의 신학에만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선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과소 평가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들도 신학적인 유산속에서 발굴하여 복음주의 신학의 자료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카넬은 실존주의적인 선조로 알려진 키엘케가르와 미국 신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공정한 평가를 제시하였다. 이렇듯 그는 복음주의 신학에서 잘 다루지 않았거나 편견을 갖고 접하려고 했던 선대복음주의 신학자들의 방법을 넘어 실존주의적인 신학접근과 신정통주의적 신학접근에 대하여 방법론적인 면에서 문호를 열어 놓았다. 그가 볼때 이들의 신학을 방법론적인 면에서 복음주의 신학을 풍요롭고 깊게 만들어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넬은 주저하지 않고 복음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지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자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크리스찬 센츄리지에도 수많은 글들을 기고하였다. 그는 비복음주의자들에게도 복음주의 유산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기를 원하였다. 바로 이것은 선대 복음주의자들이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던 유감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정통신학의 실례(the Case for Orthodoxy Theology, 1959)는 그런 그의 입장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카넬은 이 책에서 미국의 선대 복음주의자들, 특별히 메이첸과 같은 정통주의자들을 근본주의자로 보면서 이들이 복음주의 신학을 효과적으로 생명있게 전달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신학 자체와 신학적 무드와를 분간하면서 메이첸의 신학은 정통주의가 경직된 신학을 형성하여 복음주의 유산을 잘 전달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때문에 기독교 정통주의 신학의 변호는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어져야 하며 바로 그런 그의 확신이 기독교 신앙: 변증(Christian Commitment: An Apologetic, 1957)에 잘 반영되었다.
한편으로 반지성적인 전통주의적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정통주의의 실존주의적 해석의 약점들을 동시에 지적하여 새로운 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신학을 제창하려고 하였다. 그가 추구하려는 새로운 복음주의란 전통적인 신학을 계승.발전시키면서 폐쇄주의나 반지성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거나 소홀이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가 볼때, 20세기 초에 복음주의 신학이 생명력을 상실한 것은 그들의 신학의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카넬의 사고 속에서는, 복음주의 신학이 복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비복음주의자들에게도 생명력이 있으며 우리의 시대에 꼭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폭넚게 복음주의 신학을 정립하려는 카넬의 입장은 근본주의자들로부터는 새로운 형태의 현대주의라는 비판을, 신정통주의자들로부터는 근본주의자들과 동류라는 이중적인 비난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복음주의 신학의 제창은 1950년대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복음주의 운동과 복음주의 신학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복음주의 유산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재정립하려는 노력을 한 또하나의 인물은 침례교 신학자 버나드 램이다. 그는 성경해석, 성령의 사역, 신앙의 변호, 그리스도인의 행동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이런 모든 작품 속에서 복음주의적 통찰을 제공하여 주었다. 1954년에 출간된 기독교인의 과학관과 성경관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연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 복음주의자들의 과학이해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여 주었다. 램은 복음주의자들이 과학을 배타적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과학을 절대적인 삶의 표준으로 인식해서도 안된다고 보았다. 카넬처럼 “복음주의 신학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추구하기를 원하였던 램은 이와 관련하여 근본주의자들과 비복음주의자들 모두를 비판하였다. 램은 “성경을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이유로 근본주의자들을 비평했는가 하면 동시에 성경에 나타난 신 지식을 신자의 신 체험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이유로 비 복음주의 개신교 신학 주창자들을 공박하기도 하였다.” 상당히 많은 저술을 통하여 복음주의 신학을 재정의 하기를 원하였다. 램이 얼마나 많은 주제에 관심이 있었는가를 반영하여 준다.
