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팔고있는가? 권수경 목사
500년 전의 면죄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채플 정문에 써 붙인 게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라고 많이들 알고 있으나 루터가 반박문을 써 붙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오래 전에 밝혀졌다. 대신 그 날 95개조를 동봉한 편지를 마인츠의 대주교에게 보낸 것은 사실로 확인되어 10월 31일이 종교개혁 기념일이 되었다. 쓴 항목은 총 95개조나 되지만 사실 공격 대상은 ‘면죄부 (免罪符, indulgence)’ 하나였다.
루터 당시의 교황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비롯하여 돈 들어갈 데가 많아 면죄부를 부지런히 팔았다. 오늘날 서양 예술의 백미라 불리우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을 삼십대의 청년 미켈란젤로가 그렸는데 이 미켈란젤로 월급도 면죄부를 판 돈으로 지불했다. 천장 그림 가운데 ‘아담의 창조’, ‘낙원추방’ 등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걸작인데 이게 다 면죄부 덕분에 태어났다. 그렇게 4년 동안 공사를 해 천장 그림이 1512년 완공되었다. 루터가 95개조를 작성하기 5년 전이었다.
반박문을 만든 19년 뒤에는 환갑을 넘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정면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이다. 심판주 그리스도가 가운데 계시고 천사들이 곳곳에서 심판을 집행하고 있는데 그림 대부분은 천국에 있거나 천국으로 올라가는 영혼들이고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지옥과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을 그렸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물이 벌거벗고 있다. 그래서 당시 교황청 예전 담당관인 체제나가 신성한 예배당을 나체로 뒤덮었다며 미켈란젤로를 심하게 비판했다.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지옥을 주관하는 귀신 미노스의 얼굴을 체제나의 얼굴로 그려 복수를 했다. 체제나가 그걸 보고는 교황에게 달려가 당장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를 하자 교황 바오로 3세는 거긴 지옥이라서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능청을 떨었다. 그러면서 “연옥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당시의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어 이미 천국에 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 가운데 현세에서 지은 죄를 다 속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바로 천국으로 못 가고 이승과 천국 사이에 있는 연옥에 가 남은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현세에 있는 사람들이 연옥에 있는 그 영혼들을 위해 무언가 해 주면 그게 공로가 되어 벌을 덜 받고 천국으로 직행하게 되는데, 바오로 3세가 중얼거린 것처럼 연옥은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기 때문에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부를 구입하면 교황이 그 영혼들을 천국으로 바로 보내 준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에서 교회가 건축사업을 하려고 면죄부를 파는 것은 잘못이라고 공격했다. 돈을 받고 형벌을 면제시켜 주는 것도 틀렸다고 저적하고, 교황이 연옥을 다스린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루터가 가장 염려한 것은 성도들의 영혼이었다. 면죄부는 교인들에게 잘못된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들의 구원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루터는 경고했다. 구원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절망하던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어 얻는 것이지 그렇게 돈을 내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면죄부를 살 것이 아니라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면죄부 하나에 모든 문제가 다 들어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내 돈 곧 내 공로로 구원을 얻겠다는 발상이었는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당시 교회가 가르친 거짓 구원론이었다. 천주교가 오늘까지도 가르치고 있는 이 잘못된 구원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공로도 함께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 하는 비성경적 이론이다. 당시 교회의 이런 잘못에 대항해 개혁자들은 ‘다섯 개의 오직 (five solae)‘을 외쳤다. 핵심은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곧 내 공로가 아닌 믿음 하나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믿음 하나로 구원받는다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롬 4:16). 그래서 ‘오직 은혜로 (sola gratia)’를 외쳤다. 오직 은혜라면 하나님이 모든 걸 다 하신 것이므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돌려야 옳다 (롬 11:33-36).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에는 인간 교황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 (solo Christo)’ 얻는다 (딤전 2:5). 게다가 거짓 가르침을 담은 교회의 전통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 믿어야 한다고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를 강조해 ‘다섯 가지의 오직’이 되었다 (딤후 3:15-16).
