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연대 문제, 여전히 열려진 점진적 논제
조덕영 박사
지금까지 내재의 학문인 과학을 가지고 초월의 창조 문제를 다루는 것이 얼마나 미숙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통해 창조 연대 논쟁의 신학적 문제와 딜레마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해야 한다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처럼 성경과 창조 세상에 대한 연구는 멈출 수 없고 창조 연대 문제도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점진적 성격을 가진다. 따라서 기원에 대한 연구 자체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기원의 연대 논쟁도 마찬가지다. 젊은 연대를 포기하거나 오랜 연대를 수용하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과학의 이름으로 섣불리 말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지속적 연구와 토론은 하되 충돌하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 연대 논쟁이 창조 신학의 핵심적 문제는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과 과학에서 검증가능한 확정된 답이 도출된 논제가 전혀 아니다. 즉 연구에 있어 여전히 열려있고 열린 자세가 필요한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백석대 김진섭 박사는 창조론오픈포럼(OFC, 백석대, 2009. 1월)에서 우주창조기간에 대한 다섯 개의 이론(일상적인 하루의 날, 날-시대, 문예적 틀, 유비적 날, 미확정된 기간의 날)이 복음주의와 개혁신학자 내부에 공존함을 이해하고 우리 안에 발생 가능한 비방과 분열을 막아내며 서로 품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성경은 문자적 해석이 아닌 해석되어야 하는 계시
세계적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i)의 말대로 "언어는 단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준이 아니라 급기야 언어로 우리의 사고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를 만들어 내고 잘못된 행동을 유발한다. 성경은 변증학자 버나드 램(Bernard Ram)이 말한 대로 "상징으로 가득한 것이요, 상징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는 이 말은 신·구약 전체의 문맥을 알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읽으면 예수님이 정말 육체적 어린 양이 되어 버리는 우스운 뜻이 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다면서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성경 문자적으로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성경문자주의자들은 없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해석되어야 하는 책이요 사사로이 풀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칼빈주의와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로 기독교가 갈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신·구약 성경을 구속사적 관련성 없이 구약 따로 신약 따로 본다면, 신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본래 전하고자 하는 뜻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만약 구약만을 기준으로 성경을 본다면,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인이 되어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에 가야 할 것이다. 구약은 그런 면에서 모형, 상징, 예언이라는 차원의 구속사적 시각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길을 향하여 모든 민족, 모든 역사,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적응된 언어로 주신 말씀이 성경이다. 즉 성경은 문자적 해석이 아닌 해석되어야 하는 계시임을 늘 명심해야 한다.
창조 연대 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해결 되지 않는 창조 연대 논쟁 문제는 미래의 성경학자, 미래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심지어 결정적 해석 방법이 없으면 주님 오실 때 까지 맡겨두어도 구속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성경적 창조와 창조주를 믿는 창조 섭리 신앙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창조과학이나 진화론에 집착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핵심이 아닌 것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날카로운 쟁점이라 여기고 복음의 친구들에게 함부로 칼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창조과학운동이 역사적으로 20세기 무신론과 우연주의 진화론의 도전을 방어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제 시대적 역할은 달라져야 한다. 젊은 지구론은 분명 장점도 있는 해석 방법이다. 그러나 젊은 지구라는 무리한 짐을 일부러 지고 갈 필요는 없다.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까지 불필요하게 친절히 언급하려다가는 역작용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재의 자연 과학이 불필요하게 초월 계시의 성경을 앞질러 가는 것도 금물이다. 성경은 그렇게 과학자가 계도할 필요가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만 말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곳에서 멈추어야 되는 개혁주의적 신앙 관점에서 보면 과학이 괜스레 선지자가 되어 앞질러 갈 필요가 전혀 없다. 성경(구속 계시)과 창조(자연 계시)의 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럼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무엇과 맞서야 하는가? 연대 논쟁이라는, 해결점도 보이지 않는 비생산적인 동굴에서 속히 빠져나와 수고의 짐을 내려놓고 잠시 기다리면서 먼저 무신론과 우연주의, 자연주의, 회의주의의 도전에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문제들, 이를 테면 우연주의에서 파생된 환경 생태 문제, 스티븐 호킹과 리처드 도킨스로 대별되는 우연주의 진화론, 종교화된 외계인 종교와 같은 그릇된 신비주의, 비성경적이고 무질서한 초월적 신비주의 등을 바로 잡아야 한다. 기원의 연대 문제는 관심을 갖고 연구는 하되 최종 결론은 미래의 탁월한 크리스천 학자들에게 맡겨두어야 한다. 이것이 오히려 신앙과 신학과 일반 은총을 풍성히 하는 길이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을 뿐 아니라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관측자의 속도나 중력에 따라 상대적이라 시간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이미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해 과학적으로도 밝혀졌지 않았는가! 또한 지구 연대도 이미 백여 년에 걸쳐 세속 과학자들이 알아서 그 연대를 수정하여 왔다. 앞으로 과학자들은 그 견해들을 여전히 수정해 갈 것이다. 그렇게 지구 연대를 기꺼이 수정하면서도 견해를 바꾸었다고 그들 과학자들 가운데 자신들 명성에 흠결이 생겨 고생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마찬가지로 "연대 논쟁"을 잠시 내려놓아도 성경의 권위는 결코 조금도 손상 받지 않는다. 괜스레 연대 문제를 가지고 자신감을 잃고 우왕좌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창조하신 자연도 보시기에 좋았다. 하등학문인 과학을 가지고 불필요한 논쟁과 정죄의 도구에 매달리지 말고 과학이 더 깊은 성숙한 신앙으로 가는 선한 연구와 토론의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과학보다 중요한 바른 신학 해석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 해석보다 바른 해석이 먼저다. 계시(성경)는 과학 해석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닌 바른 신앙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계시의 바른 해석을 위해 주어진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회와 더불어 존중해 온 신학이다.