복음주의 신학과 관련된 또 다른 램의 관심은 복음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와의 관계이다. 1973년에 출판된 복음주의 유산(The Evangelical Heritage)에서 램은 신정통주의 유산을 재발견하여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고 있다. 램이 신정통주의의 신학적 가치를 인정하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효과적으로 공격한 신정통주의의 업적을 인정하여 주어야 한다. 둘째, 신정통주의자들이 성경을 신학의 원천과 권위임을 호소한 것을 인정하여 주어야 한다.셋째, 복음주의자들은 신정통주의자들이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 뿐만 아니라 멜랑톤, 부처, 즈빙글리 같은 개혁자들의 유산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에 대하여 인정하여 주어야 한다. 넷째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사 전반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기초하여 신학작업을 한 신정통주의자들의 업적을 인정하여 주어야 한다. 다섯째 로마 가톨릭 신학을 구체적으로 비판한 바르트에게 복음주의자들은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루너와 바르트의 방대한 작품들을 접함으로써 복음주의자들은 신학, 특별히 역사신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때문에 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요약하건대,.. 바르트와 부르너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그들의 장점을 간과하게 만들 것이다.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바르트와 브루너를 연구한다면 자기 자신의 신학지식을 빈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을 변증적으로 연구한다면 악은 제거하고 선을 취하는 것이며 진리를 위해 문제의 오류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을 현대에 다시 발흥시키는데 공헌한 다른 인물은 칼 헨리이다. 침례교도이면서 개혁파 복음주의자인 칼 헨리는 노던 뱁티스트 신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보스톤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풀러신학교와 노던 뱁티스트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가 복음주의 신학을 재천명하기 시작하면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56년에 창간된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지 편집자로 일하면서부터이다.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지면을 통해 헨리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복음주의 신학자들에게 역사적인 복음주의 개신교 사상의 생명력을 증언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장을 마련하였다. 헨리의 복음주의 신학의 재발견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지성의 회복(Remaking of the Modern Mind, 1946)과 개신교 딜레마(The Protestant Dilema, 1948)는 복음주의 신학을 재발견하여 복음주의 신학이 아직도 생명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복음주의 유산을 재발견하기 위한 헨리의 최근의 노력으로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상당한 격려를 얻었다.
복음주의 유산을 오늘의 상황에서 재발견하려는 카넬, 램, 헨리 및 그와 뜻을 같이한 학자들의 저술과 사역은 복음주의 신학이 1920년대와 1030년대에 숱한 곤란을 겪었으나 1960년대 이후 오늘날에는 미국 기독교 현장에 역동적으로 부활하고 있음을 생동감있게 보여주었다.
3. 복음주의 변증학
최근 미국 복음주의 신학동향은 변증학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복음주의 신학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동안 일련의 복음주의 변증가들은 복음주의 신학을 변호하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변증학은 전통적인 변증학과 전제주의적 변증학으로 대별된다. 전통적인 변증학은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에서 출발하여 어거스틴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상당히 폭이 넓으며 T.C.하몬스, 윌리암 헨리 그린, 조지 팍 피셔, 워필드(B.B. Warfield), 제임스 오르등 선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여기에 속하여 최근 학자로는 스튜어트 해킷, 노르만 가이슬러, 뮬린스(E.Y. Mullins), J.올리버 부스웰, 존 스타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최근 전통적인 복음주의 변증학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대표적인 사람은 몽고메리이다.
존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는 루터교 미조리 대회에 속한 루터교역사신학자이다. 일찌기 메이첸이 바울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 1921)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 1930)등에서 기독교의 역사성을 변호하였던 것처럼, 몽고메리는 기독교 신앙이 역사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변호하였다. “그는 불신자들이 역사의 기록을 공정하고 편견없이 고찰한다면 예수가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기독교와 역사성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찰하여 기독교 본질과 역사와의 상관관계를 규명하였다. 최근에 로날드 내쉬가 기독교 신앙과 역사이해에서 기독교 신앙과 역사와의 관계는 필수적이라고 지적한 것과 거의 맥을 같이한다.
기독교와 역사와의 상관관계를 통하여 기독교를 변호한 몽고메리 저술에는 역사와 기독교, 기독교 신학의 자멸이 있다. 예수의 부활을 해명하는 최상의 방법은 바로 부활의 주체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설명이라고 말한다. 진리 자체이신 그분이 증거하는 것은 믿을만 하다는 것이 바로 몽고메리의 변증학의 중심 내용이다. 몽고메리의 변증학은 복음주의 신학이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설정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으며 역사와 기독교 신앙과의 관계를 다시한번 진지하게 고찰하는 계기를 제공하여주었다.
