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의 칭의론, 고신신학자답지 않다.
정이철 <바른믿음> (2017.10.05).
박영돈 교수의 칭의에 대한 글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많다. 어떤 분이 박 교수의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라는 글을 자신이 페북에 올리면서 “과연 올바른 글일까요?”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내용을 보았다. 궁금하여 나도 박 교수의 그 문제의 글을 읽었다. 박 교수의 글을 읽고 느낌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큰 틀에서 전통적(성경적) 칭의론자들과 궤적을 같이 하고, 동시에 김세윤 등의 믿음으로 구원 얻으나 그 후의 삶의 내용으로 구원이 완성되기도 하고 파괴되기고 한다는 행위구원론자들의 주장에도 일면 동조하여 더 넒은 지지층과 인기를 구가하려는 신학자의 행동이라고 생각된다.”(정이철 목사가 박 교수의 글을 읽고 느낀 점)
물론 박 교수는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단 구원을 받으나 이후의 행위, 회개, 성화의 정도에 의해 처음에 얻은 칭의가 계속 유효할 수도 있고, 파산되어 다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
만일 박 교수가 이런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풍겼으면 금새 박살났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절대로 이렇게 말할 신학자는 한국 교회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 교회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평가되는 예장 고신의 조직신학 교수이신 분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박 교수가 교묘하게 김세윤 등의 믿음 이후의 신자의 삶과 행위가 구원 완성의 중대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론에 고신의 조직신학 교수답게 가차없는 비판의 자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박 교수가 뭐라고 했는지 다시 보자!
“구원파의 교리에 의하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으면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살아도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 (중략)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보는 많은 교회에서 전하는 구원의 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박사가 얼마 전 그의 강의와 책에서 대다수의 한국교회도 사실상 구원파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세윤 박사의 진단을 100%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박영돈,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
참 이상한 말이다. 지금 한국 교회의 그 어떤 목사가 한번 구원 받았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방하다고 가르치고 있을까? 과연 박영돈은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이런 천박한 논리를 도입하였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음껏 하고 난 후에 그가 기껏 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김세윤 박사의 진단을 100%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과연 이런 말이 고신의 조직신학자로서 할 소리일까? 김세윤이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와 구원을 얻기는 했으나, 그 이후의 삶의 내용들, 즉 회개, 성화의 열매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칭의와 구원을 계속 유효하다고 판정하거나 반대로 취소하여 다시 지옥에 보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만일 김세윤이 더 늦기 전에 자신의 행위구원론적인 주장과 사상을 철회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내년 3월 노회에서 그의 사상을 조사하여 달라는 헌의안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구원받은 자의 행위를 비슷한 선상의 구원의 요건으로 강조하면서 성경과 종교개혁의 핵심을 파괴하는 김세윤의 논리를 박영돈이 거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이다. 박영돈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복음의 변질입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는 잘못된 구원론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박영돈,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
박영돈의 이 말은 구원받은 자의 삶의 내용을 보고 하나님이 다시 최종적으로 구원의 지속 여부를 평가하신다는 이단적 행위구원론자 김세윤의 논리와 동일하다. 김세윤이 뭐라고 강의하였는지 들어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 제자도는 전혀 없이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너는 의인되었다는 것으로 자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삶이 없이, 제자도가 없이 사니까, 그러니까 그 교회가 뭐가 되었어요? 결국 나찌 이데올로기의 서포터가 되어가지고 반인륜적인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니까 그 상황에서 본훼퍼가 선지자적으로 뭐라고 했어요? ‘이건 엉토리 복음이다. 이건 그리스도의 피 값을 싸구려도 만든 ...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의 몸을 자기 피 값으로 샀다고 ... 어떻게 그 몸을 창기와 연합할 수 있냐?’고 나무라잖아요. 엄청난 은혜인데 그것은 단지 ‘나는 이제 의인이 되었으니까, 예수 믿고 영접하여 너는 무죄 선언받고 의인이 되었어!’”(김세윤 교수)
“한국에서는 구원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정통파 목사들이 사실상 구원파 복음을 설교하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장로교 개혁신학이 앞도적이거든! 개혁신학을 잘못 배워가지고 예정론의 의도, 바울이 예정론을 펼치는 intent(의도, 목적)를 살피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신실하게 지켜주신다 라는 위안을 주기 위해서 그래요!”(김세윤 교수)
믿음으로 구원받고, 이후의 삶의 내용으로 구원 유지의 여부를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다시 판단하신다고 가르치는 행위구원론자 김세윤의 핵심 주장이 위 내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신자들의 삶이 엉망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개혁주의 교회들의 구원론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김세윤의 주장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을 얻었지만, 이후의 삶이 엉망이면 다시 칭의를 잃고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원론을 가르쳐야 한국 교회의 신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살 것이고, 비로소 하나님 백성다워 질 것이라는 것이다.