인간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이다. 내재적 존재(인간)가 초월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원은 단순, 명료하나 그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 신앙과 신학의 묘미와 풍요성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 이유가 양들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서(요 10:10)라고 했다. 단순 열정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식으로 신앙을 너무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학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구원의 삶도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우주와 생명의 모습이 다양하고 풍성한 것처럼 인간의 삶도 다양하고 풍성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것을 하나님은 예비하고 계신다.
미시 세계의 복잡함과 우주의 광활함처럼 자연 계시는 더욱 복잡다단하다. 신학은 계시를 전제한 학문이라 초월을 말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다르다. 과학(내재)의 증거들을 말하다가 해석되지 않는 부분을 초월로 돌리면 "틈새를 메우는 하나님" 논리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런 식의 창조과학적 논리는 "틈새를 메우는 영지주의 하나님", "틈새를 메우는 여호와의 증인의 유일신 창조주 여호와", 틈새를 메우는 지구 방문자요 창조주 외계인" 등에 답할 여지를 봉쇄해 버린다.
기독교가 영지주의나 신비주의자들에게 통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신비한 종교이지만 신비주의화하면 안 된다. 신비주의는 주관적, 개인 경험에 매달리면서 종교를 상대화해 버린다. 체험 위주의 천국-지옥 간증이나 예언을 빙자하여 점을 치는 행위, 초월 명상 등을 기독교가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초월과 내재를 혼동하면 그렇지 않아도 사사기 시대처럼 혼란스러운 오늘날 기독교의 혼돈을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 젊은 연대 주장이 세대주의 종말론 등과 결합할 경우 신앙을 단순화하여 만화 같이 판타지화 하면서 신앙을 전혀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할 가능성이 있다. 즉 "틈새를 메우는 사이비 주관주의 창조론자"들에게 오히려 자리를 제공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신비주의자들만 활개를 치도록 만들며 기독교 전체를 혼동 속으로 몰아넣게 된다. 이렇게 전혀 다른 듯 보이는 극단적 과학적 근본주의와 신비주의가 만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둘 다 신앙을 주관적 판타지화 하여 혼탁한 무질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종교개혁 전통 안에서 오순절주의자들의 성령이 주는 자유와 개혁주의자들의 성령의 질서의 대립이 아닌 성령 안에서의 절묘한 종합이 절실히 필요한 만큼 위태롭게만 보인다.
나가면서
시공간과 물질과 생명을 창조하신 초월의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볼 때 늘 신비로우신 분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이중창도 신비한 속성이다.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지구와 인간 창조 연대의 증거도 결정적 증거를 간단하게 찾을 수 없는 신비로 남아있다. 성경만으로 보면 젊은 연대가 상대적으로 좀 더 타당한 듯 보이고 과학만으로 보면 오랜 연대가 우주와 기원을 설명하는 데 좀 더 타당한 듯 보인다. 결론은 없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젊은 연대와 오랜 연대의 이중창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성경과 과학이 정답을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복음 진영이 앞서서 분열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성경이 가는 곳까지 만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개혁주의의 모토는 또다시 여기에 적용된다. 신학은 같은 구(舊)프린스턴신학의 탁월한 신학자요 개혁주의자인 진화론을 부정한 찰스 핫지와 진화론을 긍정한 벤자민 워필드 모두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일부 크리스천 과학자들과 신자들은 이 창조 연대 문제만큼은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정적 대립을 지속한단 말인가! 필자는 그것을 신앙적, 신학적 미숙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이 문제는 결코 싸워야 할 쟁점이 아니고 결론을 유보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된 복음의 접촉점(연결점)이 어디인지를 늘 진지하게 고민하고 찾아야 하는, 당분간 잠시 신비로 남겨두고 기다려야 할 논제라고 본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크리스천투데이> (2018.7.15.경) 제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