이 다섯 가지 가운데 핵심은 역시 ‘오직 믿음으로’ 곧 ‘sola fide’의 교리다. 영어로 하면 By faith alone이다. 오직 믿음이기에 오직 은혜요, 오직 그리스도요, 오직 성경이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다시금 발견함으로써 면죄부로 대변되던 당시 교회의 도덕적, 영적 타락을 극복하고 교회를 새롭게 만들 수 있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문구를 한 낱말로 줄이면 ‘믿음으로만’이다. ‘오직 믿음으로’ 아니면 ‘믿음으로만’인데, 실제로는 이 둘을 합쳐 ‘오직 믿음으로만’으로 자주 쓴다. 오직을 거푸 썼으니 아주 강한 표현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개혁주의 전통에 선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성경적 가르침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표현은 많이 있지만 흔히 쓰는 표현처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또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표현은 성경 원문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에는 여러 번 나온다. 그래서 이 표현이 낯설지 않다. 오래 사용해 온 개역 한글판도 그렇고 최근 나온 개역개정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갈 2:16).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빌 3:9). 두 경우 모두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과 대조해 말하다 보니 ‘오직’이 추가된 것 같다. 믿음과 행위 가운데 행위는 아니고 믿음이니까 그걸 강조하려고 믿음 앞에 ‘오직’을 썼다는 말이다. 영어식으로 하자면 A가 아니고 B다, Not A but B 구문에서 ‘but’ 대신에 ‘오직’을 쓴 셈이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표현 가운데 대표격은 역시 로마서 1:17이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경우는 대조도 아닌데 원문에 없는 ‘오직’이 들어갔다. 누가 왜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강조하려고 넣은 것 같다. 똑같은 인용문이 신약에 두 번 더 나온다. 이 중 히브리서 10:38은 로마서 1:17와 비슷하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고 옮겨 ‘오직’이 들어 있지만?갈라디아서 3:11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로 옮겨 ‘오직’이 없다. 이 구절의 원문인 구약 하박국 2:4 역시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되어 ‘오직’은 없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표현은 성경에 없지만 사실 ‘믿음으로만’이라는 문구 자체는 성경 원문에 꼭 한 번 나오긴 나온다. 헬라어로 ‘엨 피스테오스 모논’ 말 그대로 ‘믿음으로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문구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걸 부인하는 말씀이다. 야고보서 2:24이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 구절에서 ‘믿음으로만’은 말 그대로 ‘오직 믿음으로’다. 그런데 본문은 ‘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하지 않고 반대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도 같이 있어야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믿음으로만’이라는 구절이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가르칠 때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롬 3:28) 야고보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이런 내용 때문에 개혁자 루터는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심판 날 금이나 은 같은 다른 성경과 달리 불에 타 없어져 버릴 시시한 성경이라는 뜻이다 (고전 3:12).
‘오직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성경에 오직 한 번 나오는데 그게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고 가르친다면 개혁자들이 외친 솔라 피데 (sola fide)는 그럼 비성경적인 엉터리 가르침인가? 그렇지 않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은 성경 한 두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일관성있게 가르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개혁자들이 외치기 오래 전부터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고 500년이 지난 지금도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은 변함없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것. 이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베드로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행 15:11). 이 은혜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갈 1:6-7).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조금 뒤 살펴보겠지만,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야고보서 2:24 역시 그 가르침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면죄부
개혁 500년을 맞아 우리의 관심이 다시 한 번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가르침에 쏠리고 있다. 그 시대 개혁의 핵심이 이신칭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미 작년부터 수많은 목사가 이 주제로 설교를 했고 세미나, 포럼, 심포지움 등이 계속 열리고 있다. 한국의 고신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미래교회포럼도 작년말 이신칭의를 가지고 학술대회를 열었는데?그 모임의 주제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
충격적인 문구다. 지난날 교회의 부패의 상징이던 면죄부를 이신칭의라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내쫓은 바 있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오늘 이신칭의가 지난날 면죄부가 차지했던 그 자리에 가 있는 게 아니냐 하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배경은 당연히 우리 시대 교회의 타락이다. 500년 전에 비해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온갖 부패가 오늘 교회를 더럽히고 있다. 교회에 만연한 물질주의, 물량주의, 성장주의, 성적 타락, 도덕적 타락, 쾌락주의, 직분의 권력화, 목사의 성직화 등이 우리를 더럽히고 있다. 상황은 물론 다르다. 지난날은 교리가 잘못되어 그게 부패를 낳았다. 오늘날은 교리의 문제는 없다. 이신칭의는 너무나도 분명한 성경적 진리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올바른 그 교리를 우리 시대에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신칭의의 참 뜻을 우리가 곡해하였기 때문에 오늘 이런 부패와 타락이 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논의는 거의가 이신칭의의 참 뜻이 무엇인지 그걸 주제로 하고 있다.
