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성경 그리고 기독교
신원하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I. 들어가면서
1960년대 서구 사회에서 일어난 성 혁명의 물결은 서구 사회에 동성애에 대해서도 전향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사회학자 기든스(Anthony Giddens) 교수는 이 시대의 성에 대한 변화의 큰 흐름은 ‘여성의 성적 자율성의 확대’와 ‘남녀 동성애 허용’의 방향이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동성애자들은 1969년 6월 28일에 미국 뉴욕 시의 스톤웰 인(Stonewell Inn) 술집에 모여 결집한 이후 그 이듬해부터 거리로 나와 줄기차게 자신의 성적 결정권과 자유를 외쳐왔다. 그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난 서구사회에서 동성애는 법적으로 이성애와 나란히 다른 성애의 한 형태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2017년 현재 유럽과 남미, 북미의 상당수의 나라에서 동성끼리의 결합도 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현실이 되어 있다. 이러한 서구 선진국들의 예는 더 이상 우리나라도 안전지대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퓨 센터 (Pew Research Center)는 2014년 조사에서 한국 사람의 39%가 동성애는 도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동성애 수용 여론이 가장 급속히 높아지는 나라라고 분석했다. 20대는 사회가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71%, 30-40대는 48%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세계 성소수자들의 협회인 ILGA(the International Lesbian, Gay, Bisexual, Trans and Intersex Association)는 2015년 현재 한국은 동성결혼을 인정하기 직전 단계에 있으며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는 나라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과장이 아닌 듯하다.
위와 같은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 내부의 문제이다. 사회가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 기독교회가 오히려 기여하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회는 동성애를 성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반하는 죄악으로 믿고 가르쳐왔었으나 지난 20여 년 동안 주류 개신교단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이 입장을 철회하면서 점점 동성애를 인정하는 문화적 흐름에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500만 명이나 되는 미국 루터교회(ELCA)는 2009년 동성애자들이 목사가 되는데 장애가 되는 내용이 있는 교회법을 개정했고, 뒤이어 약 180만 명의 신자를 갖고 있는 미국장로교회(PCUSA)도 2011년에 동성애자들에게 성직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단계로 두 교단은 각각 2014년과 2015년에 동성결혼을 교회에서 축복해 줄 수 있도록 장애조항이 있는 법을 개정하여 발효시켰다.
이렇게 교회가 동성애를 수용하는 과정에는 필수적으로 두 가지 작업이 동반되었다. 첫째로 성경의 큰 흐름인 약자에 대한 보호, 성의 목적, 사랑, 정의, 평등 등의 주지(motif)와 연관시켜 동성애를 논의하면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더 과격한 것은 아예 퀴어 신학자들의 작업처럼 정통적 신학의 주요한 주제와 교리와 연계시켜서 새롭게 해석을 내리는 것이다. 둘째로는 동성애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절들을 하나하나 다르게 해석을 하면서 성경이 동성애를 문제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난 30여년에 걸쳐 서구의 많은 성경 신학자들이 이런 해석에 동참함으로 시대와 문화적 대세인 동성애 수용 흐름에 교회가 합류하게 되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우리 생활의 표준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윤리와 틀과 내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은 동성애에 관련된 성경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봄으로 동성애와 기독교 윤리가 양립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II. 구약과 동성애
A. 창 19:1-29 소돔성 사건
동성애는 ‘소도미’(sodomy)로 칭해졌는데, 그것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성의 풍속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본문에 따르면, 천사들이 소돔 성에 이르러 롯의 집 안에 들어갔을 때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리며 롯에게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절)고 요구했고, 롯이 이들의 행동을 만류하자 그 사람들은 집 문을 부수어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천사들은 이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롯을 피신시켰고(16절) 마침내 하나님은 소돔 성을 불과 유황을 내려 멸망케 했다(25절).
기독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사건을 소돔 성 사람들이 동성애를 행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했다고 가르쳐왔다.