두번째 최근의 복음주의 변증학의 동향은 전제주의적 변증학이다.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옹호하는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자로는 칼 헨리, 버나드 램, 제이스 패커, 프란시스 쇄퍼, 그리고 에드워드 카넬이 있다. 전제주의 변증학은 화란의 신학자 카이퍼와 바빙크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전제주의 변증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최근의 화란계 신학자들로는 벌카우어와 헤르만 도이벨트가 있다. 미국내 가장 강력한 전제주의 변증학의 주탕자는 코넬리우스 반틸과 고든 클락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Til)은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체계화시켜 널리 보급시킨 대표적인 복음주의 변증가로 알려졌다. 그는 몽고메리와 같은 전통적 변증학과 다른 시각에서 변증학을 완성하였다. 전통적인 변증학자들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공정하게 편견없이 볼 수 있다”고 믿었으나, 반틸은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공정하게 편견없이 볼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인간들은 하나의 전제를 가지고 출발한다고 보았다. 반틸에 따르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제사실들과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을 의식적으로 왜곡하기 때문에 편견없이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권위를 수용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신의 편견과 모순을 넘어 역사적 진리와 사실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반틸은 하나의 전제를 가지고 변증학을 세워나가기 때문에 반틸의 변증학은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 변증학으로 알려졌다. 성경의 무오성과 절대적 권위를 확신한 반틸은 자신의 저서 신 현대주의(The New Modernism, 1946)에서 유럽의 신정통주의가 새로운 현대주의에 불과하다고 공격하였다. 이런 입장은 9년 후에 나온 신앙의 변호(The Defence of the Faith, 1955)에서 재확인되었다. 역사적으로 접근했던 몽고메리의 변증학과는 달리 철학적으로 접근한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학은 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적대적 세상과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신학적 입지를 제공”해 주었다.
반틸외에 전제주의적 입장에 서서 복음주의 신학을 약간 다른 방향에서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있게 제시한 인물은 칼 헨리와 앨빈 플랜팅가이다. 칼 헨리의 하나님, 계시, 권위는 “하나님의 계시가 근본적으로 이성적”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헨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진술로 요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이성과 계시와의 상관관계를 피력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최근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헨리보다도 더 철학적인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고 한 인물들은 미국 그랜드 래피드에 있는 칼빈대학의 기독교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복음주의적인 관점에서 철학적으로 변증하였다. 프랜팅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 이성적인 차원에서 고찰할 때에도 타당성을 지닌다는 점이며, 무신론적 전제들이 아직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그것들이 아직껏 입증된 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는 종종 선대 복음주의자들이 소홀이 다루어 왔던 지성적 변증을 철학적인 안목으로 과감하게 제시하였다. 그의 작품, 하나님, 자유, 악이 바로 그것이다. 그외에도 일련의 학자들이, 복음주의 신앙인들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학문적인 연구를 통하여 입증하여주었다.
앞서 언급한 신학자들의 철학적, 변증학적 접근과는 달리 순수 복음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전통적인 복음주의 유산을 집대성한 최근의 복음주의 저술로는 제임스 올리버 부스웰(James Oliver Buswell, Jr.)의 조직 신학(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Religion, 1962-1953), 헨리 클랜런스 티이센(Henry Clarence Thiessen)의 조직신학입문(Introductory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1949)이 있다. 부스웰의 조직신학은 “전통적이고 철저히 보수적인 개신교 신학의 기본원리 전체를 본래대로 잘 간직하였다.”부스웰은 1920년대 이후 상실된 복음주의 신학 유산을 현대에 체계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티이센 역시 칼빈주의자로서 “자유주의 신학과 싸우는데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알미니안 계통의 조직신학으로는 헨리 오튼 윌리(Henry Orton Wiley)의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 1940-1943)을 들수 있을 것이다. 나사렛 성결교 출신학자인 저자는 웨슬리 전통인 기독교인의 완전성화를 매우 알차고 심도있게 피력하였다.
