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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종교개혁 : 로마서 9-11장을 중심으로 (1)

 

소기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성서신학, 예수말씀연구소 소장

 

I.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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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기천 교수

본 소고를 통해서 제2의 종교개혁이 주는 도전과 의지가 봉화처럼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시간 이스라엘에 대한 성서적인 관점과 이해를 바르게 함으로써 성서 전체를 해석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한 올바른 성서해석의 결과는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2017년 10월에 500주년을 맞이하게 되지만, 여전히 개혁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수년 전부터 제2의 종교개혁을 위한 시동을 걸어야 한다는 운동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을 근거로 의인사상(Justification)에 기초하여 개혁교회의 기치를 높게 든 것과는 달리, 본 소고는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거론하면서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달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의 부흥과 회복을 새롭게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하는 것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운동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듯이 유네스코의 “성전산과 통곡의 벽은 유대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라는 결의(찬성24표/기권26/반대6표)는 너무나도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2017년 7월 28일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요르단인 수 백 명이 이스라엘 규탄 시위를 열었다. 이들은 약 200m 구간 거리 행진까지 하며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암만에서 벌어진 이번 대규모 반이스라엘 시위는 양국 간 긴장 관계가 고조된 것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더구나 요한복음마저도 유대인을 적대시한다고 간주한 나치 독일에 의해 600백만 유대인이 학살된 직후에 언제나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1948년에 극적으로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하셨지만, 유대인들이 아직까지 마음의 문을 닫고 제3의 예루살렘 성전건축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희망하면서 아랍권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과연 개혁교회가 지금 여기서 할 일은 무엇인가? 돈 자랑만 하는 성지여행에다 단순한 평화행진과 같은 가나안 땅 밟기와 아무런 감동 없는 단기선교를 빙자한 여행만을 일상적으로 다니는 한국교회는 과연 유대인에게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하고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지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혁교회-유독 한국교회와 독일교회-만이 대대적으로 벌이는 종교개혁 500주년은 로마 천주교를 비롯한 타종교인들 특히 유대교와 이슬람교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울이 깨달은 선교원리가 무엇인지 새롭게 들여다보려고 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무슬림과 같은 열방의 세계에도 복음이 전해져야 하고, 열방의 구원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유대인들을 시기하게 하였지만, 종말의 때에 이방인들의 도움으로 결국 유대인들도 마지막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을 중심으로 본 소고는 이런 바울의 선교원리를 로마서 9-11장에서 찾아서 보다 구체적인 제2의 종교개혁을 위한 밑그림으로 그리고자 한다. 본 소고는 이미 바울 자신이 27년 동안 지중해 전 지역을 다니면서 대부분의 유대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간 상황에서 여전히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를 거론하며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될 것이라는 새로운 비전과 기대를 가진 로마서 9-11장을 통하여 오늘날 지구촌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거를 찾아서 제2의 종교개혁을 모색하고자 마련된 것이다.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복음서에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예수의 복음에 굳건하게 서지 못할 때, 로마 천주교가 악한 사탄의 권좌에 앉아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뜻과 제도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보다 중시하는 상황을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인간의 의보다는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이신칭의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러나 지난 500년 동안 개혁교회가 교단과 교파로 난립하며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을 필두로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하고 있는 로마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권세와 명예만을 앞세우는 현실이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 초림하신 것을 믿고 나아가는 개혁교회의 모습에서 아무런 도전이나 감동을 받지 못하게 한 잘못을 먼저 회개해야 한다. 율법과 복음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이 목이 곧고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 갈 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두 팔을 벌려 회개하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심판하시려는 뜻을 돌리시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회복시키려는 놀라운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것을 기억함으로써 모든 교회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고 교회 예산과 인력을 확충하여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위한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II. 성령과 긍휼(χάρις)

바울은 로마서 9-11장을 부록이나 그냥 건너 뛸 수 있는 징검다리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1-8장의 기독교 교리를 12-16장의 기독교 실천에 꼭 필요한 중심부로 삼기 위하여 성령과 긍휼이란 두 개의 기둥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이 미친 이후에 유대인의 구원이 임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1.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제2의 종교개혁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로마서 9-11장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스라엘에 관련된 장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은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해 이스라엘의 버려짐을 강조할 것이고, 이스라엘주의를 찬성하는 이들은 필요한 부분들을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신구약성서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이 로마서 9-11장을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주석을 달고 해석을 하는 학자나 주석가나 목회자를 만나거나 보지 못하였다.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이 오로지 ‘성령’에 이끌려 드로아 환상을 보고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 새로운 세계선교의 기초를 만들어 나간 것에 견주어 볼 때, 제2의 종교개혁은 루터와 같은 어떤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주도하셔야 교회가 본질적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우리말 번역이 “성령 안에서(έν πνεματι αγιω)”라는 문구를 2절에 배치하는 것과는 달리, 사실상 바울은 9장을 시작하면서 1절부터 ‘성령’을 천명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바울이 9-11장을 시작하면서 성령을 강조한 것은 제2의 종교개혁이 그 어떤 인간적 방편이 아니라, 오직 성령(Solus Spiritus)에 의해 새롭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의 비전은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라는 구절로 복음이 다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에게 전해져야 할 것을 분명히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권들인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롬 9:4)이 있기에, 현재 이스라엘이 복음에 불순종한 상태에 있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취소될 수 있는가?”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인하여 바울은 고민한다. 그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가진 특권 중에서 유대인의 혈통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나신 것(롬 9:5)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은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로 된 것이다. 약속의 자녀라고 할 때는 인간에게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는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 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 진다.