참으로 심각한 질문이다. 우리가 도대체 이신칭의 교리를 얼마나 엉터리로 알고 있기에 지난날 교회를 바로잡아주었던 일등공신이 500년이 지난 지금은 교회를 타락시키고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었다는 말인가? 오해의 핵심은 믿음과 삶의 괴리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어 믿음과 순종이 서로 무관한 것이 되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교리를 이미 믿은 다음 행위는 아무러나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쳤다. 옛날 영지주의자들이나 반율법주의자들이 가졌던 그런 태도를 우리가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값싼 이신칭의가 성공과 번영의 신학을 낳았다는 지적이 많다. 십자가에 무임승차를 한다는 기막힌 표현도 나왔다. 주님이 우리에게 각각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셨는데, 500년 전 루터도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고 설교했는데, 우리는 제 십자가는 내던지고 남의 십자가나 주님의 십자가에 그냥 얹혀 가고 있다는 비판이다.
500년 전의 면죄부와 오늘날 오해된 이신칭의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구원을 공격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까지 희생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 값진 구원을 싸구려로 전락시킨 것이다. 전에는 구원이 돈 몇 푼이면 살 수 있는 싸구려였다면, 500년이 지난 오늘날은 그 몇 푼 마저도 낼 필요가 없는, 그야 말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껍데기 구원으로 타락한 셈이다. 말로는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거나 순종하지는 않는 가짜 신앙인, 그러면서도 믿는다고 스스로 속고 있는 엉터리 신앙인을 대량으로 만들어낸 결과 교회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 1:22).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뿌리를 500년 전처럼 신학에서 찾아보고자 한 노력이 수십 년 전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바울에 대한 새 관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다. 이 관점을 내세운 사람으로 이 피 샌더스 (E. P. Sanders), 제임스 던 (James D. G. Dunn) 등이 있고 오늘날은 톰 라이트 (N. T. Wright)가 대중적인 책을 많이 써서 이 관점을 확산시키고 있다.
새 관점 학파의 여러 주장 가운데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성경에서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라고 누누이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교회는 여기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가 율법을 지키는 것 곧 선행을 비롯하여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 된다는 것은 내 노력으로는 아무리 해도 안 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새 관점 학파는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안식일, 할례, 정결규례 등을 지켜 유대인처럼 되려고 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사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 일이 아니라 의식법을 지켜 언약 안에 머무르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말은 그런 유대교에 가입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럼 차이는 무엇인가? 새 관점으로 바라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할 때의 그 믿음에 우리의 행위와 노력도 포함된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우리의 선행,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포함하는 믿음 곧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뜻이라고 푸는 것이다. 행함이 없어 타락한 시대에 행함의 중요성을 다시금 성경에서 발견한 것 같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다. 오늘날 새 관점을 널리 전하고 있는 톰 라이트는 행위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바울은 제이성전기 유대교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살아온 삶 전체에 따라, 다시 말해 행위에 따라, 행해질 것이라고 확언한다.” (New Perspective on Paul, Tenth Edinburgh Dogmatics Conference, 톰 라이트 웹사이트.)
백 번 옳은 말씀이다. 바울은 톰 라이트가 근거 구절로 인용한 로마서 14:10-12, 고린도후서 5:10뿐 아니라 로마서 2:6-11에서도 같은 가르침을 준다. 이것은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7:21; 16:27; 25:34-40, 요한복음 5:28-29에서 거듭 가르치신 명백한 성경적 가르침이다. 그런데 문제는 톰 라이트가 이것을 칭의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비슷한 내용을 톰 라이트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현재의 칭의가 믿음에 근거해 선포하는 것을 미래의 칭의는 전 생애에 근거해 공적으로 확인할 것이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129. 한글번역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에클레시아북스)
조금 전 말한 내용과 ‘약간’ 달라졌다. 작아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차이다. 톰 라이트는 마지막 심판을 칭의라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칭의가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면 미래의 칭의는 행위에 근거한 칭의라는 것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있어야 의롭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건 이신칭의 교리의 참 뜻을 찾는 시도가 아니라 교리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로서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새 관점 학파의 성경해석은 사실 문제가 많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로마서 2장부터 4장까지 한 번 읽기만 해도 답이 나온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이 조그만 차이에 있다. 사람의 행위를 칭의의 근거로 제시함으로써 톰 라이트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공격하고 있다.