1. 동성애가 아닌 무례의 죄라는 주장과 해석
예일의 역사학자 보스웰(John Boswell, 1947-1994)는 소돔 성 멸망의 이유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크게 4가지로 정리했다: (1)소돔사람들은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조사하게 하셨고 결국 그것 때문에 멸망했다.; (2)소돔성은 소돔 사람들이 천사를 강간하려고 했기 때문에 망했다.; (3)소돔성은 소돔 사람들이 그 천사와 동성애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망했다.; (4)소돔성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방문자들을 무례(inhospitality)하게 대했기 때문에 망했다. 보스웰은 이 중에서 자신을 포함한 많은 현대의 학자들은 점점 (4)의 해석을 선호하는데 그것은 더 신학적 합리성과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 이 해석의 타당성 검토
이 사건이 말하는 소돔 사람들의 잘못이 나그네와 손님에게 무례하게 행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석연치 않다.
첫째로 비록 ‘야다’(yada)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압도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단어의 의미가 단순히 쓰인 빈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단어의 의미는 글의 문맥과 정황 가운데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도 중요하게 고려되어 판단되어야 한다. 본문에 나온 소돔 사람들과 롯의 대화는 구문론적으로 매우 유사한 병렬구조를 갖고 있다.
대화에 쓰인 단어들을 보면, 소돔 사람들이 롯에게 자기들이 타국인들을 ‘야다’하려고 손님들을 “이끌어 내라”(5절)고 요구했을 때, 롯은 그들에게 그들의 언어를 그대로 써서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즉 ‘야다’하지 않은 두 딸을 당신들에게 “이끌어 내[겠다]”(8절)고 응대했다. 롯은 특히 ‘대답할 때 야다’ 앞에 남자라는 단어를 첨가해서 남자를 ‘야다’하지 않은 딸이 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을 통해 볼 때 ‘야다’의 의미가 단순히 지적인 의미가 아니라 체험적이고 성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뜻임을 분명히 했다.
구약학자 기동연은 롯이 소돔사람들이 요구할 때 쓴 히브리어 동사를 그대로 재사용하여 응대했다는 점이 본문을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소돔인의 요구가 성적인 것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주요 근거가 된다고 주석한다. 이어 이렇게 해석한다: “만약 소돔 사람들의 의도가 성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히 친분을 쌓는 차원이었더라면, 약혼자가 있는 두 딸을… 주려고 한 것은 지나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롯은 소돔 사람들이 손님에게 성적인 행동을 하려는 의도를 알았기에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 요구를 대체적으로 들어주기 위해 딸을 내어 주려고 제안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 ‘야다’가 단순히 알려고 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악이란 무례를 범한 것이었다는 해석은 본문의 문맥의 정황이나 논리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여러 다른 성경 구절들에 거론되어 있는 소돔의 죄의 목록들에 동성애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 소돔의 죄가 동성애와 무관하다고 해석하는 주장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다른 본문이 소돔의 죄를 언급했을 때 그것이 반드시 소돔의 죄를 낱낱이 기록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성애가 언급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소돔 성 사람들의 성 풍습과 관계없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소돔의 죄를 언급하고 있는 신약의 유다서 7절은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라고 하고 있는데 이 “다른 육체를 따라 갔다”는 것은 동성애를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급된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in the same manner) 라는 말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5절)과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6절)처럼 하나님을 반역한 것을 의미하는데, 소돔사람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질서를 떠나 다른 육체를 취했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가 아닌 남자와 음란을 행하는 동성애를 시사할 수 있는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러므로 다른 성경 구절의 목록 내용을 근거로 소돔의 죄가 동성애와 무관하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하기는 곤란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B. 레위기 18:22; 20:13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은 창세기 19장에 비해 동성애 행위를 직접 언급하는 본문이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레 20:13). 이 구절들은 남성의 동성애 행위를 부정한 것으로 보고 단호히 금한다. 모세 율법은 강간(신22:23-29)이나 또는 살인(신19:4-13)에 관한 법에서는 그 행위의 동기나 경위와 요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함으로 부지중의 살인이나 오살과 같은 경우에는 정상 참작이 될 여지를 달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 행위는 다른 사형에 해당하는 성적 범죄들 즉 간음, 근친상간, 수간이 언급되어 있는 20장 10-16절 안에 함께 속해 있지만, 그 행위의 동기가 무엇인지, 아니면 다른 경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려나 참작 여지를 두지 않고 바로 극형을 받을 죄로 단언하고 있다. 그만큼 가증하고 중악한 죄로 취급했다.