4. 신학과 프락시스의 연계
세번째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의 동향은 신학이 신학교나 교회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기 위하여 일련의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194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근본주의들이라고 자처했던 이들 가운데는 근본주의 공동체가 사회적인 책임을 너무도 등한시하고 신학을 이데올로기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런 자신들의 문제점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계승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부정적인 면인 반지성주의적이고 반문화주의적인 성향을 극복하고 복음주의 신앙을 사회와의 연계성 속에서 제시하기를 원하였다.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책임과 지성적인 책임, 문화적인 책임을 재평가하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이들은 선대 근본주의자들의 사회적 무관심을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비판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인 관심을 적극적으로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칼 헨리의 현대근본주의의 불안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은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John Howard Yodder의 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 1972), 리차드 모우의 정치와 성경 드라마(Politics and the Biblical Drama, 1976), 폴 헨리의 복음주의 정치학, 로버트린더와 피어라드의 정치학: 기독교 행동원리, 스테펜 몬스마의 The Unraveling of America) 그리고 1973년에 있었던 “복음주의 사회적 관심에 대한 감사적 웍크샵”(Thankgiving Workshop on evangelical Social concern)은 복음주의자들이 좀더 진지하게 사회, 문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촉구하는 작품 혹은 사건들이다. 이들 작품의 사상이 얼마나 복음주의 유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하는 평가문제에 대해서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상호이견이 있겠지만, 이것들이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회적 책임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는 사실에는 일치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동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문제를 거론한 것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진보주의적인 노선에 있는자들이 앞장섰던 것은 사실이지만 순수 복음주의 입장에 서서 기독교 사상과 정치적 권리와의 상관관계를 진지하게 제시하려고 했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있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 디어필드에 있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 Harold O.J. Brown교수는 The Restitution of the Republic를 통하여 기독교 사상과 정치와의 관계를, Gary North는 기독교 경제학 서론(An Introduction to Christian Economics)에서 성경적인 경제관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게리 노스는 “성경의 인간관과 재물관은 경제 문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배격하고 공적인 사회 윤리로의 회귀를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1960년대 이후 일련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복음주의 유산이 사회적인 무관심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5. 신정통주의 반영
또 하나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 동향은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복음주의 신학의 내용과 범위가 폭넚어졌다는 점이다. 바르트나 신정통주의 영향을 받은 일련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이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의 주류임을 천명하려고 노력하여왔다. 이런 움직임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린스톤을 비롯한 미국의 장로교 교단이 유럽의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바르트의 사상은 장로교의 사상의 주류로 형성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신정통주의의 실존주의적 신학에 영향을 받은 로버트 폴(Obert Paul), 존 레이스(John Leith),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이었던 존 메케이(John Mackay), 그리고 케넷 해밀톤(Kenneth Hamilton)은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그후 한때 영향력을 상실했던 신정통주의가 1970년대 이후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방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일련의 작품들을 저술하면서 신정통주의는 미국 복음주의의 사상에 다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도날드 블러쉬(Donald Bloesch), 버나드 램(Bernard Ramm), 그리고 로저스 맥킴(Rogers와 McKim)은 바르트의 실존주의 영향을 받거나 신정통주의 신학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다.
신정통주의의 복음주의 신학의 반영은 복음주의 성경관에 잘 현시되었다. 지난 20년동안 복음주의 신학계는 성경관을 놓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논쟁은 세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첫째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 둘째는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입장에 선 이들과 셋째는 둘사이에 중도 노선을 견지하려고 하는 이들이다. 신정통주의의 입장에 선 이들은 성경관이라는 측면에서 종교개혁과 종교개혁이후를 구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교리가 1560년에서 1600년 사이에 종교개혁 2세대들인 개신교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John Woodbridge가 지적하듯이, “성경의 무오성이 16세기 후반과 17세기 만들어졌다는 신정통주의 주장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학자들에게 보다는 오늘날에 설득력이 없다.” 신정통주의 입장을 따르는 “많은 학자들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복음주의 입장은 성경적인 관점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시각으로부터도 지탱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들 신정통주의 학자들은 성경무오성 교리가 종교개혁자들과 초대교회로부터 떠난 가르침이라고 믿는다. 몇몇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의 기원을 16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정통주의 해석에 의하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실존주의 신앙 동기들이 2세대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작품 속에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으나 Theodore Beza, Philip Melanchon, 그리고 Lambert Daneau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과 동일시하기 시작하여 성서지상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을 신뢰로 정의하였으나 그들의 제자들이 신앙과 지적 동의로 동일시 하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앙을 하나의 선물로 이해하였으나 그의 제자들은 다시 부활하는 아리스토델리안니즘의 영향을 받아 유신론적 논증을 자연신학에서 끌어내어 체계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검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그리스도의 참된 계시를 증거하는 오류있는 인간의 책으로 보았으나 그들의 제자들은 성경을 계시 자체로 이해하였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이다.