이러한 유형론적 비교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구원이란 인간의 최대의 불행, 저주 받을 죄, 죄의 결과로 생기는 죽음 등에서 구한다는 뜻이 있다. 인간의 죄와 그 현실은 원인류의 타락 이래로 불가항력적인 세력으로 인간 실존에 드리워져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죄는 네 방면에서 불행을 빚어내게 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등이다. 그런데 인간 자신에게는 이들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도우실 수 있고, 죄의 현실에서 건져내실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이 의미를 가지도록 변화시키실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성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려 인간을 구원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하셨다. 이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구원이다.

이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교회 가운데 강력한 은사와 선물을 주심으로써 제2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회로 하여금 본질을 되찾고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다시금 복음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실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권이 분명하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취소될 수 없다고 분명히 하면서도 유명한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하여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라고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하게 비판한다.

1948년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신 은혜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고 주권국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여, 이스라엘은 아직도 주변을 둘러싼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와의 갈등을 이어가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긍휼에 합당하게 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양국은 1994년에 맺은 평화 협정에 따라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2017년 7월 14일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 3명이 성전산 북쪽 출입구를 지키던 이스라엘 경찰관 2명을 사살하자 이스라엘 쪽은 이슬람 사원이 있는 황금 돔 경내까지 추격해 총격 범들을 사살했다. 이스라엘 쪽이 사후 조처로 성전산 출입구에 금속탐지기와 회전문을 설치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충돌이 커졌다.

이런 혼란한 시점에서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제2의 종교개혁이 오늘날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고,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온 세계를 떠돌며 방황하던 이스라엘에게 정치적 주권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권을 맡은 명실상부한 복음의 장자로서의 지위까지도 회복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를 긍휼로 바꾸는 일이 실현될 수 있다. 이런 일은 오직 성령께서 주도하셔서 진노를 긍휼로 바꾸는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룰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긍휼로 바꾸는 일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2. 하나님의 진노를 긍휼(אבר)로 바꾸는 제2의 종교개혁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롬 9:5)과 “약속의 말씀”(롬 9:9)과 “하나님의 뜻”(9:11)과 “성경”(롬 9:17; 10:11)과 “그 말씀”(롬 8:28)을 연거푸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롬 9:14) 혹은 “하나님이 허물하시느냐”(롬 9:19)라고 반문하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롬 9:18)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의와 능력’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 전체에게 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온다.

바울은 토기장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긍휼의 그릇“(롬 9:22-23)을 준비하셨다는 말씀을 통하여 과거 이스라엘에 임했던 ‘하나님의 진노’가 이제는 ‘긍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유명한 호세아와 이사야에서 각각 두 구절씩을 인용한다.(호 2:23; 1:10; 사 10:22이하; 사 1:9)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사상에 대해서 바울은 폭넓게 구약성서의 전승에 의존하고 있다. 이사야 64:8과 예레미야 18:6의 토기장이의 비유는 개작되지 않은 채 바울에 의해 전승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들어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대해 암시하는 비유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방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호세아 전승은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사상을 담고 있다. 이사야 전승은 남은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최후의 선택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언약의 말씀을 통하여 바울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이야말로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위에 언제나 변함없이 임하신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호 2:23)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으로써 죄악을 회개하게 하여 돌이키시려는 의도이지, 진노 그 자체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긍휼이라는 단어 히브리어 라함(אבר)은 우리말이든 헬라어든 영어이든 사실 어느 언어로도 제대로 변역을 할 수 없는 단어이다. 사실 이 라함만이라도 지금 제대로 이해한다면, 더구나 지난 2천 년간 교회가 제대로 이해를 했더라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종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친밀하게 지속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든다. 그리고 이 라함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버려지심(κένωσις)도 더 제대로 이해했을 것이며(빌 2:7),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이방인을 위해 버려지고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신구약성서 전체는 ‘창조주(Creator)-중보자(Surrogate/mediator)-피조물(humanity)’의 3중 구조로 진행되어 왔다. 중보자의 첫 역할을 한 사람은 태초에 아담이었고, 그다음 아브라함, 야곱, 이스라엘 등 일시적 중보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로 내려오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워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역할이 최후의 계시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관련해서 이런 역사를 이루어 오셨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 답은 바로 하나님의 라함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답을 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라함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야 설명이 되는 것이기에 이해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라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라함은 인류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었고, 마침내 이스라엘을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함이 지닌 결정적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도 라함이요, 죄로 물든 인류의 구원에 대한 계획도 라함이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죗값대로 갚게 하지 않는 것도 라함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같지만 다시 회복을 시키시는 것도 라함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버리고 주신 자기 비하의 사랑(Kenotic love) 곧 자기 포기(self-giving)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주권과 인류에 대한 사랑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한 역할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징벌하시고 축복을 통하여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단지 이스라엘은 수동적으로 밀고 당기는(passive centrifugal/centripetal) 역할만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모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바로 하나님의 라함을 동기로 한다. 곧 하나님의 라함이 바로 이해될 때, 우리 성도들도 서로를 위해 자기 포기(self-giving)의 사랑을 나눌 수가 있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순종을 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진정한 라함은 온 세상에 다시 물결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이스라엘은 회복이 되어 진정으로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온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2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라함을 근간으로 하는 자기 비하의 사랑(Kenotic love)이 회복되고 실천될 때 저절로 새로운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 날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완악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라함을 근간으로 우리 모두 이스라엘의 복음화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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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기천 교수 약력