구약신학자 스와틀리(Swartly)는 율법이 동성애를 가증한 것으로 규정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성의 질서에 거스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근친상간, 수간과 함께 동성애를 거룩한 삶을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피해야할 부정한 것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한편 동성애가 죄가 아님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 구절은 성결(Holiness or Purity)에 관련한 의식 법에 속하는 것이기에 오늘을 위한 도덕적 규범으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헤이즈(Richard Hays) 교수는 모세법은 많은 부분이 도덕법과 의식법을 정확히 구분해 놓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용은 서로 섞여 있다고 말한다고 설명하면서 이런 비판을 반박한다. 근친상간을 금하는 율법 조항은 성결에 관한 규례가 나오는 단락에서도 버젓이 나오기도 한다(레18:6-18). 그렇다면 근친상간 금지 규정도 단지 의식 법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라고 헤이즈는 이런 주장을 비판한다.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최고이자 보편적 규범으로 간주되는 이웃 사랑의 명령과 원수를 갚지 말라는 명령도 바로 이어서 19장 17-8절에 나온다. 모세의 율법은 현대 법전처럼 성격이나 주제별로 체계적으로 구분해 둔 법전은 아니기 때문에 레위기 율법에는 도덕법과 의식법, 시민법들이 섞여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관한 율법은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율법(레11장-17장)에 이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도덕적으로 성결을 유지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율법(18-22장)의 한 부분이다. 이는 순결을 강조하는 부분에 속하는 내용이다. 18장은 대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들어갈 땅인 가나안의 거주민들이 행하기도 했던 것처럼 근친상간이나 동성애나 수간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답게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명령이다.
이에 대해 신학자 객넌(Robert A.J.Gagnon)은 이 명령은 언약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주어진 율법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거룩을 반영하고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할 언약 백성들이 이전의 애급 사람들과 앞으로 들어갈 땅의 가나안 인들의 가증한 성의 행습을 따라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만드신 성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맥락에서 명령된 성 규범이라는 것이다. 18장은 언약 백성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성 생활에서도 그 경계를 지켜야 하며 동성애(22절), 근친상간(6-18절), 간음(20절) 그리고 수간(23절)과 같은 것을 결코 행해서는 안됨을 명령한다. 모세 율법은 배우자와 비배우자의 경계, 부모와 자식 간의 경계,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 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금하면서 아울러 동성끼리도 경계를 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결코 제의적/의식적 성결 법에 관련된 내용이 아니고 도덕법의 구체적 내용으로 보아야한다. 그리고 레위기의 이 율법을 보편적 도덕법으로 봐야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은 신약시대에 초대교회가 율법의 이 내용을 규범적으로 이해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면 잘 해 결되어질 수 있다.
III. 신약성경과 동성애 딤전 6:9-10, 딤전 1:10
신약성경에 동성애에 관련된 간단한 언급은 디모데전서와 고린도전서에 있다. 디모데전서 1장 10절에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의 목록에 남색하는 자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도 동성애에 관해 이렇게 가르친 바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 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6:9-10)고 가르쳤다.
고린도전서에서 “탐색하는 자”로 번역된 원어는 ‘말라코이’인데 이 헬라어는 ‘말랑말랑한’(soft) 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당시 이 단어는 성행위 때 수동적인 행위를 하는 젊은 남자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는데, 주로 젊은 남창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와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한 “남색 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인 ‘알세노코이타이’(Arsenokoitai)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그 이유는 당시 사회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신조어였기 때문이다.
알세노코이타이에 대해 연구하던 스크록스(Scroggs) 교수는 유대 랍비문헌을 자세히 살피는 가운데, 이 단어는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당시 칠십인 번역본(LXX)에서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을 번역할 때 사용했던 단어 두 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파악하면서, 이 단어는 그 본문에 나온 단어들을 뽑아내어 신조한 합성어임을 주장했다. 즉 레위기 18장 22절의 “남자와 동침하는”(히, 미시카브 자쿠르)에서 쓰인 ‘남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센’(arsen)과 ‘동침’에 해당하는 ‘코이테’(koite, 침대)를 결합한 합성어라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 70인 번역본에 나온 레위기의 본문 내용을 참고하여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이 단어를 신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남자와 동침하는 남자를 가리키되 주로 능동적으로 동성애를 행하는 남자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그렇다면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많은 도덕적인 죄들을 열거하는 맥락에서 동성애를 언급했고 또 동성애를 가리키는 새 단어를 동성애를 금지하는 레위기 율법 구절에 쓰였던 단어들을 토대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것은 바울이 레위기의 동성애 금지 내용을 담은 명령을 신약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도덕적 규범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동성애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어울릴 수 없는 삶의 방식임을 이 본문을 통해서 분명히 가르쳤다고 보아야 한다.