행위의 두 얼굴
이신칭의는 복음의 핵심이요 성경의 핵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하는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많고 그 가운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인데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행동하고 그 자유에 대해 책임지게 하신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우리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완벽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납득되게 설명하려 하다가 이단에 빠지기 쉽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역시 그 문제와 이어져 있으므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행위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행위의 위치다.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다. 결론은 분명하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이라면 행위는 절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행위를 강조한다. 행함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마 7:21). 마지막 날 각자의 행위로 심판하실 거라는 말씀이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온다. 그런 말씀을 보면 행위가 우리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난다. 그렇지만 말이나 글로 ‘표현’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표현은 성경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있는 그대로 말하자는 뜻이 아니라 성경의 참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는 말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좋은 보기다. 표현 자체는 성경에 안 나오는 말이지만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주기 때문에 사용한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문구도 마찬가지요 행위가 우리 구원 교리에서 갖는 위치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복음에서 행위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첫째, 구원의 방법과 원리를 말할 때 행위는 믿음과 정반대다. 대립관계에 있다. 양자택일이어서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한다. 행위로는 안 되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번역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제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고 누구든지 그 독생자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나는 한 것 없이 구원을 받았으니 오직 은혜요 (롬 4:4-9), 은혜의 구원을 주신 하나님 한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렇게 주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는 순간, 행위가 믿음과 같아진다. 그런 행위를 성경은 순종이라고 부른다. 이제는 행위가 믿음과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혼자는 있을 수 없는, 함께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관계로 변한다. 다시 말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이요 가짜다 (약 2:17, 26).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순종이 곧 믿음이요 믿음이 곧 순종이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믿음과 순종을 같은 말로 쓴다. 요한복음 3:36은 이렇게 말씀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믿는 자와 순종치 않는 자가 나누어진다. 믿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이요, 순종치 않는 사람은 믿지 않은 사람이다 (막 16:16). 믿음과 순종을 같은 것으로 말하는 본문은 얼마든지 많다.
?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8-19).
순종치 아니하던 그 사람이 곧 믿지 않은 사람이다. 믿음과 순종이 같은 것인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결과 믿음과 삶이 같아졌다. 자격없는 우리를 살려 주셨기에 이제 산 몸 전체를 주님께 다 마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갈 2:20).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간직한 살아 있는 믿음 곧 삶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이다. 그런데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거짓이라고 해서 행동을 구원의 조건으로 소급시켜 적용하면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버린다. 그렇게 뒤집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행함이 구원을 얻거나 의롭게 되는 조건일 수는 없다.
야고보서 2:24도 이런 원칙에 맞추어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야고보는 조금 앞에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이미 말했다 (약 2:10). 하나만 범해도 다 범한 것과 같은 게 율법인데 그걸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가르칠 수는 없다. 야고보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 말하기 직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기로 들었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 한 다음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결론지었다 (약 2:21-23). 아브라함을 의롭게 만든 그의 믿음은 아들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산 믿음이었다는 말이다. 바로 뒤에서는 또 행함으로 의롭게 된 보기로 라합을 언급한다 (약 2:25). 바로 그 라합의 행동에 대해 히브리서 11장은 아주 재미있는 기록을 들려준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과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히 11:31).
라합의 행동은 믿음의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안 믿은 사람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은 게 아니라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과 함께 멸망치 않았다 하였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혼 없는 몸은 죽은 몸이라 하면서 행함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하였다 (약 2:17, 26). 그런데 그걸 모른 채 껍데기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았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그저 “너는 짜장면 먹을래? 난 짬뽕 먹을게” 하는 수준의 결정이었을 뿐 나를 위해 몸을 바치신 그리스도께 내 모든 것을 의지하는 참 믿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행함의 열매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 하였다.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을 얻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걸 말해주는 것이다. 야고보서 2:24의 뜻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지만 믿음이 곧 행함이기 때문에 행함이 없다면 그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참 믿음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바울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한 다음 하나님이 사람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 하였다 (롬 2:6-8).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강조한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갈 5:5).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바로 알면 우리는 왜 마지막 날 심판 때 믿음 아닌 행위로 심판을 행하실 것인지 그 이유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믿고 구원얻은 자에게는 믿음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삶은 열매다. 우리는 이미 좋은 나무가 되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열매만 보고 심판하는 것과 나무를 보고 심판하는 것이 다를 수 없다 (마 7:16-20).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요 15:1-8). 그래서 주님도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하시고는 조금 뒤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여 행위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 5:24, 29).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마지막 심판 때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기록된 책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계 20:12-15). 그런데 행위를 적은 책 외에 책이 한 권 더 있는데 바로 생명책이다. 모두가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 것은 똑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불못에 던져지는 반면 불못에 던져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보니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니 책에 기록된 행위도 아마 달랐을 것이다. 아니, 마땅히 달라야 한다. 거룩하게 산 기록이 거기 적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스스로 구원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은 없다. 이들이 구원을 얻은 이유는 그들의 구별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칭의 아닌 성화