이런 종류의 “신정통주의의 구조”의 탁월한 대변자 가운데 한사람인 어니스트 바이저(Earnest Bizer)는 이런 전반적인 분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16세기 후반에 발생한 합리주의를 극복하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신정통주의 역사사료의 영향은 아직도 널리 만연되어 있다. 로저스(Rogers)와 맥킴(McKim)의 제의는 신정통주의 역사사료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더구나 버나드 램(Ramm)과 블러쉬(Bloesch)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복음주의자의 신학적 특성으로 정의하여 제시하기도 했다.
성경관과 관련된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동향은 로저스와 맥킴과 같이 정통적 복음주의와 신정통주의와의 중간노선을 견지하려는 경향이다. 그들은 최근에 권위와 성경해석: 역사적 접근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저술은 강력한 성경무오성 변호자인 해롤드 린셀의 성경에 대한 논쟁( The Battle for the Bible)이라는 저술과 국제성경무오협회(ICBI)의 성경관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었다. 로저스와 맥킴의 저술은 인간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무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성경관은 성경의 권위를 구월과 행위면에만 국한 시키는 것이지 역사나 과학적인 측변에까지 확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이 영감된 권위있는 말씀이지만 소위 “기술적인 오류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복음주의 영역에서 한창 논란이 일고 있는 성경관 논쟁은 신정통주의적 성경해석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것은 신정통주의가 복음주의 신학계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사실은 이들이 무조건 신정통주의 신학을 긍정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복음주의 내에서 조금은 급진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블러쉬는 자신의 일련의 작품, 경건의 위, 그리스도인의 삶과 구원, Jesus is Victor라는 작품에서 바르트를 재평가하려고 하였다. 블러쉬는 하나님의 주권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바르트의 개혁주의 입장을 긍정하면서도 바르트가 “현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와 사탄과의 실제적인 전투”를 부정했다고 그를 비판하고 있다. 버나드 램 역시 신정통주의의 유산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사용하려고 하면서도 신정통주의 입장을 무조건 긍정만 하지는 않았다.
III. 최근의 유럽 복음주의 신학동향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과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은 분리할수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밀접한 연계성 속에서 발전하여 왔다. 한 역사가가 지적한 것처럼, “청교도 시대로부터 요한 웨슬리와 다비(J.N. Darby)를 거쳐오면서 영국 복음주의의 영향이 미국의 현장을 떠난 적은 없다. 현대에는 영국 정통주의가 미국의 ‘종교적 불황기’에 영어권에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유지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최근의 대표적인 영국복음주의 신학자로는 루이스(C,S, Lewis), 브루스(F.F. Bruce), 존 스타트(John Stott), 제임스 패커(J.I. Packer)등을 나열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스크루테입 서신(Scretape Letters, 1941), 기적 (Miracles, 1947), 명목상의 기독교(Mere Christianity, 1952)를 포함한 루이스(1898-1963)의 수많은 작품들은 “미국 복음주의 신학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미국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루이스의 신학에 동의를 표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미국 복음주의 신학에 영향을 미친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대중의 언어를 사용하여 “수정같이 명료한 산문”으로 변증적으로 설득력있게 제시한 그의 작품들은 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미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마크 놀에 따르면 그의 작품들은 “미국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신학계와 일반 교계로 하여금 신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루이스 보다도 직접적으로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브루스(F.F. Bruce), 존 스타트(John Stott), 그리고 패커(J.I. Packer)등이있다. 맨체스터 교수 브루스는 복음주의 신약학 발전에 대단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스타트와 패커는 복음주의 신학을 한 층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영국외에 복음주의 신학이 소중하게 발전되어 온곳은 화란이다. 특별히 헤르만 도이빌트(Herman Dooyeweerd)와 벌카우어(G.C. Berkouwer)는 복음주의 신학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도이벨드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신앙이 신학의 영역 뿐만 아니라 삶의 전영역에서 소중히 간직되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이것은 그의 “영역주권론”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표출되었다. 벌카우어의 책들은 거의 영역되어 화란 뿐만 아니라 미국를 비롯 영어권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벌카우어의 모든 신학에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화란의 복음주의 유산을 오늘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재정립하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1952년에 시작한 그의 저서 “교리연구”(Studies in Dogmatic)는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교회론 그리고 그외 수많은 복음주의 신학 주제들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은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히 연구되어 왔지만, 영국과 화란에서 복음주의 유산이 상당히 보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복음주의 신학이 그렇게 활동적이지 못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법학자인 자크 엘률(Jacques Ellul)은 “현대의 세속 생활 탐구에 기초하여” 전통적인 복음주의 유산을 재평가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그의 서술들이 번역 소개되어 젊은층에 어필하고 있다.