IV. 바울이 말한 역리로서의 동성애와 이에 대한 논쟁과 분석: 로마서 1:24-27
로마서 1장 24-27절은 바울이 당시 사람들의 동성애 행동의 모습과 그에 대한 평가와 그것이 자연/본성과 역행되는 부끄러운 성격을 지닌 행동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에, 이것을 통해 동성애에 관한 바울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 윤리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 구절들이 속해 있는 전후 내용들이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적 양상을 다루는 신학적 설명을 제공해 주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동성애를 신학적 맥락 가운데서 바울이 언급한 구절로 평가되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롬 1:24-27).
A. 본문의 구조와 문맥
1. 인사 및 복음의 필요성 그리고 전하려는 의지 (1:1-17)
로마서 1장의 전반부는 인사말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어 바울의 복음에 대한 해설이 담긴 복음에 대한 과감한 선언으로 출발한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복음(1절)이요, 그의 아들의 복음(9절)으로서, 이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16절)고 소개한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dikaiosyne)가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는 종말론적 도구가 바로 복음이라고 서술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6-17절). 바울은 이 복음이 율법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방인들 모두에게 다 필요하다고 말하면서(16절), 자신이 로마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한다.
2. 복음을 전해야할 이유: 불의한 이들에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1:18-23)
바울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기에 이들은 이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할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18절).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 가서 꼭 복음을 전하려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8절).
그런데 이 불의(adikia)는 바로 앞 절 17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dikaiosyne theou)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였다. 인류의 불의의 실체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았지만 그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바울은 인류전체의 “불의”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18절)하고 난 뒤, 이어 19절에서 32절에 걸쳐 인간 불의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그 불의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영광 돌리기를 거부한 것이었다(21절).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통해(19-20절), 양심을 통해(32절),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도덕법을 통해(2:12절 이하) 하나님과 당신의 진리를 핑계하지 못할 정도로 계시하셨지만, 인류는 이 증거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대신 우상을 숭배하는 삶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23절).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하나님에 대해 거스르는 방향으로 행하게 된 모습이다. 신약학자 부르스(F.F. Bruce)는 이것을 가리켜 인류의 “고의적 무지”(deliberate ignorance)라고 표현한 바 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한 뒤 하나님의 진리을 거짓 것으로 바꾸어(25절)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았지만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반역하여 대항한 것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억눌러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기를 거부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고, 유대인은 하나님을 알고 그 계명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에 사용했지 정작 자신들은 그 율법에 따라 살지 않았다고 바울은 설명한다(2장 17절 ?3장 20절). 따라서 헬라인이나 유대인들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3. 하나님의 내버려둠과 동성애(24-27절)
본문 24절은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행하신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신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그들을 내버려둔 것이라고 3번에 걸쳐 말한다 : “(성적인) 더러움”(24절), “부끄러운 욕심”(26절), “상실한 마음”(28절). 그 결과 이들은 다양한 도덕적 죄들을 범하여 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바울은 18-23절에 하나님이 진노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것을 25절에 다시 짧게 요약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26-27절에서 진노의 결과로 내버려둠을 당한 사람들이 성적인 영역에서 동성애를 행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4. 파생적인 도덕적 죄악들(28-32절)
이어 바울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이들을 상실한 마음 즉 부패한 지식체계에 내버려두게 되었고 그러자 이들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내버리고 온갖 종류의 비도덕적인 죄들을 행하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거림,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거역, 우매, 불신실함, 무정, 무자비함과 같은 죄들이 다 이런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이들이 저지르며 살게 되었음을 분명이 말한다.
타락한 인간은 이런 일이 심판받을 죄임을 알면서도 이런 지식을 억눌러버리고 이런 죄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런 죄악을 범하는 다른 사람들을 옳다고까지 정당화하면서 살아간다고 바울은 말한다.