믿음이 곧 행위라는 것을 신학 용어에 연결해 말하자면 칭의에는 성화가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는 거룩하게 되는 것 곧 성화의 과정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칭의가 아니라 성화다. 이신칭의가 우리 시대의 면죄부로 악용되고 있는 이유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과정에서 칭의 다음에는 성화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음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위가 칭의의 조건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건 논할 가치도 없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이신칭의는 불변의 진리다. 그런데 칭의에는 성화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다는 중요한 진리를 교회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귀한 이신칭의의 진리를 면죄부로 악용하는 기괴한 현상이 생긴 것이다. 믿음은 곧 삶이다. 내 믿음은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그 주님의 명령에 따라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거룩함에 나아가고자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 우리의 책임도 함께 이야기한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셨다 (롬 8:29-30). 구원의 단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다. 거듭나는 일과 양자 삼는 일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요 3:1-16; 벧전 1:3; 롬 8:14-15; 갈 3:26; 4:5).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도 있다. 우선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명령이다 (막 1:15). 성경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과 주 예수를 믿을 것을 거듭 명령한다 (행 2:28; 17:30; 26:20). 여기 모인 우리는 다 그 명령을 순종하여 이렇게 영생과 구원을 얻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명하시는 게 또 있다. 그 가운데 핵심은 하나, 거룩하게 되라는 명령이다. 물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요 17:17; 행 20:32; 엡 1:4; 5:26; 살 5:23; 히 2:11; 10:14).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라면 이 성화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와 동시에 이 성화를 주 예수를 믿은 우리의 책임으로 돌린다. 구원의 단계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죽는 날까지 애써야 할 한 가지가 바로 이 거룩하게 되는 일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5);
명령이다. 삶의 모든 면에서 거룩하게 되어라! 거룩하게 되라 또는 거룩함에 이르라는 명령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롬 6:19; 히 12:14). 거룩함이 중요한 이유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이다 (살전 4:3, 7). 하나님이 예수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의롭게 된 성도가 필연적으로 맺어야 할 열매가 바로 거룩함이기 때문에 이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히 12:14). 우리가 거룩함의 열매를 맺고 또 맺으면 마지막에 가서 영생의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이 가르친다 (롬 6:22).
거룩함은 분리다.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다. 세상의 원리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라는 명령이다. 세상의 원리가 뭔가? 이 세상만 아는 게 세상의 원리다. 영원을 모르는 게 이 세상의 지혜다. 그렇기에 세상이 바라는 것은 돈이다. 권세요 쾌락이다. 우상숭배요 그 우상과 함께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과 같아졌다. 분리되어서는 안 될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어 버리면 반드시 나누어져야 할 교회와 세상이 나누어지지 않고 합쳐져 버린다. 세속에 물든 교회, 세상과 같아져 버린 교회다. 칭의와 성화를 다시금 하나로 제대로 깨달으면 의롭다 하심을 입은 교회가 그렇지 못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오직 성경으로’ 하지 못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성경이 강조하는 만큼 강조해야 되는데 우리는 은혜로 받은 이신칭의만 말하고 구원얻은 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성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성경은 성화를 말한다. 정말 많이 말한다.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심지어 구원에서 떨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까지 들려준다 (마 18:15-20; 요 15:2; 롬 11:20-21; 고전 10:12; 갈 4:9-11; 히 2:1; 3:12; 4:1; 6:6; 10:26; 12:15-17; 약 5:19-20; 벧전 5:8). 이런 경고를 그저 겁주시는 말씀 정도로 에누리하는 사람도 있다. 조심해야 한다. 인류의 첫 범죄 때 뱀도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겁 주시는 것이라고 속였다 (창 3:4-5; 요 8:44).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정말 없다면 조심하라는 성경의 경고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뿐 아니라 사람의 책임도 함께 이야기한다. 둘을 조화시키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말하는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 거룩함은 칭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마지막 영광스럽게 되는 은혜를 입는 순간까지 애써야 할 일이다. 다시 말해 죽는 날까지 해야 할 일이다. 쉽게 말해 성화는 이 세상을 사는 원리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는 우리가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우주적으로 보면 주 재림 날까지,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애써야 할 일이 바로 이 거룩함에 이르는 일이다.
우리가 파는 것
우리 시대의 문제를 50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다. 우선 500년 전에는 연옥의 고통을 줄이고 천국으로 직행하고자 애썼으니 내세가 문제였다. 그런데 지금은 구원은 뗴 놓은 당상이고 현세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주 관심사이니 현세가 문제다.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점은 공통이다. 그리고 이 공통점을 가능하게 만든 보다 근본적인 공통점도 있는데 그건 판다는 점이다. 판다. 파는 물건은 다르다. 내세가 중요하던 그 시절에는 내세를 팔았고, 현세가 더 중요한 지금은 현세를 판다. 그렇지만 판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리고 물건 값으로 받는 것도 똑같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물건 값은 행위로 받는다. 내가 쌓는 내 공로다. 그 공로를 받고 전에는 내세를 팔았고 지금은 현세를 판다. 우리 시대에 이 사업이 많이 번창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그 주님의 뜻대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애쓰라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거룩함을 제쳐두고 이 세상을 사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세상을 사는 값을 행위로 치르라고 부추긴다.