독일의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복음주의 신학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는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를 들 수 있을 듯하다. 튜빙겐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바이엘하우스는 복음주의 신학이 아직도 독일에 잔존하고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실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복음주의 신학을 선교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를 훌륭하게 제시하였다. 때문에 그의 복음주의 신학은 미국의 선교신학과 제삼세계의 선교신학의 발전에 자극제가 되어 왔다. 그는 한국을 몇차례 방문하면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학회와 연계성을 가지면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과 운동에도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복음주의 신학에 활력을 가져다 준 또 한명의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은 루이스와 비교할 때 훨씬 신학적이고 보수적인 방향에서, 바이엘하우스와 비교할 때에는 실천적이고 지성적인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프랜시스 쇄퍼는 근본주의적인 배경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았으며서도 그의 신학에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결여되었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통하여 복음주의자들이 어떻게 세상에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설득력있게 제시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How Should We Then Live?, 1976),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 1968), 그리고 세상 속에 선 교회(The Church Before the Watching World, 1971) 모두는 쇄퍼의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을 효과적으로 보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는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지성적 성숙을 보여주어야 된다고 보았다. 계시에 대한 객관적인 권위만을 강조한 나머지 복음의 인격적 체험을 무시한 선대 복음주의 신학을 경계한 쇄퍼는,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하신 성경의 약속들을 신실하게 이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쇄퍼의 작품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삶속에서 담대하게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세계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현시하여 주었다. 자연히 현실성이 강조되는 그의 작품들은 신학과 신앙과 삶과의 삼중 관계를 독립된 관계로 보지 않고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지닌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로 이해하였다. 한국에 미친 그의 영향은 세계 어느 복음주의 신학자들 보다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복음주의 신학의 지성적 성숙이라는 쇄퍼의 모토는 쇄잔해진 복음주의 신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쇄퍼는 선대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지 못한 사랑을 복음주의 신학의 또 하나의 모습으로 제시함으로써 복음주의 신학을 건실하게 만들어 주었다.
III.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동향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은 서구에서 그렇듯이 하루 아침에 태동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자유주의 토착화신학의 문제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논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이전의 한국의 신학적 사조는 소위 정통주의, 진보주의, 문화-자유주의 공동체로 대별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 토착화 신학이 발흥하면서 신학 방향이 수정되었다. 획일적으로 대별할 수는 없으나, 한국 복음주의 신학방향은 1960년대 이후 토착화신학, 복음주의 신학, 그리고 근본주의 신학으로 대별될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토착화 신학의 발흥과 무관하지 않다. 일련의 신학자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토착화신학에서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한신, 감신, 그리고 연신의 다수 교수들에 의하여 생겨났다. 토착화의 개념과 한계나 방향을 논하기도 전에 토착화 신학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토착화 신학을 성급히 완성된 신학체계로 인식하고 정립하려고 하였다. 복음의 본질과 한국의 상황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논하기도 전에 복음을 한국의 상황에서 상황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것은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은 여러가지 발흥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 토착화신학에 대한 반동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한국의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동향은 세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토착화 신학에 맞서 복음주의 신학의 내용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1971년에 설립되었다가 1981년에 재조직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회는 성경과 신학이라는 논문집을 계속 출간하여 복음주의 신학의 내용을 규명하려고 노력하여왔다. 이 중에는 한국의 토착화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들이 한결 같이 제기하는 것은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상호 균형잡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토착화 신학은 텍스트 즉 복음의 본질 보다는 칸텍스트에 지나치게 강조를 둔 것이 사실이다. 성경과 신학에 나타난 한국의 민중신학 비판이나 1992년 목회와 신학에서 계흭한 한국의 토착화신학과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복음주의적 조명 또한 토착화 신학을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 속에서 분석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 복음주의 신학은 토착화신학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을 떠나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점을 학문적이고 객관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의 복음주의는 복음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선교적인 과제를 제시할 필요가 생겼다. 1973년 빌리그래함 서울전도집회를 계기로 한국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대중 전도집회가 잇달아 열렸다. 그것은 한국의 교회에 새로운 부흥운동을 동반한 것이 사실이다. 1970년 이후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래를 볼 수 없을 만큼 급성장을 하여왔다. 여기에는 세계 복음주의 협회(WEF)를 비롯한 일련의 단체들의 직접 간접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한국교회의 부흥을 선교적인 방향으로 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선교의 내용을 규명하고 선교의 필요성을 대회를 통하여 제시하려고 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선교학의 과제를 복음주의적인 신학에서 조명하고 규명할 필요성을 낳았던 것이다. WCC의 선교방향이 종교다원주의적이고 토착화적인 방향에서 진행된 것에 우려를 나타내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선교의 과제를 성경적인 입장에서 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교회의 선교적인 열기와 비교할 때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선교과제를 제시하는데는 미흡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일련의 대회를 열어 제삼세계 복음주의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복음주의 선교의 중요성을 제시하는데는 어느정도 성공하였지만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데는 다소 미흡한 감이 있었다.