B. 맥락을 통해본 동성애(24-27절) 이해
앞서 분석한 대로 바울은 18-23절에 하나님이 진노하게 된 이유를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버리고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범한 각종 죄악들을 열거하고 있고 그 중에서 동성애의 죄악을 범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와 도덕적 타락, 각종 죄악, 동성애의 관계에 대해 날카로운 해설을 해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저지르는 동성애와 비도덕적인 죄악들과 같은 부패한 행동들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한 근본적인 죄 즉, 하나님 섬기고 예배하기를 거부하고 피조물을 섬기기로 한 죄를 저지른 것에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25절).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여 그들을 더러움과 수치스런 욕심(정욕)에 내버려두자 남자가 순리대로 여자쓰기를 버리고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7절).
이것에 관해 주석학자 케재만(Ernst Kaesemann)은 매우 인상적인 분석으로 동성애의 성격을 규정한다. 즉, 바울은 동성애와 다른 여러 비도덕적 행동들을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cause)이 아니라 진노의 결과(consequence)로 말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한 것이 사람들이 동성애와 여러 부패한 죄악들을 자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해 반역한 근본적인 죄”(the primal sin of rebellion against the Creator)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에 대해 진노했고, 그들을 자신의 정욕에 내버려두는 심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결과로 사람들이 동성애 행위와 각종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케재만은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겼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자 그들이 하늘의 군대섬기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설교했던 구절(행7:42)을 언급하면서, 내버려둠을 가장 무서운 심판으로 말한다. 동성애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거부와 반역에 대한 하나님이 진노의 결과로 내버려둠을 당한 인간이 자기 뜻대로 행한 죄임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왜 바울은 하필이면 많은 죄들 가운데 동성애를 꼭 집어내어서 진노의 결과로 언급했는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약학자 쉬라이너에 따르면, 바울에게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인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이기에 피조물을 섬기는 삶은 당연히 비자연스러운 삶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비자연스런 삶을 택한 인간은 수평적인 관계 즉, 사람들과의 삶에서도 비자연스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도구로 동성애를 끄집어내어 사용했다.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거부한 비자연스런 행동과 삶이라고 하면, 동성애 행위도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자연스런 성 질서를 무시하여 행동하는 인간의 비자연스런 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헤이즈도 바울은 동성애는 인류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를 거스른 방식을 잘 보여주는 적절한 이미지로 보고 동성애를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고 이해한다. 즉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한 몸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창조하셨고 그런 목적을 위해 성을 사용하도록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도]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섬[긴]”(25절)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동성애 행위가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동성애를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고 반역한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 이들이 범하게 된 많은 죄악들의 하나로서 그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로마서 1장 26-27절의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부끄러운 짓인 동성애를 했다고 설명하는 구절에서, 한국어 성경은 단지 남자와 여자로 변역했지만, 원문은 남자 (aner or anthrophos, man), 여자(gyne, woman)와 같은 사회적 구분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닌 수컷(arsen, male)과 암컷(thelys, female)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70인 역이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를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썼던 그 단어를 그대로 쓴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울은 하나님이 창조 때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사는 것을 규범으로 하셨음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것을 제시하려고 한 증거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이혼과 결혼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마 19:4; 막 10:6)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male)와 여자(female)로 지으시고” 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도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알센과 텔루스 즉 수컷과 암컷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님은 여기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말씀했다. 따라서 바울이 1장 26-27절에서 수컷(arsen)과 암컷(thelys)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 제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성애를 창세기에서 보여준 창조의 질서인 자연을 역행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V. 결론
동성애는 고대 근동 지역과 초대 기독교회를 둘러싸고 있던 지역과 문화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기독교 공동체는 이 풍속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신학에 있어서도 이것에 단호했다. 성전 예배나 집단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위 문화의 신전 예배에서는 신전 남창들과 동성애를 포함한 음란 행위를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 이것을 완전히 제하여 버렸고(신23:18), 나아가 아예 이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율법에 명시해서 이방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도덕을 보호하여 언약 백성의 거룩한 삶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형태나 동기에서든 관계없이 동성애 행위를 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신약의 초대교회에서도 분명했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관용의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분명하며 바울이 제시한 이 구절에서 추호도 모호하지 않다. 신학자 판넨베르크(W. Pannenberg) 교수는 이 구절 들을 읽고도 동성애 행위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보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만약 교회가 동성애를 승인하고 동성결혼을 이성결혼과 동일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가 아니다”고 단호히 말한다. 한국교회는 판넨베르크 교수의 말을 뼈아프게 새겨야 할 것이다. 동성애자들도 이웃이고 사랑의 대상이지만 그러나 동성애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삶의 방식이며 기독교윤리와 양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