거룩한 것을 사고팔고 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매매를 하다가 주님께 크게 꾸중을 들었다 (막 11:15-18; 요 2:14-22). 사마리아에서는 마술사 시몬이 거룩한 것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하다가 베드로에게 혼이 난 걸로 모자라 저주까지 받았다 (행 8:18-24). 700년 전 단테도 <신곡>에서 거룩한 것으로 돈벌이를 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500년 전 교회는 성도들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다. 그걸 이신칭의로 바로잡은 개혁 교회는 500년이 지난 지금 성도들의 행위를 받고 복을 판다. 이 세상의 복이다.
목사 된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긴다. 세미나, 강의 등을 부지런히 좇아 다니며 배우고 그렇게 배운 것을 교인들에게 설교나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을 통해 열심히 가르친다. 이신칭의 하나는 확실하게 가르친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틀렸다는 것도 알고 교인들에게는 톰 라이트를 읽을 때 주의하라고 권한다. 구원을 위해 노력하거나 공로를 쌓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도 행위를 말하지 않는다. 믿음이 곧 순종이요,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이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교인이 자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른다. 믿음과 삶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할 교인들에게 마치 행위가 아직도 믿음과 반대인 양, 하나님 말씀과 계명을 열심히 순종하면 그게 예수를 안 믿고 내 행위를 의지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잘못 가르친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복을 받으라 권한다. 복! 우리 시대 최대의 화두다. “축복합니다!” 이게 목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인사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가 애초에 복의 종교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뭘 두고 복이라 부르느냐 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거룩해야 하는데, 우리 시대 교회가 말하는 복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첫째는 돈이다. 이 세상의 권세와 명예와 쾌락도 우리가 파는 복이다. 사업 잘 되고, 좋은 집, 좋은 차 사고, 자녀들 대학 잘 가고, 몸도 다 건강하고 골프 치며 여행 다니며 취미생활도 즐기는 것이다. 전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구원 문제는 다 해결됐으니 잊어버리고 이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마음껏 누리라 부추긴다.
그런데 이 복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판다. 구원은 절대 내 공로로 얻는 게 아니지만 이 복을 얻기 위해서는 공로가 좀 필요하다. 이신칭의를 강조할 때 강력하게 내쫓았던 공로주의를 이 복을 팔아먹기 위해 슬쩍 다시 도입한 것이다. 어떤 공로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다. 말씀 많이 보고 기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면 하나님이 예쁘게 보시고 복을 주신다. 사업도 잘 되게 해 주시고, 승진도 시켜 주시고, 아이들도 공부 잘 하게 해 주신다. 공로 가운데 중요한 것은 역시 돈이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게 복 받는 비결이다.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목사 가운데도 표현만 슬쩍 바꾸어 전하는 사람이 많다.
성도의 삶은 열매다. 칭의에 따르는 성화가 되어야 할 삶이 무언가를 위한 공로가 된다. 성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낳는 결과여야 하는데 그게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한 원인이 된다. 은혜로 주신 구원이 감사하여 꿀맛으로 읽던 성경을 이제는 몇 장 읽었는지 헤아리고, 그 숫자로 경쟁도 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핵심인데 언제부턴가 불교의 기도처럼 횟수를 따지고 시간을 따지는 공로가 되어 버렸다. 큐티를 빼먹은 날은 하루 종일 뒤숭숭하다.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 주신 그 은혜가 감사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드려야 맞는데 교회에서 이걸 받고 복을 팔다 보니 이제는 그 모든 게 복을 사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다.
주 예수의 제자가 된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 올바르게, 진실되게, 성실하게, 사랑으로 살아 주님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돈은 우리 삶의 바탕일 뿐 아니라 제자로서 바른 삶을 사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무엇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중요한 방편이 된다. 이 세상에서 얻는 지위, 권세, 명예도 마찬가지다. 그게 그 자체로 아무 가치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것 다 포기하고 이렇게 목사가 된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되어야 할 이 여러 가지가 이제는 복이라는 이름으로 목적이 되어버렸다. 500년 전에는 그래도 내세를 샀으니 차라리 나았다. 지금은 썩어 없어질 것을 복이라는 이름으로 사고팔고 있으니 이전보다 더 처참하다.