셋째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은 선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소홀히 다루었던 기독교인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할 과제를 부여 받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신학의 내용을 규명하기 위하여 이련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어느정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을 삶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제시하는데는 실패한 듯하다. 역사적 복음주의 신학은 기독교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복음주의 신학은 기독교와 세상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찰하여 성경적인 역사관과 세계관을 제시하여야 한다. 최근에 복음주의 신학은 선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제시하지 못한 바로 이부분, “세상에서의 기독교적 삶”이라는 문제를 정립하는데 정열을 쏟고 있다. 일련의 신학자들이 신학교 교단에서, 일부 뜻있는 목회자들은 목회현장에서 이것을 이점을 강력하게 외치고 있는 일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개혁주의적 교단의 한국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균형잡힌 청교도 전통속에서 전인적인 신학적 모델을 찾아야 될 것이며 웨슬리안 전통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실천적인 웨슬리의 전통속에서 균형잡힌 신학적 모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을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길이다. 하나님의 세계 안에 사는 기독교인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전 우리 앞에 벌어진 1992년 10월 28일 재림설과 그에 따른 소동은 한국의 기독교의 불균형적인 불행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균형잡힌 신앙과 신학을 바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를 바로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신학자들만의 과업은 아닐 것이다.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교인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이루어 나가야 할 시대적 사명이라고 본다.
IV. 맺는말
1940년대 이후에 발흥한 복음주의 운동과 밀접한 연계성 속에서 발전해온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은 이중적인 과업을 놓고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신학과 삶과의 관계에 대한 정립문제이다. 때문에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규명하려는 일련의 작업이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벌어진 일련의 성경관 논쟁, 국제성경무오협회(ICBI)의 창립과 시카고 선언, 최근의 구프린스톤신학의 재평가, 89복음주의 선언('89 Evangelical Affirmation), 미국 복음주의 학회(ETS)를 비롯한 세계각국의 복음주의 학회, 그리고 수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저술은 역사적 복음주의 신학을 진지하게 재정립하고 규명하려는 최근의 노력들이다.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이 선대 복음주의 신학과 동떨어진 별개의 신학은 아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신학은 선대의 복음주의 신학 내용의 본질을 원형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소위 근본주의자들로 알려진 19세기와 20초의 선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생명을 무릅쓰고 변호하여왔던 성경의 권위,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인격적 재림과 같은 역사적 가르침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에게도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신정통주의가 복음주의 신학에 상당히 반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복음주의 노선에 선 신학자들은 신정통주의를 복음주의 영역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교리들에 기독교의 전교리들을 축소시키려고하지 않으며, 또한 이것들을 신학적 이델올로기의 표준으로 삼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 동향은 역사적 복음주의 신학을 균형잡힌 안목을 갖고 연구하여 오늘의 현장에 제시하려는 움직임이다. 때문에 역사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단순히 규명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것인가도 진지하게 고찰한다. 역사적 복음주의 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조화시키려는 최근의 노력은 한 실례이다. 신학이 현장과 동떨어진다면 그 신학은 생명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 현장이 없는 신학, 신학이 없는 현장은 의미가 없다. 현장이 없는 신학은 생명이 없으며, 신학이 없는 현장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파괴시킬 위험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은 두가지의 균형과 조화속에서 태동되는 것이다. 1989년 복음주의 선언(Evangelical Affirmations/89)에서 지적한 것 처럼, “교리적인 순수성은 삶의 순수성이 동반되어져야 한다.” 앞으로 복음주의 신학은 역사적 신학과 프락시스와의 관계를 더욱 더 진지하게 규명하여 제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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