김세윤의 이런 말들은 매우 그럴싸하지만, 그가 성경과 기독교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아무 공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도록 은혜를 주시고, 그 사람의 믿음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여 주심으로 얻어지는 구원이다. 구원 얻기까지의 사람의 자질, 공로, 삶의 내용, 성화, 기도 등이 전혀 구원에 작용하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그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구원을 주셨을 뿐이다.
그러나 구원받고 성령이 임하시면 실제로 그 사람의 삶은 변해간다. 구원받으면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의 기적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능에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음으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미 뗄 수 없도록 연합되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을 통해 십자가의 권능이 함게 임하였으므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에 오염된 마음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람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면 누구나 실제로 거룩하게 변해가는 성화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안 타나나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삶이 변하는 성화는 사람의 각오와 노력의 열매가 전혀 아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죄악된 마음을 스스로 이기고 고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능에 우리가 연합되게 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죄에 오염된 우리의 마음이 치유되니 행동이 변하고, 회개하고, 성화되는 것이다.
앞에서 김세윤이 성경과 기독교를 잘 몰라서 엉뚱한 말을 한다고 감히 내가 말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가 이 성경적인 원리를 간과하였다. 어떻게 구원받은 자의 삶이 실제로 거룩하게 변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모르면서 구원받은 신자답게 살라며 목소리를 높여 강조하니 결국 이단적 행위구원론으로 치달았다. 더 나아가 구원받은 자의 삶이 하나님 백성답지 못해도 천국에 간다고 잘 못 가르치는 구원론 때문에 한국 교회가 망한다고 소리쳤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의 영광을 김세윤이 크게 망쳤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주장들을 스스로 철회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큰 일을 당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불행한 사실은 박영돈도 김세윤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복습했다는 것이다. 박영돈의 말을 다시 살펴보자!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는 잘못된 구원론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박영돈,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
여기서 박영돈이 지적하는 한국 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이란 무엇일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이어서 결코 다시 사라지지 않고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구원이라는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구원론이다. 우리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배운 구원론이다. 박영돈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만세반석 위에 서 있는 이 구원론을 헐고자 시비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전통적 구원론을 강하게 외치고, 동시에 이단적 행위구원론자 김세윤을 교묘하게 두둔하면서 양 측의 지지를 동시에 얻으려는 박영돈의 신학자로서의 결함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박영돈이 삶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칭의는 처음부터 기독교에 존재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는 다음의 내용들은 다 맞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복음의 변질입니다.”(박영돈,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
“믿기만 하면 거룩함이 없어도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성경은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도 이런 사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박영돈,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
“거룩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성경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날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박영돈,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
그러면 박영돈의 칭의론의 문제는 무엇일까? 조금이라도 발달한 신학적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간파했을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변화된 삶으로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는 박영돈의 논리는 누구나 목에 힘주어 하는 말이다. 그리도 동시에 이단적 행위구원론자들이 더욱 더 강조하는 내용이다. 박영돈은 전통적 개혁주의 칭의론 지지자들에게도 박수를 받고, 동시에 김세윤 류의 행위구원론자들에게서도 박수를 받고자 ‘구원얻는 믿음’과 ‘구원얻은 자의 거룩해진 행위’를 동시에 강조했다. 그래서 전통적 개혁주의 칭의론자들이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게 과연 맞는 소리인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박영돈의 잘 못은 과연 무엇일까? 구원받은 자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삶의 변화, 즉 실제로 서서히 거룩해지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그리고 삶의 변화도 오직 은혜로!” ... 이렇게 나아가야 성경적이다. 신학자의 본분은 아무 자격없는 죄인을 부르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시고, 그리고 성령과 말씀과 기도로 죄인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고 설명하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의 피로 한번 얻은 구원이 영원한 구원인지? 왜 은혜로 구원 얻은 사람은 야곱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답게 변화되어 가는지? 에 대해 복음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신학자의 할 일이다. 신학자들이 제대로 일하면 신자들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열성을 깨닫고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게 된다. 그 일하도록 신학자들과 교수들과 선생들을 세우셨다.
그러나 김세윤과 박영돈은 공히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얻는 자에게는 합당한 행위와 삶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지극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공히 구원받은 신자의 삶의 변화도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음을 드러내어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게 하지 못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공히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작심하고 결단하여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구원이 유지된다는 행위구원 이단사상으로 많게 또는 적게 기울고 만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쥬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알고 감사하도록 신학자로서 가르치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