시대적인 배경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보면 실체도 없다. 기본적으로는 상대주의다. 그래서 옳고 그름 자체를 가리지 않는다. 모든 게 다 옳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다 옳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틀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모든 옳음의 기준이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그런 분위기가 교회에도 들어왔다. 목사인 우리도 물이 들었다. 그래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잘 말하지 않는다. 대신 교인 각자에게 좋은 것이 뭔지 살피고 그걸 주려고 애쓴다. 소위 복 장사를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범신론과 통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지만 상대주의를 부르짖는 저 자신은 절대적이어야 하듯 이 세상에 있는 조그만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전체인 신을 이룬다. 세상이 곧 신이라는 이 사고방식은 오늘날 범신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힌두교, 불교 등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뉴 에이지도 범신론과 통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복을 사고팔고 하는 것을 가리켜 번영복음 또는 성공신학이라 부르는데 이 거짓 복음 역시 파 내려가면 저 밑바닥에는 범신론 세계관이 깔려 있다. 컴퓨터, 인공지능, 두뇌과학, 양자역학 등 첨단 학문도 정신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범신론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이 범신론 하나로 연결된 채 뒤엉켜 흘러가고 있는 그런 시대다.
오늘의 재미고신
그런 가운데 우리가 재미고신으로 이렇게 모였다. 우리는 교회다. 500년 전 교회의 타락은 교회가 주도한 타락이었다. 교인들은 그저 잘 몰라 속았을 뿐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많이 똑똑해졌지만 오늘 교회의 부패상 역시 교회의 책임이요 교회를 이끌어가는 우리 목사들의 잘못이다.
우리 고신은 다른가? 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의 목표는 거룩함인데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 17:17). 우리가 우리 교회를 말씀의 현장으로, 다시 말해 이신칭의가 있고 또 그에 따르는 성화의 현장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도 복을 사고파는 시장판이 되고 만다. 우리가 교회인지 시장인지는 매주일 하는 설교를 분석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 예수의 은혜를 전하는 설교는 한 달에 몇 번이나 되는가? 주님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몇 번이나 하는가?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한 달에, 아니 한 해에 몇 번이나 가르치고 있는가? 돈 문제나 인간관계 문제에서 정직하게, 성실하게,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얼마나 자주, 얼마나 강하게 가르치고 있나? 한 주간 죄 많이 짓고 온 사람들에게 죄를 지적하고 꾸짖고 다시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몇 번이나 들려주는가? 많은 교회가 회개하라 촉구하지도 않고, 그저 주님의 위로만 서둘러 전해준다. 가짜 위로, 가짜 은혜다. 그게 복 장사다. 회개라고 해야 그저 목회기도 시간에 지난 주간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문구 하나만 넣는 게 전부라면 기도문 한 두 개 외고 죄를 용서받는 천주교보다 나을 게 뭐가 있나?
설교 내용도 내용이지만 스타일도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은 권면도 있지만 명령도 많다. 그런데 권위 자체를 싫어하는 시대 분위기 때문인지 요즘 설교에서도 명령은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위로해 주고, 부드러운 솜 방망이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권고하고, 설득하다 못해 애원까지 하는 그런 설교로 바뀌어 버렸다. 성경도 교리나 율법을 전하는 본문은 잘 고르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내러티브 곧 이야기 스타일을 선호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 위주로 읽어주고 시나 소설 같은 감동을 주려고 애를 쓴다.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의 상황도 어느 정도 고려해야 되겠지만 방법을 넘어 원리까지 훼손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말씀으로 생명을 살리는지 아니면 가짜 복 장사를 하고 있는지 헌금기도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헌금은 하나님께 은혜 받은 성도가 그 은혜가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돈이다. 그 돈으로 교회 살림도 살고 선교와 구제도 하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복 장사를 하는 교회에서는 헌금을 투자로 변질시킨다. 심한 곳에서는 드리는 액수의 30 배 60 배 100 배로 갚아 달라고 요구하지만 우리 고신은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대신 마음에 부담이 없도록 생업에 복을 달라는 식으로 두루뭉수리하게 기도한다. 목사도 교인도 복이라는 말을 들을 때 돈 생기고, 일 잘 풀리고, 몸 건강하고, 자녀들 좋은 대학 가고 하는 일들이 떠오른다면 그게 바로 복 장사다. 그런 복을 사고파는 가운데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함께 멸망으로 달려간다.