•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Ph.D.
•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 M.A.T.S.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Th.M.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Th.B.
• 송면교회(충북노회) 담임목사 역임
• 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평생교육원장, 장신언어연구원장
- 신학춘추 주간교수, PBS 방송국장, 성서학연구원 원장, 신학과장, 교수회 서기 역임
• 현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회원
• 현 International Q Project 연구 및 집필위원
• 현 예수말씀연구소 소장
• 현 한국예수말씀학회 회장
• 한국신약학회 총무역임

△ 저 서
<예수말씀의 전승궤도>(대한기독교서회)
< 하나님의 사랑과 세계선교>(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 신약성서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연구>(공저, 대한기독교서회)
< 예수말씀 복음서 Q 개론>(대한기독교서회)
< 로마서가 새롭게 보인다>(땅에 쓰신 글씨)
< 현대에 들려오는 예수 이야기>(말씀과 만남)
< 현대에 들려오는 성경이야기>(말씀과 만남)
< 훅스 & 에벨링: 해석학의 역사와 새로운 해석학>(살림, 2006)
< 깨끗한 영성으로 기도하고 실천하기: 기도학교와 내러티브 성경공부>(예수말씀연구소, 2009)
< 히브리서: 인도자용>(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9)
< 히브리서: 학습자용>(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9)

△ 번역서
<신학의 역사>(Alister McGrath 저, 공역, 지와 사랑)
< 마가복음>(Lamar Williamson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 기쁜 소식: 누가복음>(2002 월드컵 전도책자, 서울: 대한성서공회; 동경: 일본성서협회)
< 평화의 의미>(The Meaning of Peace, 한국장로교출판사)
< 현대적인 방법론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공역, 대한기독교서회)
<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연구>(살림, 2008)
< 예수의 복음>(대한기독교서회, 2009)

 

 

<교회와 신앙>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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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19.11.30 Bydschoiword Reply0 Views772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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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Karl Barth and Charlotte von Kirschbaum

    Karl Barth and Charlotte von Kirschbaum: My Response I just read a disturbing, I mean for me personally, earth-shatteringly disturbing essay by Christiane Tietz about Karl Barth entitled: Karl Barth and Charlotte von Kirschbaum. As most of ...
    Date2019.11.30 Bydschoiword Reply0 Views14865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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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No Image

    박영돈의 칭의론, 고신신학자답지 않다.

    박영돈의 칭의론, 고신신학자답지 않다. 정이철 <바른믿음> (2017.10.05). 박영돈 교수의 칭의에 대한 글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많다. 어떤 분이 박 교수의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라는 글을 자신이 페북에 올리면...
    Date2019.11.30 Bydschoiword Reply0 Views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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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예장 통합, 천주교 영세 인정 수용

    예장 통합, 천주교 영세 인정 수용 (교회와 신앙 기사) [ 주요 교단들의 정기총회에서 이단 사이비 관련 보고서들이 제출돼 채택되었다. 먼저 예장통합(총회장 최기학 목사) 제102 총회에 보고된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연구 및 조사 보고서들을 소개한다. ①...
    Date2019.11.30 Bydschoiword Reply0 Views1875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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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제2의 종교개혁 : 로마서 9-11장을 중심으로 (1)

    제2의 종교개혁 : 로마서 9-11장을 중심으로 (1) 소기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성서신학, 예수말씀연구소 소장 I. 서론 ▲ 소기천 교수 본 소고를 통해서 제2의 종교개혁이 주는 도전과 의지가 봉화처럼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시간 이스라엘에 ...
    Date2019.11.30 Bydschoiword Reply0 Views6721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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