우리는 재미 고신이다. 우리는 우리가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순교정신으로 30여년 전 재미고신이 태어났다. 순교자는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은 사람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말씀의 진리를 지키는 일을 우리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 당시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던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자라는 꾸지람만 듣고 말 것이다 (마 23:29-31). 순교자들처럼 하지도 못하면서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것은 그 순교자를 죽이는 것과 같다고 주님은 경고하셨다 (마 23:31).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몸부림치고 목사로서 성도들을 거룩함에 이르게 하려고 애쓰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하신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순종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몸부림을 치면서 주님을 더욱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교인들에게도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여 주님의 은혜에 머무르도록 돕는다. 그리고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열매로 자부심을 느끼는 대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
우리가 사는 미국은 첨단 사조가 힘을 쓰는 곳이다. 우리도 이미 거대한 시대조류에 휩쓸려 가고 있다. 이 조류를 이겨낼 역량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순교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핵심은 말씀이다. 시대 조류는 말씀을 어지럽히고 있다. 지난날 이신칭의의 진리를 감추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도 복음의 진리, 사람을 살리는 참 생명의 말씀을 감춘 채 거짓 복음, 가짜 복음을 주입하여 교회를 시장판으로 만든다. 시대 조류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오직 성경으로! 참 말씀이 아니면 못 살린다. 영혼을 걱정한 루터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게 우리 재미고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목사 개인 개인이, 시찰이나 노회가, 나아가 총회 차원에서 우리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 개혁주의 전통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지금 재미고신에는 한국 고신 출신이나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 (M. Div)를 한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다. 개혁주의 소속이 아닌 사람들이 재미고신에 가입하는 과정을 보면 개혁주의로 무장하도록 돕는 일보다 그저 사람하나 얼른 당겨오는 게 급하다는 느낌이 든다. 개혁주의가 이렇게 사소한 것이었다면 왜 고생해 가며 3년, 4년 개혁주의를 배웠는지 모를 일이다.
재미고신의 앞날을 생각하면 더욱 갑갑하다. 한국 고신에서 미국으로 많이 와 주고 미국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 가입해 주기를 바랄 뿐인데 특정 학교 출신이라고 개혁주의일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신학교 출신은 그냥 받고 어디 출신은 무슨 과목을 교육시켜 받고 하는 기준이 있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잘 된 기준인지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이 미국은 각 분야에서 경쟁력이 세계최고다. 의학 분야도 마찬가진데 미국의 내과 전문의 자격증은 유효기간이 10년이다. 의학지식이 계속 발전하기 때문에 10년마다 시험을 다시 쳐야 전문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 신학은 의학과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정신적 도전은 더 거세고 더 위험하다. 재미고신의 앞날도 걱정이지만 더 급한 건 지금이다. 지금 온 세계가 거대한 사조에 휩쓸려 가고 있다. 온 몸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끌려간다.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도 십 년, 이십 년 지나면서 다른 풍조에 물이 많이 든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또 우리 각자도 마음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이미 오염이 되었다. 이대로 가만 있으면 망한다. 몸부림을 쳐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목사 입장에서 볼 때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노력에는 말씀과 신학을 거듭 공부하는 재교육이 필수다. 그런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설교법, 목회상담, 큐티 세미나 등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많지만 그 가운데 개혁주의는 얼마나 되겠나? 인기를 좇지 말고 말씀을 바로 알아야 되는데, 참 말씀으로 바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부족하다. 미국 땅에 와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 다급한 상황이다.
오늘 우리는 개혁주의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재미고신도 개혁주의 원리로 운영되고 있는가? 난 교단 일에 별로 참여하지 않아 잘 모른다. 10여년 전 가짜 성적표 사건에 관여한 것 외에는 다 읽어서 알고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것뿐이다. 그래서 단정은 못 하지만 질문은 할 수 있다. 우리가 개혁주의라면 우리의 원리는 ‘오직 믿음으로’ 또 ‘오직 은혜로’라야 한다. 그런 은혜 가운데 우리의 첫째 목표는 거룩함이 되어야 한다. 칭의의 은혜를 입었으니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적인 범죄, 돈과 관련한 범죄, 말이나 행동으로 거짓을 행하는 일, 이런 문제에 민감하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가슴을 치며 아파하고, 그것들이 누룩이 되어 번지지 못하게 단칼에 잘라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왠지 그런 일보다는 예배당 건물 지키고 교인들 다른 교단에 안 넘어가게 하는 일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참 자주 받는다. 벌을 주기도 쉽게 주고 없었던 일로 하는 것도 참 잘 하는데 그 때마다 이유가 뭘까, 마음에 품은 진짜 원리가 뭘까 궁금해진다.
발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며 마칠까 한다. 교회가 시장판이 되어 공로를 받고 복을 파는 이 시대에 우리 재미고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것을 맡김과 동시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핵심이기에 첫째 관심이 신학교육에 있어야 하고, 기존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세상 풍조를 물리치고 개혁주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와 함께 온 교단이 거룩하게 되는 그 하나에 모든 관심을 쏟고 그것을 재미고신 전체의 원리로 또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가 다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개혁정론> 게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